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집살이 - 안유환
1
박 노파는 오늘도 S아파트 31층 베란다에서 손자의 망원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떨어진 곳은 푸른색과 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낡은 함석판 같은 폐자재가 쌓여있다. 얼핏 쓰레기장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함석판은 오래된 슬레이트지붕이며 한쪽에는 집을 헐어낸 빈터도 있다. 줄잡아 십여 세대가 옛날의 땅집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어도 땅집들은 묘지처럼 조용하다. 뒤쪽은 산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있고 그 길을 지탱하는 옹벽이 교도소 담장처럼 높이 서 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거나 흐린 날은 쓰레기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맑은 날씨 탓으로 집 모양이 선명하다. 박 노파는 그곳이 흉물스럽지 않고 정다워 보인다. 그래서 틈만 나면 망원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흙냄새를 끌어다 맡는다.
집안은 찌개냄비를 태운 냄새가 아직도 다 빠져나가지 않았다. 남은 것을 끓여놓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것을 깜빡 잊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면서 식기세척기 전원을 누르지 않아 이튿날 아침에 손으로 급히 그릇을 씻은 적도 있었다. 박 노파는 식구들이 곤히 잠든 이른 시간에 아침밥을 준비한다. 딸과 사위가 출근하고 두 손자가 차례로 학교에 가고나면 집안은 적막이 자리 잡는다. 박 노파는 마땅한 친구도 없고 놀러갈 곳도 없다. 이웃 아파트 지붕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지향 없이 생각의 여행을 할 때도 있다. “자식들 보고 싶으면 한 번씩 다녀오는 게 낫지 합가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어!” 서울 아들집으로 합솔했다가 시골의 살던 집으로 다시 내려온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살던 집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이따금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가 보아도 벽돌이나 타일로 빈틈없이 덮여 있어 노파가 밟고 싶은 흙 마당은 보이지 않는다.
영감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는 벌써 5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병명도 모르고 민간요법으로 통증을 완화시키며 한동안 참고 견뎠다. 딸네 집으로 와서 대학병원의 진단을 받아본 결과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영감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박 노파는 살던 곳에서 혼자 3년을 더 살았다. 농토도 있고 말벗도 있는 시골에 그대로 눌러 살고 싶었지만 딸은 기어이 엄마를 모시려 했다. 박 노파는 그 마음이 고마워 딸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딸의 입장은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살림을 돌보아줄 도우미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방년에 결혼해 반세기를 살아온 고향을 떠나 딸집살이를 한지도 2년이 지났다.
박 노파는 낮 시간에 재방송되는 연속극을 보는 것 외에 다른 놀이는 없다. 작은손자는 초등학교 6학년, 큰손자는 중학교 1학년 연년생이다. 오후 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들은 챙겨주는 간식을 먹고 학원으로 간다. 토요일에도 TV는 아이들 차지이고 어쩌다 사위가 일찍 퇴근하면 야구중개를 시청한다. 노파와 함께 놀아주거나 대화할 상대는 없다. 중학교 음악교사인 딸은 토요일에도 레슨을 하러 나가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박 노파는 언젠가 아파트 노인정에 가본 적이 있다. 노파들은 둘러앉아 100원짜리 동전을 걸고 화투를 치고, 노인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치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늘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때로 흥이 나면 비치된 노래방 기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박 노파는 마음 놓고 노인정에서 오래 놀지도 못했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면 간식을 챙겨주어야 했다.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도 되었건만 이집 아이들은 하나에서 열 가지 모두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박 노파는 노인정에 발을 끊었다.
손자들이 학원에 가고나면 곧 저녁준비 시간이 돌아온다. 노파는 시장이나 마트에 갈 필요도 없다. 딸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식료품으로 조리만하면 되기 때문이다. 생선도 얼음상자에 넣어 배달이 되고 쇠고기 돼지고기도 냉장으로 받기에 편리하다. 그러다보니 봄이 와도 상큼한 봄나물이나 산나물 한번 맛보지 못한다. 그 편리한 것이 노파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노파는 가정부와 다를 바 없다. 딸은 학교일과 모임 등으로 퇴근이 일정하지 않고, 공인중개사인 사위는 날마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노파는 저녁시간에는 거실에서 TV를 시청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집에만 박혀있는 노파는 딸이 어떻게 지냈는지 바깥소식도 듣고 싶지만 저녁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피곤하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딸이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늦게 들어온 남편의 저녁상을 차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노파의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고 설거지도 엄마가 해야 했다.
