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⑵
세겹 쇠상자
다섯 남매낳고 부인 저세상 떠나
새장가 안가고 보부상 발품팔아
자식 키워놨더니 아무도 안 찾아와
서럽게 울던 변 노인,
세겹으로 된 쇠상자를 만들어 자물쇠
채워 이불로 덮어놨더니…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골짝, 다 쓰러져가는
외딴 초가 삼간에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삼년째 이엉을 못 갈아 덮어 검게 썩은 지붕에서
빗물이 새 안방은 물바다가 되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어 빠진 짠지 하나에 나물죽을
먹던 변 노인이 절름거리는 다리로 뒤꼍에 가더니
깨어 진 옹기를 들고 와 새는 빗물을 받았다.
변 노인은 하염없이 낙수를 보다가
제 신세가 서러워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소쩍, 소쩍-.
딸 하나 아들 넷, 다섯 남매를 낳고
부인이 이승을 하직하자 변 서방은
핏덩어리 막내아들을 안고 심 봉사처럼
이집저집 젖동냥을 다니며 온 정성을
다해 자식들을 키웠다.
매파가 들락날락했지만 자식들이
계모에게 구박을 받을세라 새장가도
가지 않았다.
막내가 젖을 뗐을 때 변 서방은 자식도 없이
홀몸이 된 누님을 집에 데려다 놓고
자신은 보부상이 되었다.
바리바리 등짐을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천리 길도 마다 않고 걷고 또 걸어
멀쩡한 짚신이 하루를 못 견뎠다.
다른 보부상들이 주막에서 술판 노름판을 벌여도
변 서방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아이들 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서너달 만에 집에 올 때면 모은 돈을
몽땅 누님에게 맡기며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키우라 신신당부했다.
오남매는 부잣집 아이 못지않게 좋은
옷 입고 서당에도 다녔다.
어미 정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라
일찍 시집장가를 보냈다.
몇뙈기 논밭 모두 팔아 살림 차려 주고
빚을 얻어 혼수를 장만했다.
혼인 시키느라 진 빚은 보부상 발품을
팔아 갚아 나갔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허리는 굽었고
관절은 마디마디 시큰거려 더 이상 보부상을 못하고
초가삼간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살던 누님이 이승을 하직하자
변 서방은 청승맞은 늙은 외톨이가 되었다.
변 서방은 손수 나물죽을 끓이고 빨래하고
외롭게 혼자 사는 것은 이골이 났지만
그의 가슴속을 꽉 채운 슬픔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자식들이 자신을 모시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변 서방은 젊어서부터
입이 무거웠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입을 닫았다.
어느 날, 아랫동네 대장간에서 이상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쇠상자 속에 작은 쇠 상자,
그 속에 더 작은 쇠상자를 넣고 상자마다 튼튼한
자물쇠를 채웠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수군거리는데 대장간 주인도
주문한 사람이 변 서방이라는 것 밖에는 용도를 몰랐다.
장정 넷이 목도를 해서 쇠상자를 변 서방 초가삼간
안방으로 옮겨 놓자 변 서방은 이불을 덮었다.
하나둘 자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단 마고자를 지어 오는 며느리,
쇠고기 산적을 해 오는 며느리,
보약을 지어 오는 아들 녀석….
삼십리 밖 딸년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떡 한고리에 꿀단지를 들고 왔다.
자식들이 서로 제 집으로 모시겠다고해
변 서방 사지가 찢어질 판이 되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년을 호강하다가 변 서방은 죽었다.
삼우제도 지내기 전에 자식들은 온
집안을 뒤져 다락 구석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 쇠상자를 열고 열고
또 열었다.
맨 마지막 상자를 열자 자식들이 어릴 때 차던
기저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