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淨心行善分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차 수보리 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사먁삼보리
須菩提 所言善法者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 소언선법자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
-淨心行善分 제 23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가 설하되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제 이십삼 정심행선분 (第二十三 淨心行善分)
"정심행선"이란?
선을 행함으로서 얻어진다 는 의미이다.
"선법"이란 악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집중"의 의미이다.
"마음집중"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는 의미 이다.
부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수 많은 자기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높고 낮은 등수에 따라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 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차별심이
모든세상의 괴로움을 몰고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 갔다.
신과 인간. 동식물.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은
본래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이런 차별의 원인은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는 "아상"에 있다.
상대가 행복해져야 나를 높이고
자랑도 할수있는데 나만 잘났다고
나를 높이면 상대가 불행해진다.
상대가 불행해지면 사회가 불행해지고
고통이 오는 연기법을 위반하는것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일체만유"
대평등의 깨달음은 "사상"의 소멸이며
선법 즉 "마음집중"수행을 닦으라는 것이다
"상"의 타파는 마음집중 수행을 통해서
없어질 수 있다.
위빠사나. 관수행.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 수행을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법. 간화선 수행법. 염불. 진언
독경. 절수행.등 그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하다고
다투는 것도 높고 낮은 차별심의 "아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떤 수행법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이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인 것이다.
"본래면목"은 닦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닦지 않으면 "범부"에 떨어진다.
현상은 닦을 것이 있고
몸뚱이와 마음은 존재한다.
한번 목욕을 했다고 1년을 씻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이 지저분 해진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서원"을 세우고 실천 노력을 해야한다.
노력도 하지않고 시험 학격이나
잘살게 해달라는것은 "거지" 노릇이다.
구걸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거지 종이되고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면 부자 주인이된다.
매일 부처님께 구걸한다면 어느덧
거지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된다.
불교의 인과법은
콩심은데 콩난다는 것이다.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삶을
속인은 속인으로서의 삶을 잘 사는것이
잘사는 것이다.
속인이 산중생활을 부러워한다면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잘 사는 방법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의 삶이다.
공부할 땐 공부만 하고. 수행할 땐 수행.
잠잘때는 잠 잘뿐. 죽을 땐 죽을뿐
현재 위치에서 주인이되어 충실히 사는것이
최상이라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