일요일엔 딸과 사위는 골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아이들도 친구들과 종일 밖에서 뛰어놀기에 노파는 언제나 혼자이다. 공휴가 되면 한차례씩 가족 나들이를 한다. 딸과 사위가 함께 가자고 말하지만 박 노파는 사양을 했다. 그러다보니 딸은 아예 엄마는 나들이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다. 언젠가 손주들의 권유에 못 이겨 한번 따라간 적이 있었지만 노파는 자기 식구들에게 짐이 되고 거추장스런 존재로 보일뿐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무남독녀 딸은 나이가 들어도 어릴 적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언제나 엄마를 수퍼우먼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식구들 저녁식사가 끝나면 식기세척기로 설거지라도 대신 해주거나 그릇을 받아 넣어주기라도 하면 허리가 덜 아플 텐데―.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떤 때는 딸이 하도록 저녁 먹은 설거지를 그대로 두어보지만 이튿날 아침이 되면 그것은 엄마 차지이다.
박 노파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 씩이라도 딸과 함께 목욕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내가 씻겨주었지만 기력이 떨어지는 이 엄마를 좀 씻겨주면 좋을 텐데’. 딸이 엄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간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함께 목욕탕에 가서 내 등을 좀 밀어주면 어떨까?”
언젠가 노파는 조심스레 딸에게 얘기를 꺼냈다.
“엄마도 참, 용돈 아끼지 말고 때밀이에게 맡기면 나보다도 훨씬 더 잘 해줄 텐데 무슨 걱정이야!”
딸은 매월 수고비조로 주는 돈 아끼지 말고 목욕비로 쓰라며 엄마를 나무랐다.
처음 딸네 집으로 왔을 때 딸이 챙겨주는 수고비 30만원은 참 보람이 있었다. 노파는 이때껏 생활비를 남편에게 어렵게 타 썼는데 딸이 주는 돈을 저금통장에 저축해가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손자들 생일이나 어린이날엔 선물을 사주기도 하고 친척 아이들이 찾아올 때는 한 푼씩 용돈으로 쥐여 주었다. 노인정에서도 기꺼이 추렴에 참여하고 어쩌다 큰맘 먹고 조촐한 대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인정에도 나가지 않으니 돈을 쓸 만한 곳도 없어졌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딸은 벌써 넉 달째 용돈을 주지 않고 있다. 이제는 저금을 하는 조그만 낙도 없어졌다. 마땅히 쓸 곳도 없으면서 돈을 내어놓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때로 너무 적적해 어린이 놀이터로 나가보았지만 대체로 젊은 아낙네들이 벤치에 앉아 아이들 교육문제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 노파들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작은 손자가 망원경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전에는 박 노파는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 이제는 망원경으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울고 웃는 표정만 살펴보아도 고적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오후시간에도 박 노파는 적막한 집안에서 망원경으로 땅집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가로수와 옹벽의 그림자가 땅집을 덮어 그곳은 마치 움푹 꺼진 웅덩이 같아 보였다.
2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온 김 노파가 S아파트 앞 도로공원 벤치에 앉아 이마의 땀을 닦는다. 아파트 부지를 할애 받아 조성된 도로공원은 느티나무, 벚나무와 함께 자연석에 영산홍·회양목을 둘러 쉼터로 꾸며놓았다. 김 노파는 오전 10시쯤 손수레를 끌고 집을 나와 온천시장 주변이나 몇 개의 가게를 돌며 폐지를 수집한다. 빈 손수레도 끌기 힘 드는 나이에 폐지를 싣고 나면 힘에 부친다. 맘씨 좋은 아저씨들이 손수레를 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하교하는 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손수레를 끌어주기도 한다. 벌써 점심때가 지나고 오후2시가 가까워질 무렵 김 노파는 도로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엊그제 처서가 지나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김 노파 이마엔 구슬땀이 연방 흘러내려 눈이 따갑고 온 몸은 흠뻑 젖어 있다. 김 노파에게 S아파트 앞은 참새 방앗간 같은 자리였다. 여기에서 식물원 앞 굽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400미터 쯤 더 가면 김 노파의 집이 있다.
