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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시인 소개
누가 살고 있기에
사랑노래
살아서 가는 법
여인 천하
초봄이 오다
그렇지요
맞상대
관심
관계
상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밥 먹자
지옥처럼 낯선
결구배추
꽃 피어있는 밤
달팽이 길
슬픈 사색
괴로운 수직
월색
오월에 대하여
오월생에게
질경이
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대물림
자연부락-두렁에서 술 마시고 놀고 일해서 힘세다
초봄
혀의 가족사
지 살자고 하는 짓
악수의 이면사
남북상징어사전
베드타운-매뉴얼
헌옷 도둑
누가 살고 있기에
사랑노래
슬픈 유산
그렇지요
염하(鹽河)에서
풍매화
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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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시인 소개
1954년 8월 22일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에 사미인곡(思美人曲), 허수아비의 꿈 등이 추천되어 등단.
저서 ;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 창작과비평사 | 1981 | ||
시집 <사월에서 오월로> | 창작과비평사 | 1984 | ||
시집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이들하고> | 실천문학사 | 1986 | ||
시집 <넋이야 넋이로다> | 창작사 | 1986 | ||
시집 <정> | 실천문학사 | 1987 | ||
시집 <어미와 참꽃> | 황토 | 1989 | ||
시집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 푸른숲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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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살고 있기에
새가 와서 잠시 무게를 부려보기도 하고
바람이 와서 오래 힘주어 흔들어보기도 한다
나무는 무슨 생각을 붙잡고 있는지 놓치는지
높은 가지 끝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잎이 다 시드는 동안 나무는
가슴을 수없이 잃고 찾고 했나보다
그의 둘레가 식었다가 따스해졌다가 반복하는데
내가 왜 이리도 떨릴까
아직 가까이하지 않은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하고
곁으로 빨리 오지 못하는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한
온기가 나를 감싼다
그의 속에는 누가 살고 있기에
외롭고 쓸쓸하고 한없이 높은 가지 끝에
잎사귀들 얼른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그의 생각을 끊어놓고 이어놓고 하는 걸까
나무가 숨가쁜 한 가슴을 꼬옥 꼭 품는지,
나도 덩달아 가슴이 달떠지는 것이어서
내 몸속에도 누가 살고 있기는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보는데도 나는
무슨 생각을 그리움처럼 놓쳤다가 붙잡았다가 하고
여전히 그는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
새가 부려두고 간 무게를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바람이 흔들어대던 힘을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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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노래
우리 만난 이 세상에 풀꽃 피고
네가 살아 있을 때
널 따라 나비 날거든 나도 살아가는 줄 알거라.
햇살에 부신 눈을 비비며
한세월 보이잖는 길을 더듬어
푸른 하늘 서러운 황토에 왔다.
우리 괴로운 이 세상에 먹구름 끼고
네가 눈물 흘릴 때
널 따라 비 오거든 나도 우는 줄 알거라.
햇살에 부신 눈을 비비며
한세월 보이잖는 길을 더듬어
푸른 하늘 서러운 황토에 왔다.
우리 괴로운 이 세상에 먹구름 끼고
네가 눈물 흘릴 때
널 따라 비 오거든 나도 우는 줄 알거라.
갈대 서걱거리는 허허벌판 바라보며
바람 부는 벼랑 끝에 장승으로 서 있지만
모진 마음은 더욱 응어리지는구나.
우리 헤어지는 이 세상에 천둥치고
네가 죽을 때
널 따라 벼락 떨어지거든 나도 죽는 줄 알거라.
인생 한 번 간 뒤에도 밤이 오듯이
사람 사랑하는 것은 운명 아니냐.
천지간에 어둠이 뒤덮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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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가는 법
밭가에 심긴 등나무는
가지를 뻗어도 휘감을 나무가 없어
서로 꼬며 꼬이며 휘어 오르다가 멎어서
사방으로 잔가지들 하늘거린다.
저 홀로 직선으로 허공을 오르지 못하자
등나무는 그 푸른 힘을 밑으로 내려 퍼뜨린다.
저 홀로 땅속에 곡선으로 휘어 뻗은 뿌리는
팔방으로 이리저리 퍼져나가다
불쑥불쑥 밭고랑에 새 가지를 돋아올린다.
새 가지는 새순 내어 사방팔방을 더듬어보다가
휘감을 나무가 없으면 구불구불 옆드린다.
누가 밭가에 등나무를 심었을까.
