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인간학 (#087-096)
생명의 염원: 지상의 음식에서 영적 영양분까지
87. 믿는 이는 기도 중에 자기의 실존을 부양하는 재화들에 대해 주님을 찬양한다. 동시에 그는 생명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충만하게 채워 주는 영적 선물을 하느님께 청한다.
감사하는 찬양
시편집에서 기도의 첫째 가는 기본적 차원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지속적이며 보편적으로 음식을 주시는 창조주이며 섭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쁜 기억으로 되어 있다(사도 14,17 참조). 시편 104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은 하느님의 업적을 명상하면서 터져 나온다. 하느님은 기원의 이적을 실현하시면서 짐승들과 특히 인간을 부양하시기 위하여 식물들을 영원히 자라나게 하신다:
당신의 거처에서 산에 물을 대시니
당신께서 내신 열매로 땅이 배부릅니다.
가축들을 위하여 풀이 나게 하시고
사람들이 가꾸도록 나물을 돋게 하시어
땅에서 빵을,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고
기름으로 얼굴을 윤기나게 하십니다.
또 인간의 마음에 생기를 돋우는 빵을 주십니다(시편 104,13-15).
창세 2장에서처럼 창조주는 농경 활동으로 인해 찬양을 받는다(시편 65,10-11). 그리하여 기도자들은 "가축에게도, 우짖는 까마귀 새끼들에게도 먹이를 주시며"(시편 147,9) 당신 자녀들을 "기름진 밀로 배불리시는"(시편 147,14) 그분을 항구하게 찬미한다(시편 104,1.35).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육신에게 빵을 주시고"(시편 136,25) 굶주린 이들을 도와 주시며(시편 10171,15-6.9;146,7; 참조: 1사무 2,5),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을 풍성히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시편 132,15).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바치시는(마르 6,41; 루카 24,30)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델이 되신다.
영적 양식을 주시기를 탄원함
88. 시편집에는 빵을 얻기 위한 탄원은 많지 않다. 청원은 간접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시편 144,13).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열광적으로 인지하는 데에 포괄된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께 바랍니다,
제때에 먹이를 주시기를. 당신께서 그들에게 주시면 그들은 모아들이고 당신 손을 벌리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립니다(시편 104,27-28; 또한 시편 33,18-19; 145,16 참조).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양 떼을 열심히 돌보는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이 풍성한 풀이 있는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고(시편 23,2), 집 주인이 그러하듯이 손님들을 위하여 상을 차리시고 그들의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며 모두의 술잔을 가득 채워주신다(시편 23,5).
그러나 기도은 염원이다. 그리고 인간의 염원은 죽어야 할 육신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배부름과 충만한 생명에 대한 열망은 커지며 지혜 전통에 의지하면서 영적 선물을 향해, 하느님 자신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을 향해 탄원의 방향을 돌린다. 고통을 받는 사람, 빵 대신 눈물을 삼키는 사람(시편 42,4; 102,10)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3);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기쁨을 주는 것은 충만한 은총이지, 풍부한 곡식과 포도주가 아니다(시편 4,8; 63,4.6; 65,5).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도와 주실 것을 배제하지 않고, 반대로 영적 성격의 음식을 기대하도록 해 줄것이다: "아침에 당신의 자애(hesed)로 저희를 배불리소서.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 90,14).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도록 가르치시면서 "본질적인 것"에 대한 염원을 열어 주신다. 그리하여 신앙인 안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사는 아들의 조건이 실현된다.
예언자들은 나눔에 초대하며 종말론적 연회를 예고한다
89. 풍부한 예언 문학은 토라에서 제공된 사항들을 다시 받아들여 구체적인 이스라엘(과 세계) 역사에서 현실화시킨다. 예언 문학은 세속적인 지혜 전통들에서 제안하는 사항들도 받아들이지만,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단호한 하느님의 심판에 예속된 현상들로 받아들인다.
양식의 특수한 주제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가지 문학 양태를 구분할 수 있다. 한편으로 주님의 구원 행위들이 드러나는 성서 이야기(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 하권까지)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예언신탁들(이사야 예언서부터 말라키서까지)이 있다. 예언 신탁들에서 정의가 없는 호화로운 향연의 죄가 고발되며, 특히 예언 문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약속된 종말론적 연회의 기쁜 예고가 울려퍼진다.