김 노파가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젊은 시절부터였다. 김천에서 논밭도 없이 머슴으로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던 남편이 좀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사 온지 올해로 48년이 되었다. 이곳에 와서도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부지런히 일했다. 10년이 가까워서 개울물이 흘러내리는 금정산자락에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했다. 그러나 1남4녀 중 큰딸은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딸들도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생계를 도왔기 때문이다. 막내아들 하나만 누나들이 신발공장에 다니면서 벌은 돈으로 가까스로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이 술병으로 45세에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김 노파가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음식점 설거지로 일당을 벌고 퇴근할 때는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가져다 식구들의 끼니를 때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음식점의 허드렛일도 얻지 못해 폐지 줍기로 나선 것이 십년이 넘었다.
횡단보도에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자 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 한 대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가게 집 아줌마에게 빵 한 개를 얻어먹었던 김 노파는 이제야 시장기를 느끼고 주먹밥 꾸러미를 풀어 늦은 점심을 먹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일하지만 도시락을 쌀 수도 없고 매일 점심을 사먹을 형편도 되지 않았다. 폐지를 손수레에 가득 실어가도 고물상에서 받는 돈은 3천 원 정도이다. 2년 전에는 폐지 1kg에 150원까지 쳐줘서 5천원이나 6천원은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 종일 수집을 해도 3천원을 벌기 힘 든다. 폐지가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다. 비오는 날이나 일요일엔 쉴 수밖에 없다. 폐지를 모아주도록 약속을 한 가게도 늦게 가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가져가버린다. 예순이 넘으면서 김 노파는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여든이 넘어서는 매일 약을 먹고 이틀에 한번 씩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다. 의사가 주사를 계속 맞으면 몸에 해롭다고 말하지만 하루라도 움직이려면 주사를 맞아야 했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얘기를 나누며 횡단보도를 건너온 두 여인이 주먹밥을 먹고 있는 김 노파 옆 벤치에 앉았다. 하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형제 중 셋째인 내가 형편이 제일 나은 것 같아 조심스럽게 남편의 의중을 떠 보았지. 남편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어. 20여년전 방 두 칸짜리 신혼집에서 첫딸을 낳고 살 때였는데······.”
“노부모 모시는 일 때문에 형제끼리 다투는 것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더구나 거동이 불편한 장인을 사위가 받아들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할 텐데, 참으로 남편이 고마웠어!”
“아버지는 지금 누구 집에 계시는데?”
“돌아가신지 꼭 1년이 되었어.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고 나서 주말엔 목욕수발도 해드리며 극진히 모시던 남편이 6개월이 지나자 지치는 것 같더라고. 차츰 퇴근 시간도 늦어지고. 어느 날 자정이 가까워 술이 취해 들어온 남편이 내게 불만을 털어놓았어. 나는 나대로 화가 나서 울며 남편과 다투었지만 오히려 내가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어. 그다음 날 아침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퍼부었지. ‘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이 고생을 하느냐고.’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셨던지 한 달쯤 지나 아버지는 전에 사시던 시골집으로 도로 내려가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어. 이웃사람들에게 ‘아이들이 극구 말렸지만 내 집이 편해서 돌아왔다.’고 말하더라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117동에 사는 영수네 할머니 얘기 들었어?”
“약간 치매 끼가 있다던 노파 말이냐?”
“최근에는 아이들을 챙기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더니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고 하데.”
“그 할머니가 딸 살림 살아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쯧쯧.”
두 아낙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점심밥을 먹고 쉬고 나니 접힌 허리가 펴지고 힘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산 그림자가 제법 길어지고 등산객들이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길모퉁이 파출소 앞에 왔을 때였다.
“할머니―,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파출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 노파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노파는 소장과 함께 소파에 마주 앉았다. 노파는 파출소장이 낯설지 않다. 그는 바쁜 일이 없을 때는 언제나 노파에게 차를 대접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김 노파는 담배는 피우지 않아도 커피는 좋아했다. 어떤 이는 오후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노파는 커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체질이었다. TV를 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 때도 커피 한잔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장은 할머니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소장이 손수 타주는 커피는 제 맛이었다.
“우리 어머님도 살아계셨으면 할머니 연세쯤 되셨을 겁니다. 우리 집에 모시려고 했지만 살던 곳이 좋다면서 고향집을 지키다 돌아가셨어요.”
