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나라를 빼앗겼다는 아픔은
일본의 조직적인 경제적 수탈에서 더욱 고통이 가해집니다.
조선인들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였던 일본의 경제적 수탈사,
오늘의 두 번째 역사현장인 군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군산항에서>
리포터 (인사나누고) 여기가 군산항이군요. 본래는 아주 작은 포구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쌀 수출
항으로성장하게되었나요?
전문가 군산항은 보시다시피 금강과 서해안이 만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바처럼 작은 포구는
아닙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 좋은 창고로써 국가의 세곡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중부지역의
거점항으로서 군산항을 생각하게 됐고 개항을 1899년에 하게 됩니다. 그 군산항 일대가 각국 조계지역으로 묶이고 그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축항공사를 통해서 지금 현재와 같은 모습의 항구로 만들어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포터 항구의 다른 곳들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군산항 뜬다리에서>
개항 이전부터 조운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항.
그런데 이 군산항이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이후
전혀 다른 의미로 중요한 장소가 되어버립니다.
<군산항>
리포터 선생님. 일제 문화통치 시기에 이곳에서의 쌀 수출이 산미증식계획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의 목
적은 무엇이었고,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요?
전문가 산미증식계획의 목적은 아주 단순합니다. 저가의 쌀을 얻고자 한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산품들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조금 가격이 싸야 하거든요. 가격이 싸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아야하고 저임금을 받게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먹는 쌀이 싸야합니다. 그래야 당시 일본의 국가산업경쟁력이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일본 국내에서 쌀을 싼 가격으로 하려고 하니 1910년대 산업화로 지방에 있는 농민들이 많이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식량생산이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식량생산의 대처지로 생각한 것이 바로 우리 한국땅이었죠. 1920년부터 1934년까지 2회에 걸친 산미증산계획을 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쌀 생산량은 굉장히 많이 증가합니다. 그러나 많이 증가한 것과 비례해서 여기에서 일본으로의 쌀수탈이 더욱 많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정작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많은 쌀을 생산하고도 굶주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봉착하게 된 것이죠
리포터 자세한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보고싶습니다.
전문가 네. 군산세관으로 함께 가보시죠.
<옛 군산세관>
보다 자세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군산항을 뒤로 하고 옛 군산세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1908년 설립되어 1993년까지
85년간 실질적으로 사용됐던 건물.
지금은 역사가 남긴 귀중한 흔적으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는 의미 깊은 장소입니다.
전시된 내용물 하나하나 흑백사진 한장 한장을 통해
말로만 들었던 경제적 수탈이라는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과 직면하고서야
우리 선조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고통의 크기가 가늠됩니다.
<옛 군산세관과 세관감시소>
리포터 산미증식계획, 군산에서 해당되는 지역은 어디였는지 궁금합니다.
전문가 군산지역에도 많은 흔적이 남아있는데 가령 농지개량같은 경우는 퇴비증산이나 이런 형태로 이루어졌고요. 수리시설, 저
수지가 만들어지는 곳같은 경우에는 금강의 북안쪽과 만경강의 남한쪽 지역에다가 많은 저수지들이 만들어졌어요. 산미증식계획의 가장 대표적인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군산에서 있었던 불이농촌사업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요. 불이농촌사업은 가장 대표적인 간척사업입니다. 군산에는 금강이 있고 서해안 바닷가가 있는데 서해안 쪽 지역에 굉장히 넓은 갯벌지역이 있었어요. 여기를 간척했던 사업이죠. 불이흥업주식회사라고 하는데서 1920년에 사업을 시작해서 1930년에 사업을 끝냈거든요. 이곳에서... 전체적으로 총 2500헥타르 정도의 농지가 만들어지고... 특히 중앙에는 농사의 농지를 만들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어서 1922년에 대아리 저수지가 만들어집니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농수를 공급받아서 보관하는 옥구저수지라는 큰 저수지...300헥타르 정도의 저수지가 자리했죠. 그래서 당시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은 불이농촌사업장을 산미증식계획중에 큰 성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이 식민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모범사례라고 굉장히 많은 홍보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리포터 산미증식계획이 이 정도면 거기에 관련된 또 다른 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전문가 네 근처에 은행이 많았는데 은행들도 산미증식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행자리로 가보실까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군산시 장미동 23번지에 위치, 1923년에 신축. 제1차 세계대전 때 인질로 잡혀온 독일인의 설계와 중국인 석공들에 의해서 완성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조선은행 군산지점.
현재는 복원과정에 있어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당시 이곳에서는 일본 사업가들의 한국 진출과
쌀 수탈, 미곡 반출, 토지 강매 등 일제 수탈사가 이뤄졌는데요
이렇게 군산에 남겨진 현장을 찾을 때마다
마치 아직도 민족의 고통과 괴로움이 맺혀있는 듯해
걸음이 무거워만 집니다.
<군신항 제 3차 축항공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쌀가마를 탑처럼 쌓아놓은 모습>
쌀가마 중간에 '축 축항기공 역전정우회'라고 써있다
<제 3차 축항공사>
1926년~1922년 제 3차 축항공사중 군산세관 인근에 있던 수덕산의 토석을 채취하는 전경.
채취된 토석은 해안을 매립하여 내항의 화물하치장을 넓게 만들었다.
<창고에 쌓여있는 곡물>
제 3차 축항공사 기간에 제작된 내항의 창고 3동(면적 6,900㎡)에는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내항으로 철도선을 증설하여 하루 150량의 화차가 운행하게 되었다.
<불이농촌 현재 현장>
전문가 이곳이 아까 말씀드렸던 불이농촌의 현재 현장입니다. 불이농촌은 1920~1923년까지 산미증산계획의 시작점부터 있었던
사업인데요. 군산의 서쪽 끝자락, 산 능선이 보이네요. 저 능선의 바깥쪽으로 간척사업을 해가지고 아주 넓은 농지를 만들었는데요, 이 불이농촌사업은 어찌보면 결과적으로 산미증산사업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우리 조선인 3000여 명이 3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면서 간척사업을 했지요. 그리고 정작 농사는 짓더라도 농사 지은 땅의 소작료를 40~70%까지 일본인들에게 제출을 해야하다 보니까 쌀 소득량은 훨씬 늘어났죠. 하지만 조선인이 먹어야 하는 양은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총독부에서도 조선인 농부들을 위해서 동남아시아나 만주에서 쌀이나 콩깻묵을 가져와서 생존을 시키는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리포터 감사합니다.(인사나누고)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험난한 시절을 많이도 겪었습니다. 그 힘겨운 시절을 어찌 그리 잘도 버
텨왔는지요. 일제의 수탈과 위협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애썼던 선조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불이농촌 간척지>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하고 330호에 이르는 일본인 집단 농업이민
간척 후 좋은 농지는 일본인이 차지. 한국인들은 생계를 위해 일본인의 머슴을 자처하였다.
< 군산시청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김중규님>
씩씩하고 쾌활하고 친철하셨던.... 그래서 팀들이 즐겁고 편하게 취재할 수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