저 홀로 흙바닥에 직립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이 온몸도 기댈 데 없어 휘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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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천하
북한에서 탈출한 최귀림 씨와
베트남에서 시집온 메이 씨와
필리핀에서 취업 온 글로리아 씨와
연변에서 친척 방문했다 주저앉은 김화자 씨가
지방 소도시에서 만난 지 일 년이 지났다
네 여자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한동네 지하 봉제공장에서 봉제공이 되었으니
겉으로는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들 하면서도
속으로는 팔자 사나운 여자들로 여겼다
말이 공장이지, 네 여자가 전 직원인 봉제공장에서
야근도 같이하는 여주인도 빚 때문에
앞날이 보이지 않기는 피차 마찬가지,
남한과 북한이 사이좋지 못하면 경기 더 나빠져
주문량이 줄어들곤 해서 봉급 제때 주지도 못했다
최귀림 씨가 향수병에 시달리는 날이면
메이 씨가 입덧하는 날이면
글로리아 씨가 생일통 앓는 날이면
김화자 씨가 갱년기 장애로 힘겨워하는 날이면
여주인이 스트레스 받는 날이면
그런 날엔 그런 여자 혼자 쉬게 하고
다섯 사람 작업량을 네 여자가 나누어서 처리하고도
정시에 퇴근하였다
남북상징어사전 / 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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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이 오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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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 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이 땅에 남는 길은 삶과 죽음
그 둘 한꺼번에 있으니
살아 있으면 보겠지요. 그렇지요?
죽은 뒤에도 이 땅에 묻혀 있으면
봉분으로 서로 이 산 저 산 바라보겠지요. 그렇지요?
더군다나 살아가고 있으면야
가슴으로 이 사연 저 사연 나눌 날 오겠지요. 그렇지요?
가을이라서 기다려질 뿐,
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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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상대
옆집 미장이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앞집 페인트공은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뒷집 잡부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저마다 배낭을 꾸려서 외지 공사장에 가
열흘이나 보름씩 품 팔고 돌아오다가
내가 녹슨 철대문과 금간 벽돌담을 살피고 있으면
일부러 고개 돌리고 지나가버리지만
큰소리로 인사말을 건네면 겨우 눈인사로 받았다
그들은 나와 걸리지 않고 지내는 법을 알았다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도 밥술 먹는 나를
비오는 날이면 빗줄기나 헤아리는 나를
그들은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놔두는 마당의 풀을 비웃는 그들을
내가 손대지 못하는 낡은 집을 보며 혀 차는 그들을
나도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주택밀집도시의 주민이 되기 전에는
고샅길에서 흙 만지며 놀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을까
온갖 풀꽃 뜯어 회벽에 색칠하던 소년이 아니었을까
헛간에서 막일 거들던 청년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서로 걸리며 지내는 법을 잊어먹었다
내가 집수리를 도급주려는 눈치를 챈 뒤에야
옆집 미장이가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앞집 페인트공이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뒷집 잡부가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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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아프지도 않으면서 전화로 휴강시키고
우히히히, 베개를 끌어안고
뒹구는 사람
거짓말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
금방 거짓말이 될 비밀들이
가슴속에 가득한 사람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혼자가 되는 사람
휴대폰과 인터넷과 디스커버리 채널의
정글 너머에
어쩌다 출몰하는 사람
사람이 되란 말이 가장 무서운 사람
사람인 듯 사람인 듯한 사람
나는 이 사람이 이상하다
나는 요즘 오직 이 사람한테 관심이 있다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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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낮과 밤이 햡쳐지고 나뉘면서 빚어낸
일십백천만의 빛깔 중에서
단 두 가지 밝은 빛과 어두운 빛만 취했다
풀이나 꽃이나 나무가 갓 돋아나
시시때대로 지닐 빛깔은 가많히 놔두었다
이만하면 난 세상에 빛깔을 많이 남겨놓지 않았는가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집 지으려고 땅바닥에 기둥 박지 않았고
빈 손 내밀고 나가 거리를 차지하지 않았고
나물 훔쳐먹으려고 들판을 밟지 않았다
뭇 짐승이나 곤충이나 새가 갓 태어나
시시때대로 디딜 땅은 가만히 놔두었다
이만하면 난 세상에 땅을 많이 남겨놓지 않았는가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무언가 찾아올적에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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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처음에 님께서 제게 육신을 내놓으시자
밤은 어두웠고 저의 육신은 즐거웠습니다 .
다음에 님께서 제게서 육신을 거둬들이시자
밤은 밝았고 저의 육신은 괴로웠습니다.