소장이 이야기를 꺼내자 책상위의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계속되는 통화내용이 무슨 교통사고처럼 보였다. 전화를 받고 있는 소장에게 김 노파는 꾸벅,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길에는 가로수 잎이 하나 둘 흩날리고 있었다.
3
딸 사위 손자들은 개천절 연휴를 맞아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박 노파는 김밥을 만들어주고 남은 끄트머리로 점심을 때웠다. 돈 주면 어디서든 맛있는 것을 사먹을 수 있지만 손자들은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김밥을 좋아했다. 박 노파는 손자의 망원경으로 땅집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좁은 골목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S 아파트 놀이터도 조용하다. 연휴가 되면 아파트 가족들은 대부분 함께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노파는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왔다. 화단엔 과꽃과 샐비어가 그림을 그린 듯 하고 넓은 분수대 옆으로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정원수는 붉은색으로 물들거나 낙엽으로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노파는 아파트 앞 도로공원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박 노파가 외출하는 유일한 곳이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치 소풍을 나온 것 같다. 오늘은 길에도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편에서 김 노파가 손수레를 끌고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너오고 있었다. 김 노파는 도로공원 한쪽에 손수레를 세워놓고 박 노파가 앉아 있는 벤치로 와서 앉았다. 비슷한 연륜에 말상대가 될까 해서이다.
“어서 오세요.”
박 노파가 먼저 인사를 하며 김 노파를 맞았다.
“이 아파트에 사시는 갑지요?”
인사를 받으며 김 노파가 말을 건넸다.
두 노파는 도로공원에서 처음 만났다.
“예, 할머니는 어디 사시는데요.”
박 노파가 거처를 물었다.
“저 산마을로 올라가는 길 쪽에 삽니다. 옛날엔 살기 좋은 곳이었는데―.”
김 노파는 한숨을 크게 쉬며 산 쪽을 가리켰다.
“자녀들은 없습니까?”
박 노파는 김 노파의 초라한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다.
“왜 없어요. 딸 넷에 아들 하나입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공부를 못시켰더니 저들도 사는 것이 늘 어려워요. 딸들은 울산으로, 진주로 흩어져 있고 막내딸은 부산에, 막내아들은 김해에 살고 있습니다.”
“아들집이 가까워서 좋겠습니다.”
“자기들 살기가 바빠서 그런지 서울보다 더 멀어요.”
김 노파가 자식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우리 집 딸네식구들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박 노파도 같은 마음을 내비쳤다.
“아들보다 딸하고 사니까 좋지요? 잘 사는 집 자녀들을 보면 아이들 공부를 못시킨 것이 늘 미안하고 한이 됩니다.”
“딸과 함께 살지만 좋을 것도 없어요. 저들은 오늘 설악산으로 갔는데 나는 혼자 집지킴이입니다. 평소에도 손자들은 태권도장과 학원에 다니기 바빠 얘기할 틈도 없어요.”
“노인들이 늙으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던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내 것 가지고 아이들 도와주고, 먹여주고, 입혀줄 때가 좋지요. 제 앞가림하면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른들은 차츰 자식들의 짐이 되지요.”
“어른이 어른 노릇 제대로 할 때가 있었지요. 장 담그기, 김장하기, 바느질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친정 엄마나 시어머니가 가르쳐 주었잖아요. 이제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이것저것 배워야 하니 영이 서지 않아요.”
“맞아요. 요즘은 책에 다 나와 있고 인터넷에 물어보면 무엇이나 가르쳐 준다고 하니 어른들은 뒷집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요. 시어머니 시대는 옛날 얘기지요. 이젠 부모들이 며느리 시집, 딸 시집을 산다고 하잖아요.”
김 노파는 땀이 식자 등이 서늘했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김 노파는 손수레를 끌고 집으로 가려고 일어섰다.
“초면에―, 할머니 집에 놀러가도 될까요?”
박 노파는 혼자 아파트로 들어가 자욱한 적막 속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만 사는 것이 너무 누추해서―.”
박 노파는 김 노파의 손수레를 밀며 뒤따랐다.
“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은 몇 가게가 문을 닫아서 폐지를 많이 모으지 못했습니다.”
김 노파가 돌아보며 말했다.
두 노파는 손수레를 끌고 밀면서 경사진 길을 오르고 있다.