예언 이야기
90. 모든 시작이 다 그러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있었던 일은 일찌기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탈출 19,5)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선물로 분명하게 표시되었다. 그분은 특별한 기쁨의 상징인 "붉은 포도로 빚은 술"(신명 32,14)이 생산되는 포도밭으로 특징지워진(민수 13,23-24; 여호 24,13) 모든 종류의 자원들로 풍부한 "좋은(tobah) 땅"의 주인이시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여호 5,11-12). 그리하여 그들은 만나를 먹는 간소한 생활을 마감하였다. 신명기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수고하지 않으며(신명 6,11; 여호 24,13) 공덕을 쌓지 않으면서도(신명 9,4-6) 새로운 에덴을 유산으로 받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너희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그곳은 물이 흐르는 시내와 샘이 있고, 골짜기와 산에서는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땅이다[창세 2,10-14 참조]. 또 밀과 보리와 포도주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그곳은 너희가 모자람 없이 양식을 먹을 수 있고,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이며[창세 2,9 참조], 돌이 곧 쇠이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창세 2,11ㄴ-12]. 너희는 배불리 먹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신명 8,7-10)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모세의 노래에서 말한 바와 같이 - 계약의 백성의 전체 역사를 예언적으로 한정하는 - 이스라엘은 "살이 찌고 몸이 불어나 기름기가 흐르더니 자기를 만드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구원의 바위이신 분을 업신여겼다"(신명 32,15; 참조: 예레 2,7; 5,7). 풍요로움과 배부름은 주님을 알고 주님께 충실하게 하는 대신 오히려 실제로 망각과 반역으로 이끌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잃어버리게 된다(신명 32,23-25).
91. 그러나 전체적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이런 일의 중심에 하느님이 존재하시며, 은밀하면서도 정확하고 본보기적으로 음식을 제공해 주심으로써 당신의 충실성을 드러내신다. 그것은 엘리야의 예언군에 본보기로 예시되어 있다. 우상 숭배로 인해 야기된 기근이 들었을 때, 오로지 주님께만 의존해야 한다고 열광적으로 주장하는 "하느님의 사람"(1열왕 17,18)은 기적적으로 부양되었다. 먼저 엘리야는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와서"(1열왕 17,6) 그것을 먹었다. 그 다음에 엘리야는 사렙타의 한 과부가 준비한 "빵 한 조각"을 먹었다(1열왕 17,7-16). 끝으로 광야로 도망가던 예언자는 천사가 가져온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을 먹었다(1열왕 19,5-8). 이 이야기들을 하느님의 선물의 계시로 이해하면,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교훈적 미담들로 그칠 수 없다. 여기서 하느님의 선물은 예언자에게뿐 아니라,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왜냐하면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마태 10,41)이기 때문이다. 집안 식구들을 다 먹일 수 있도록 기적적으로 많아진(1열왕 17,15; 또한 2열왕 4,42-44 참조), 과부가 가진 한 줌의 밀가루는 사실상 역사 안에서 세상의 기원때 창조주가 쏟아부은 축복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창조주는 기적적으로 많은 "결실들"을 생산하는 잠재력을 "씨앗"(식물과 동물)에 부여하였다(요한 12,24). 그러나 믿음이 있고, 하느님 자신의 모습인 순례자를 받아들일 때에만(창세 18,1-10; 마태 25,35 참조) 많아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예언 말씀
92.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언자들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죄를 고발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려 준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연관하여 생각할 때, 그 잘못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부유한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예속민들을 돌보지 않으며 생각 없이 연회를 열고 폭음을 일삼는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으뜸가는 나라의 귀족들!
그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의지하러 가는구나 [...].
너희가 재앙의 날은 밀어내려 하면서도
폭정은 끌어당기는구나.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제1장·127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아모 6,1.3-6).
93. 아모스의 이 생생한 풍자적 묘사는 다른 예언자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특히 포도주의 남용(이사 5,11-12.22; 28,1.7-8; 호세 4,11; 7,5)을 한탄한다. 그것은 거의 치명적으로 정의의 행위에 대한 무관심(이사 5,23; 참조: 잠언 31,4-5)과 모든 은사적 선물의 비하(아모 2,12; 미카 2,11)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판을 받는 것은 단순히 비난 받을 만큼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군중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실을 훨씬 더 비난한다(예레 5,28). 왜냐하면 권력자들을 부양하는 것은 사실상 동족의 살이기 때문이다(이사 56,11; 에제 22,27; 34,3.10; 즈카 11,5; 시편 14,4; 잠언 28,15):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안의 지도자들아, 들어라.
공정을 바로 아는 것이 너희 일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살갗을 벗겨 내고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
그들은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 살갗을 벗기며
그 뼈를 바순다.
