경남 합천의 가야산국립공원은 상왕봉, 칠불봉, 동성봉 일대의 주능선과 매화산 남산제일봉을 중심으로 하는 산악경관지대, 그리고 치인리계곡, 홍류동계곡, 백운동계곡 등 하상경관지대의 세 곳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중 남산제일봉은 합천8경 중 제4경으로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컬을 정도로 수려한 산세를 지녔다. 만개한 매화에 비유되는 기암괴석이 날카로운 바위능선에 즐비하게 널려있어 울창한 상록수림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그래서 매화산梅花山이라고도 부르고 매화산의 으뜸봉우리로 그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지만 가야산이나 가야산의 부속봉우리는 아니다. 가야산에 버금가는 다양한 산세를 지니고 있으며 가야남산, 천불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제일봉이다.
이처럼 수려한 비경과 마주하니 혼자 온 게 매우 안타깝다
가야산국립공원에서 해인사입구까지 4km의 계곡이 이어지는데 가을이면 단풍이 너무 붉어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된다하여 이름 붙여진 홍류동계곡이다. 합천8경중 제3경으로 송림사이의 물살이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운 최치원의 귀를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수량 풍부한 계류가 철철 넘쳐흐른다.
산악회버스가 일행들을 내려준 곳은 홍류동계곡을 지척에 둔 청량사입구로 정상인 남산제일봉까지 3.3km를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다. 여기서 산행준비를 마치고 20~30여 가구가 올망졸망 모여 사는 청량동마을을 지나 청량동매표소에서 한 사람당 2500원씩의 단체입장료를 구입하게 되는데 명분은 해인사관람료이다. 명산대찰이란 용어가 이때만큼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명산을 대신하여 사찰에서 돈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30여분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오르면 천불산 청량사라고 새긴 자연석이 세워져있다. 매화산을 두고 불가에서는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천불산이라 부르고 있다. 청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최치원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으로 청량사를 두고 왼쪽으로 좁아진 등로를 따라 걷다가 샘터에서 물을 보충하고 소나무수림속의 제1휴게소부터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여기서 좌측 제3휴게소로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 길을 택해 제2휴게소 쪽으로 향한다. 매화산 남산제일봉 휘하의 숱한 암봉들을 고루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암봉과 철제계단으로 이루어진 바위능선이 늘어섰다
30여 분 바위와 돌이 많은 가파른 경사지대를 올라 벤치가 여럿 놓여있는 안부가 제2휴게소이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난 후로는 암릉이 이어진다. 암릉이긴 해도 계단으로 안전하게 연결되어 고도를 높이는데 별 장애가 없다. 홍류동으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나 첫 봉우리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하늘을 유람하는 기분이다. 데크로 잘 세워진 전망대에서 올려다보는 가야산과 매화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보기 쉽지 않은 가경이다.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산에서일 때가 가장 많다. 다시 촛대처럼 솟은 매화산의 바위들이 절경을 드러내 마냥 눈길 머물고 싶어진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매화산이지만 아직 단풍 물든 가을을 품기에는 많이 이른 편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암봉산행에 족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는데 막상 대하고보니 매화산 암봉은 닭이 아니라 매를 뛰어넘는 봉황이었다.
원효대사가 다녀간 산은 모두 명산이라는 말에 공감해왔던 바인데 수운 최치원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다녀간 산은 산객들이 신뢰하고 탐방할만하다는 생각이 막 드는 참이다. 산에 와서 기대이상의 감회에 젖게 되면 혼자 왔음이 안타까워진다. 이처럼 수려한 비경과 마주하노라면 늘 그렇다.
꼭 함께 오고 팠던 그대이다.
여기 홍류동 거기서도
매화 만개하고 천의 불상 늘어선 작은 금강산이라
가누기 어려울 만큼 그리움 차올라
절대비경에 빠져들며 속으로만 외쳐댄다.
몇 번이고 내지른 고성은
허공 가르며 파장조차 없이 스러진다.
저어기 가야산에 아스라이
투명하게 해맑은 추억 한 덩이만이
메아리 되어 가슴으로 스며든다.
