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의 詩
종심(從心)의 나이
참 멀리 왔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나보다 더 멀리서 온 현자(賢者)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어떤 이는 말을 타고 가고
어떤 이는 낙타를 타고 가나
그 어느 것도 내 길이 아니라서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 새삼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느니
왔던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가야 할 길 가뭇하여 아슴하나
내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할 수 있으리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길섶
해와 달, 낡은 발끝에 치일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노라고
—시집『가벼운 빗방울』(2015)에서
영혼의 눈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가벼운 빗방울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만 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괭이밥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을 기어보았느냐
그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이 후미진 땅이 하늘이라면
한 목숨 바쳐 함께 길 수 있겠느냐
기다가 기다가
결국 온몸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키 작은 꽃 하나
등불처럼 매단다면 곧이듣겠느냐 *
* 허형만시집[눈 먼 사랑]-시와사람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무심(無心)에 관하여
무심하다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뜬금없이 사십 년간 소식을 몰랐던 대학 동창이
자기도 무심했지만 절더러 더 무심하다 했습니다
닫혀진 인연이 다시 열린다는 건 분명 전율입니다
지금 열려 있는 인연들도 언젠가는 모두 닫혀질 터이지만
세상에, 사십 년 전 그 친구
육십의 고개를 넘어와 어느 풀밭에서 쉬다가
어쩌자고 문득 제 생각이 났을까요
어쩌다가 사십 년 간 쳐둔 마음의 빗장이 열렸을까요
그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고독해진다는 것이리라
고독해진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리라
날은 흐리고 왠지 서글퍼졌습니다
잊혀졌던 시간들이 일제히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그 처마 풍경엔 물고기가 없다
청도 산속 가부좌로 들어앉은 운흥사
처마 풍경엔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스님도 물고기를 따라갔는지 보이지 않고
허물어진 돌담 옆에서 흰 강아지 한 마리
엷은 겨울 햇살에 조을고 있다
법고 소리도 죽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 뒤 은수원사시나무 가지에
은빛 비늘 몇 개 걸리어 번득인다
아마도 그리움보다 깊은
적멸의 바다로 떠난 모양이다 *
순천만에서
내가 그 곳에 다다랐을 때 순천만은 도요새들을 모아놓고 출석 점검을 하고 있었다
민물도요 청다리도요 깝작도요 삑삑도요 붉은어깨도요 개꿩 뒷부리도요 꼬까도요
그 중 내 한 뼘보다 작은 밀물도요
한 마리가 깐작깐작 맨발로 갯벌에 들었다가 옴지락달싹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저만치 갈기슭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무들이 포롱포롱 다가가 그 도요새를 에워싸고
우우우 격렬한 날갯짓으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순간, 해닥사그리한 석양 빛살이 그들의 하얀 뱃살에 부딪쳐 꽃잎처럼 갯벌 위로 풀풀풀 흩날렸다
가슴이 들렁글렁해지는지 순천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석양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불그족족했다 *
송광사의 아침
아침이라고는 하나
산문을 채 빠져나가지 못한 안개가
층층나무 무량층에 걸터앉아
조계산 등성이를 마악 건너온
넋새 한 마리 밤이슬 젖은 머리
쓰다듬어주고 있다 그려 그려
고생했네 고생했네
삭신도 내려놓으면 홀연
이 아침처럼 화엄이 보일 터
노스님 예불 소리에
처머 끝 풍경이 운다, 울어
깨끗해지는 한 생애여
무성한 시간의 수풀 사이로
나도 돌아갈 길이 보이는 듯 *
화개동천에서
우리가 그곳에 다다른 날은 화엄벚꽃
이미 시간의 물길에 녹아
십리화개를 후르르 떠난 뒤였다
그래도 아직 무슨 미련 남아
미처 떠나지 못한 꽃잎 몇은
하동포구까지 내려와 다압쪽 나룻배가 건너오길
초초히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
가 말했는가 가야할 시간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그러나 정작 떠나보낼 수 없는 내 사랑
애절한 그리움도 있느니
눈물보다 더 무거운 내 사랑 쓸쓸한 저녁도 있느니
하안거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언제라도 목숨 건 사랑 한번 있었던가.
저 미치게 푸르던 하늘도 눈에 묻고
살결 고운 강물도 귓속에 닫은 채
시간의 토굴 속에 가부좌 튼다.
내 살아온 긴 그림자 우련하거니,
누구를 만났던 기억은 더욱 가뭇하거니,
아직도 무슨 미련 그리도 짙어
설풋설풋 서러워지느냐, 울고 싶어지느냐.
알고 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깊은 우물과 같은 것,
평생을 누추한 내 안에서
우물을 파며 살아온 햇살이며 별들까지
목구멍에 손가락 쑤셔 넣어 토해 놓고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저녁은
어떤 이는 돈에 목말라 하고
어떤 이는 사랑에 목말라 하고
어떤 이는 권력에 목말라 하고
그렇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처럼 저녁은 시원한 바람을 강물처럼 풀어 놓는다
지금처럼 저녁은 목말라 하는 자들을 잠 재운다
어찌 어찌 숨어 있는 야생화처럼
영혼이 맑은 삶들만 깨어 있어
갈매빛 밤하늘 별을무슨 상처처럼 어루만지고 있다 *
허형만 시인 약력
1945년 전남 순천시 조례동 출생
순천고등학교 졸업(고 14회)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성신여대 대학원 문학박사
국립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교육대학원장,
인문과학연구원장 역임
현 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무등포럼 공동대표
목포 현대시 연구소장.우리문학기림회장.
계간<시와 사람>편집고문
영국 IBC인명 사전에<세계의 시인>으로 등재 (2002년)
영국 IBC인명 사전에 <세계 100대 교육가>로 선정 (2005년)
시집
<첫차> <영혼의 눈> <비 잠시 그친 뒤>등 11권
수상
제34회 전라남도 문학상(문학),제1회 월간문학동리상
제2회 순천문학상,광주예술문화 대상등 10회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