길모퉁이까지 왔을 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쉬었다가세요. 좋아하는 커피도 한잔 하시고―.”
여느 때처럼 파출소장이 환하게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소장님, 늘 고맙습니다.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그냥 가겠습니다.”
김 노파는 사양하며 박 노파를 돌아보았다.
“수고 하십니다. 저는 이 S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박 노파도 파출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식물원 앞 삼거리 오른쪽으로 굽이를 돌아가자 산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뻗어있었다. 박 노파는 지척에 살면서도 처음 와보는 길이었다. 몽마르트르 찻집을 지나 인도 옆으로 콘크리트 난간이 세워진 곳까지 왔다.
“이 아래 우리 집이 있습니다. 들어가 차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
손수레에서 폐지를 내리며 김 노파가 말했다.
박 노파는 인도 옆에 설치된 난간을 짚고 서서 아래쪽 할머니 집을 내려다보았다. 도로옹벽은 3층집 높이는 되는 것 같았다. 몇 걸음 앞쪽 난간이 없는 곳에 45도정도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땅집 동네 사람들이 출입하는 통로였다. 박 노파는 어떻게 이 폐지묶음을 아래로 운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 노파는 난간 위에서 두레박을 끌어올리듯 드리워진 밧줄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폐지묶음을 하나씩 밧줄에 달아 천천히 내렸다. 박 노파는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폐지묶음을 풀어주었다. 빈 박스는 아래로 던졌다. 김 노파집 지붕은 푸른 우레탄으로 칠해져 있었다. 두 노파는 길게 달아낸 처마 밑에 폐지를 차곡차곡 쌓았다. 판자바닥 아래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김 노파는 오른쪽으로 돌아 좁다란 시멘트 다리를 건너 집 앞에 놓인 네모난 반석에 큰 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박 노파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낡은 땅집들 주위로 저만치 높다란 아파트가 빼곡히 둘러있다. 맞은편의 가장 높은 타워형 아파트가 박 노파가 사는 집이다. 박 노파가 가슴이 답답하면 한차례씩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던 곳이 여기 땅집 동네란 것을 비로소 알았다. S아파트 꼭대기는 현기증이 날만큼 까마아득하다.
“들어오세요. 사는 게 이렇습니다.”
김 노파가 판자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땅을 밟고 사는 것이 좋지요. 개울물 소리도 즐겁습니다!”
박 노파는 폐가 같은 그 집이 싫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문종이가 찢어지고 반쯤 방문이 열려있는 오른쪽 작은방은 지저분한 헛간처럼 보였다. 마루도 없는 축담에 신발을 벗고 김 노파가 거처하는 어둑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에는 침대용 낡은 매트 위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형광등을 켜고 두 노파는 매트위에 마주 앉았다. 박 노파는 매트 아래로 손을 넣어보았다. 방바닥은 싸느랗게 냉골이었다. 김 노파가 전기주전자 코드를 꽂았다. 싱크대 옆으로 냉장고가 놓여있고 방바닥에는 전기밥솥과 가스버너와 냄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방은 너저분했다. 김 노파는 물어보지도 않고 커피를 타서 내놓았다.
“난 일 나가면 하루에 커피를 열 잔은 얻어 마십니다. 어떤 이는 많이 먹으면 해롭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 탈이 없어요. 처음에는 빨리 죽으려는 생각으로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를 마시며 김 노파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박 노파가 나이를 물었다.
“말띠입니다. 나이가 많지요. 죽을 때가 되었는데―.”
“나도 말띠입니다.”
“내 나이와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젊어보이나요?”
“할머니는 우리 나이로 몇 살인데요?”
“올해 여든 여섯입니다.”
“아이고, 나하고는 띠 동갑이네요. 나는 일흔 넷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새댁 같습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정정하십니까?”
“죽지 못해 삽니다. 용돈 한 푼 부쳐주는 자식도 없으니 쓰러질 때까지 움직여야지요. 몇 푼씩 벌면 병원에 다 갖다 줍니다.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주사 힘으로 삽니다.”
“그런데도 손수레를 끌고―.”
“손수레를 끌면 오히려 걷기가 수월했는데 이젠 힘들어요. 막내딸이 걷는 기계(보행보조기)를 사준다더니 말만하고 소식이 없네요.”
김 노파는 동대신동에 사는 막내딸은 그래도 잘사는 편인데 엄마에게 잔정이 없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업(業)인 것 같아요.”