결코 쥐어지지 않는 거품 같은 추상인 걸
결국 허욕의 부스러기인 걸
가파른 암반 딛고 내려서서야 깨우치곤
자조 섞인 쓴웃음 짓는다.
바위와 숲의 멋진 조화, 그 절경에 빠져들다
개성 뚜렷한 암봉들이 속속 눈을 즐겁게 한다
암반이 꽤 넓은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나면서도 활짝 핀 매화꽃처럼 속속 솟은 기암들은 주변의 광활한 산마루를 배경으로 개성 넘치는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안에 길게 놓인 계단과 거길 오르는 원색산객들의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관악산과 수락산을 합쳐놓은 것처럼 기상천외한 바위들을 전시한 바위박물관을 둘러보는 느낌이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질 정도로 암릉산행의 묘미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어 가파른 오르막도 힘든 줄 모르겠다.
벤치가 널려있어 전망대구실을 하는 봉우리가 제3휴게소이다. 여기에서 또 10여분 지나 제4휴게소, 마찬가지로 널려있는 벤치에 앉아 상왕봉과 칠불봉의 가야산 정상일대가 웅장하게 날개 펼치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아늑한 수풀능선이 눈에 잡히는가하면 날카로운 단애가 불쑥 나타나곤 한다. 지엄함과 자애로움이 공존하는 엄부자모의 가정을 상기시킨다. 온순한 초록구릉과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인 기암단애를 반복해 보여주는 설악산 화채능선에 온 듯 착각에 빠지게끔 한다.
제4휴게소를 지나 배낭을 먼저 들어 올려 구멍바위를 통과하고 쇠밧줄을 붙들면서 슬랩구간을 내려섰다가 또 올라서면 주봉인 남산제일봉의 제2봉이 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서도 전망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왼편으로 우뚝 솟은 남산제일봉과 남쪽으로 뻗어 매화봉(해발 952m)에 이르는 능선으로도 독특한 바위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그렇게 남산제일봉(해발 1010m)에 올라서서 막 지나온 능선을 내려다보면 바위와 숲의 조화로움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새삼 인식하게 된다. 사통팔달 시원하게 펼쳐져 가야산을 비롯해 서쪽으로 별유산, 비계산, 남쪽으로 오도산을 관망하고 동쪽 아래로는 지나온 바위전시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위산의 정상답게 역시 우뚝 솟은 암봉이 거기 있었다
점입가경이다. 남산제일봉을 중심으로 금관바위, 열매바위, 곰바위 등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솟은 일곱 개의 암봉들이 차례로 늘어선 모습 또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장관이다. 연속되는 풍광에 숨이 가쁜 적이 있는가. 절경에 눈을 떼지 못해 호흡이 빨라지는 걸 느껴보았는가.
“꼭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왔을 때도 가슴 벅차도록 환영해주겠네.”
정상에서 치인주차장까지의 거리는 3.1km이다. 하산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아쉬워 자꾸만 고개 돌리게 된다. 하산로를 따라 걷다가 가야산 아래로 넓게 자리 잡은 해인사가 눈에 들어온다.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과 이곳 매화산의 남산제일봉, 그리고 이어지는 별유산의 의상봉, 동성봉 등 1000m 이상의 산지들이 연봉을 이뤄 병풍처럼 해인사를 둘러싸고 있으니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복 받은 사찰인가.
남쪽 매화봉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청량사로 회귀하게 되는데 북쪽능선을 타고 해인사방면으로 내려서는 길을 택한다. 하산로는 바윗길오르막과 달리 부드러운 숲길로 이어지다가 물 흐르지 않는 계곡 길로 내려서게 된다. 개방한 만물상을 보고 가야산에서 내려설 때만큼이나 벅찬 앙금이 진하게 고여 온다.
해인사관광호텔이 있고 식당들이 늘어선 치인리에 이르자 아직 이른 철인데도 단풍을 찾아 나선 많은 인파로 차가 빠져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갑자기 이 많은 탐방객들이 천 개의 불상이 감춰진 매화산의 속살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관광단지 언저리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심취해 있다는 게 안타깝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