내 백성을 냄비에 든 살코기처럼,
가마솥에 담긴 고기처럼 잘게 썬다(미카 3,1-3).
예언자들의 고발에는 밭이 소출을 내지 못하고(이사 5,10; 24,7-9; 호세 2,11; 아모 4,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이사 5,5-6)는 경고가 포함된다. 예언자들은 품위있는 절제를 통해서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과 나누는(이사 58,6-7; 에제 18,7.16)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이사 1,17) 삶의 변화를 촉구하려고 한다.
94. 예언자들이 보완적으로 요구하는 또 다른 사항은 무익하고(예레 2,8) 유해한 우상 숭배 - 왜냐하면 우상들은 주지 않고 "삼켜 버리기"(예레 3,24) 때문에 - 를 버리고, 유일하게 근본적인 재물을 주시는 주님을 향한 길을 걸어가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지혜 형식을 취하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1-3).
예언 전통의 정점을 이루는 결정적인 큰 약속들은 풍부하고 유익하며 항구하고 즐거운 선물 형태를 취하는 때가 많다(이사 1,19; 7,22; 30,23-25; 65,13; 요엘 2,23-26 등). 아모스는 "밭 가는 이가 거두는 이를 만나고"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리라"라고 약속하고, 호세아는 땅은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준다(호세 2,24; 14,8)고 말하면서 이를 증언한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라고 예고한다. 그것은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릴 수 있는 참 생명의 음식이다(이사 25,8). 예레미야는 포도밭의 복원(예레 31,5.12)과 계약의 백성을 위한 배부름(예레 31,14)을 예언하고, 에제키엘은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혜택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 물은 온갖 종류의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 열매는 항상 잘 익고 잎은 약이 되게 한다(에제 47,12; 또한 에제 36,29-30 참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에덴과 완전한 양식은 사실상 말씀의 파견(이사 55,1-3.10-11; 에제 3,1-3; 예레 15,16; 아모 8,11-12), 구원의 정의(이사 61,11; 즈카 8,17; 시편 85,11-13),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는(마태 5,6) 충만한 생명이며 주님의 현존 자체의 상징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선사하시는 빵
95. 복음서 저자들은 나자렛 예수님을 대 예언자로뿐 아니라(마태 21,11; 루카 7,16; 13,33; 24,19; 요한 4,19; 7,40; 9,17), 무엇보다도 모든 예언 말씀을 실현하시는 분으로 제시한다(마태 1,22; 4,14; 5,17; 8,17; 12,17; 26,56; 루카 4,21; 요한 1,45; 6,14; 12,38; 참조: 사도 3,18.21.24 등). 이는 양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승은 양식을 자주 당신의 가르침의 대상으로 삼으시면서 한편으로는 옛 성경을 증언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완성의 새로움을 예고하신다.
일용할 양식
예수님은 당신의 설교 초기부터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로서 당신 자녀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신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25-26).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루카 12,29-30). 애를 태우는 걱정은 신뢰 가득한 기도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은 신뢰를 갖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루카 11,2-3; 마태 6,9.11).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8-11).
96. 그러므로 불안하게 안절부절할 것이 아니라 청해야 한다. 주님은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도 역설적 지혜 조언으로 덧붙이신다. 사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린다"(마태 6,19). 왜냐하면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기"(루카 12,15) 때문이다. 지혜로운 선택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재산을 모으지 않고 "주님 곁에" 모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은 많은 소출을 거두고 수확한 것을 모아 두기 위하여 새로운 곳간들을 지을 계획을 세우지만 바로 그날 저녁에 죽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 를 이야기하신다(루카 12,16-21; 참조: 시편 39,7; 49,14-15; 시라 11,18-19).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란"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유복한 사람의 또 다른 비유(루카 16,19-31)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유일한 생명의 길인 "나눔"에 초대하려고 한다(루카 3,11 참조). 끝으로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이라고 지적하게 될 것이다(마태 25,34-35).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마태 10,42)임을 상기시키실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적 지혜의 형태에 따르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마저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초대하실 때(마르 10,17-22), 주라는 호소는 복음에서 그 범위가 가장 크게 확장된다.
충만한 생명의 길과 일치하는 완전함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의 행위로 내주는 데 있다. 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완전한 내줌의 성사적 상징은 먹을 빵과 마실 포도주의 봉헌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마태 26,26-28). 이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실 때 예시되었다(마태 14,13-21; 15,32-38). 이것은 굶주린 이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마태 15,32), 간접적으로는 그렇게 하라고 초대하는 표지이다(마태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