“나야 자식들에게 해준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만―.”
“공부를 많이 시켜도 별 수 없어요. 내리사랑이란 말 그대로지요.”
“자식들은 지 새끼 생각하느라 부모는 항상 뒷전입니다.”
“부모 걱정 안 시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지요. 이웃에 친구들이 있습니까?”
박 노파가 물었다.
“친구라니요. 거의가 빈집입니다. 처음 왔을 땐 참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는데, 산마을로 오르는 길을 확장하면서 옹벽을 쌓는 바람에 이 지역은 웅덩이처럼 푹 꺼지게 되었습니다.”
김 노파의 방은 반 지하보다도 더 어두웠다. 다른 집들은 재개발에 포함 되었지만 적은 보상비를 거부한 십여 세대는 끝내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차츰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몇 집은 살던 집을 버려두고 피난 가듯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상당한 보상비를 받은 사람들도 삶의 터전만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언젠가 하도 밥맛이 없어 아파트 앞 길 건너편 시락국밥집을 찾아 갔을 때였다. 길가 옛날 집을 개조해 만들어진 조그만 음식점이었다. 재개발을 하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 집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말았어요. 살던 집은 빼앗기고 보상비로는 집 한 칸 사지도 못하고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박 노파는 시락국밥집 아줌마의 말이 생각났다. 사위는 조합원이었던 그 가난한 사람들의 집 매매를 중개하면서 벌은 돈으로 아파트를 두 채나 더 소유하고 값비싼 전세를 놓고 있다. 좋은 집에 살고 있는 박 노파는 마음이 오히려 불편했다.
“모처럼 오셨는데 산초장아찌나 좀 드릴까?”
“두었다 할머니 잡수세요.”
“혼자이니 먹을 입이 없잖아요. 참 맛이 좋습니다.”
김 노파가 싱크대 앞에서 산초장아찌를 플라스틱 통에 담아 비닐주머니를 찾고 있었다. 박 노파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용돈 3만원을 꺼내 몰래 김 노파 베개 밑에 집어넣었다. 정을 베푸는 김 노파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오랜만에 용돈을 써보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박 노파는 장아찌 꾸러미를 받아들고 일어섰다. 둥그런 벽시계가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4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산마을로 오르는 길엔 벚꽃이 활짝 피었다. 지난 가을 두 노파는 몇 차례 도로공원에서 만났고, 박 노파가 두어 번 김 노파 집에 놀러간 적도 있었다. 박 노파는 망원경으로 김 노파의 푸른 우레탄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김 노파 집 뒤편은 연분홍 벚꽃으로 둘러있다. 얼핏 꽃동네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만 벚꽃이 만발하니 땅집 동네는 더욱 우중충해 보이고 메마른 쓰레기장 같았다. 딸 사위도 출근을 하고 손자들도 학교에 갔다. 집안은 적막하다. TV를 켜도 언제부터인가 줄거리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연속극도 차츰 재미가 없어졌다. 가슴이 답답하면 박 노파는 아파트 너머로 멀리보이는 산꼭대기를 우러르기도 하며 시골 마을을 생각한다. 고향마을 동구로 접어드는 길은 이맘때면 벚꽃터널을 이룬다. 뒷동산에 오르면 진달래 개나리가 그림같이 피어있고 달래 냉이 쑥을 캐며 봄맞이 하던 때가 눈에 선하다.
‘김 노파는 잘 있을까?’
날씨가 추워지고 부터는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가기도 힘들고 번거로워 박 노파는 집안에만 박혀있었다. 엊그제는 마당에 내려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31층 번호를 누르지 않아 45층 꼭대기까지 실려올라간 적도 있었다. 한번은 열쇄카드를 잊고 나가 비밀번호가 헷갈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파트 현관 번호와 집 번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올해 중학생이 된 작은손자가 비밀번호를 큰 글씨로 적어 냉장고에다 붙여놓았다. 아침이 되면 식구들의 밥을 챙겨주는 것이 즐거운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일들이 귀찮아지고 제대로 치다꺼리를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때는 반찬에 간을 맞추는 것을 잊어버려 딸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러다 딸네 집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지기도 했다. 딸은 엄마가 오르내리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듣고 필요로 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퇴근길에 아파트마트에서 직접 사다주었다.
날씨가 따듯해지자 박 노파는 겨우내 만나지 못했던 김 노파가 보고 싶어 졌다. 도로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다가 박 노파는 김 노파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활짝 핀 벚꽃이 산들바람에도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다. 차도는 벚꽃 터널을 이루었고 보도블록 위에는 떨어진 꽃잎이 수를 놓았다. 도로변 몽마르트르 찻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벚나무에서 새들이 흡사 병아리 소리처럼 울고 있었다. 김 노파가 폐지 묶음을 달아 내리던 곳까지 왔다. 난간을 짚고 서서 김 노파 집을 내려다보았다. 계단과 지붕에는 벚꽃 잎이 잔설처럼 쌓여있다. 처마아래 가득 쌓여있던 폐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노인네가 겨울은 잘 지냈을까?’
박 노파는 천천히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좁다란 시멘트 다리를 건너 김 노파 집 앞에 섰다. 판자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주위는 개울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린다. 땅집의 고요는 아파트의 적막과는 달랐다. 판자문 옆에는 다음과 같은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상수도 검침 차 귀댁을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므로 검침이 불가하여 알려드리오니 월 일까지 지침 확인 후 연락 바라며, 연락이 없을 경우 전월과 같이 사용량이 인정 부과됨을 알려드립니다. 20 년 2월 8일. 담당자 : 정재문 H.P. 010-××××-3296. 부산광역시 상수도 사업본부 ××사업소.」
판자문 왼쪽 우편함에는 누렇게 빛바랜 고지서 쪽지가 여러 장 축 늘어져 꽂혀있다. 바로 옆집은 오래전에 폐가가 되었고, 개울 주변의 판잣집들을 들여다보니 가축우리와 흡사하다. 그 뒤쪽 약간 높은 자리에 있는 슬래브 집 담장너머에는 종려나무 한그루가 높이 서있고 감나무 가지에는 손톱만한 새잎들이 뾰족이 나와 있다. 대문은 닫혀있지만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박 노파는 녹슨 철대문을 흔들며 주인을 불러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한 중년여인이 문을 열고 대답했다.
“저 앞집 할머니는 어디 갔습니까?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박 노파는 김 노파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지난 12월 중순쯤 폐지 수집을 나갔다가 길에 쓰러져서 자녀들이 어머니를 어느 요양병원으로 모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혹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쓰러진 것도 파출소장이 자녀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아마 파출소에 물어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여인은 수척한 얼굴에 건강이 좋지 않아보였다.
박 노파는 다시 김 할머니 집 앞으로 돌아왔다. 벚꽃 잎이 떠내려가는 개울가에는 노란 민들레와 잉크 색 난초 꽃이 피어있고, 커다란 팔손이도 한그루 서있다. 어른 키만한 메마른 나무에는 가지마다 팥알처럼 송송히 움이 트고 있었다. 잎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니 산초나무였다. 지난 가을 김 노파가 챙겨준 산초장아찌는 식구들의 입맛을 돋우는 별미였다. 박 노파는 네모난 반석에 앉아 고개를 들어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적막들을 한데 묶어 세워놓은 커다란 기둥이었다. 박 노파는 벚꽃 길이 열리는 고향마을의 동구를 생각하며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속에 김 노파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박 노파는 파출소로 가보았다. 파출소장은 낯선 얼굴이었다. 그는 전임자에게 연락을 하여 김 노파가 산마을에 새로 생긴 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산마을로 오르는 길을 계속 따라가면 마을입구 못가서 ‘청노루 요양병원’이 있다며 친절한 안내도 해주었다. 박 노파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 쥐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파출소를 나왔다. 노파는 소장이 가르쳐주는 대로 산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기보다는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 박 노파도 그 곳에서 김 노파와 함께 살고 싶었다. 박 노파는 김 노파가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승용차들이 지나갔다. 요양병원으로 오르는 벚꽃 길은 흡사 박 노파의 고향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같았다. 박 노파는 숨찬 발걸음으로 그의 고향마을을 찾아가고 있다. 올봄엔 흙을 주무르며 씨앗을 뿌려 텃밭을 가꾸고 싶었다. ‘가슴에 쌓인 얘기를 친구들에게 모두 다 털어놓아야지!’ 바람이 일자 벚꽃 잎이 노파의 머리위로 눈꽃처럼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