아, 낮에 보니 님의 영혼은 깨끗한데
제 영혼은 병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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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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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자
밥 먹자
이 방에 대고 저 방에 대고
아내가 소리치니
바깥에 어스름이 내렸다
밥 먹자
어머니도 그랬다
밥 먹자, 모든 하루는 끝났지만
밥 먹자, 모든 하루가 시작되었다
밥상에 올릴 배추 무 고추 정구지
남새밭에서 온종이 앉은걸음으로 풀 매고 들어와서
마당에 대고 뒤란에 대고
저녁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닭들이 횃대로 올라가고
감나무가 그늘을 끌어들였고
아침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볕이 처마 아래도 들어오고
연기가 굴뚝을 떠났다
숟가락질하다가 이따금 곁눈질하면
아내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되어 있는 아내를
비로소 보게 되는 시간
아들 딸이 밥투정을 하고
내가 밥투정을 해도
아내를 말없이 매매 씹어먹으니
애늙은 남편이 어린 자식이 되고
어린 자식이 애늙은 남편이 되도록
집 안으로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불교문예 / 200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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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처럼 낯선
서른 줄 사내는 골목에서 이불을 주워 왔다
마흔 줄 사내는 폐차장에서 담요를 주워 왔다
오십 줄 사내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카펫을 주워 왔다
그리하여 세 사내는
밤마다 온몸에 말고
지하도에 누워서 잠들고
낮마다 접어서 옆구리에 들고
역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아무리 담배가 당겨도
한 사람에게서 한 개비만 얻어
아끼며 맛나게 피웠다
서른 줄 사내는 꼭 한 번 카펫을 덮고 싶어했다
마흔 줄 사내는 꼭 한 번 이불을 덮고 싶어했다
오십 줄 사내는 꼭 한 번 담요를 덮고 싶어했다
그러면 세 사내는
꿈에 먼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아랫목에 누워서
식구의 다리를 사타구니에 끼고
달게 잠자겠다고 말했지만
서로서로 바꾸어가며
한 번도 덮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날씨가 더워졌다
서른 줄 사내는 골목에다 이불을 갖다 놓았다
마흔 줄 사내는 폐차장에다 담요를 갖다 놓았다
오십 줄 사내는 쓰레기 하치장에다 카펫을 갖다 놓았다
지옥보다 낯선 / 랜덤하우스중앙, 2006,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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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구배추
다 자라난 배추에 견주어보면
나는 안이 너무 비어 있다
가장 거친 겉잎이 애초에는
가장 연한 속잎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젊은 날 오류를 알고도 부리던 성질을
나잇살 먹어도 삭히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다
배추벌레가 배추흰나비 될 때까지
얼마나 갉아먹힌지도 모르면서
배추는 자꾸 새로 고갱이를 돋아내며
묵은 잎사귀를 여러 겹으로 겹치며
둥글게 둥글게 속이 다졌는데,
나는 일기장에 참회의 문장을 남기지 못하고
빈 공책갈피 넘기듯 생을 넘기며
일찌감치 한 권의 표지를 뜯어버렸다
배추는 저렇게 결구(結球)를 마치고 나서도
아직 속에 만들지 못한 것이 있나보다
찬 비바람을 맞고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그 속에도 빛과 어둠이 있어서
낮이면 씨 맺을 꽃대를 준비하고
밤이면 멈추어서 조용하게 쉴까
잎사귀들로 닫혀버린 배추의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나는 모르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 안을
날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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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어있는 밤
꽃밭에 있는 나무들은 한철 꽃피우고
길에 있는 나무들은 사철 잎 푸릅니다.
님께서 외면하시면 나무들은
실뿌리 맞대고서 고통을 나누지만,
제가 쳐다볼 때면 나무들은
파르르 잎맥 떨며 비애를 주고받습니다.
제가 님을 강가로 모시거나
님께서 저를 들판으로 이끄신다면
나무들은 초록 잎 분홍 꽃 일시에 떨구고
더러운 허공 중에
마른 나뭇가지만 남기고 죽을 겁니다.
꽃밭에서는 벌레가 꽃송이 벙글게 하고
길에서는 먼지가 이파리 벌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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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길
봉선화가 세월보다 빨리 꽃잎을 떨어뜨린다.
내 느낌은 어디서 올까.
대낮에 둘러보면
길은 형체 있는 것들의 통로인데,
내가 갈 곳을 작정하기에는 막막한 주변이다.
나는 흙바닥 내려다보녀 발을 탁탁 턴다.
쥐똥나무 속에서 놀란 새가 포르르 하늘로 숨고
바람은 한 번도 불지 않는다.
세상이 이쯤에서 멎었으면 싶은데,
내 느낌을 이끌고 어디로 떠나줄 것은 없을까.
좋다 좋다 먼 길이 다가오고
싫다 싫다 가까운 길이 달아난다.
그걸 보면 저만큼에 움츠린 달팽이,
더듬이를 느릿 움직인다. 어떤 길을 택할까.
달팽이는 칼날 위에서도 베이지 않고 건넌다지?
갑자기 훤해지는 내 느낌 어쩌나, 나는 갈 곳이 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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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색
몇날며칠 물끄러미 보았다.
흙을 떠나 수반에 앉은 꽃가지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고
저 혼자 활짝 꽃봉오리를 피웠다가 시들어
죽어서야 땅으로 돌아갔다.
그 앞을 스쳐갈 때는 누구나
무심하여도 아름다워졌으므로
뿌리 없이 떠나는 것도 뿌리 없이 돌아가는 것도
자기 뜻이 아닌 채로 꽃가지는 잠시 어여뻤다.
창 밖에는 햇볕이 따뜻했다.
물끄럼물끄럼 보던 나는 부박했다.
쥐똥나무 울타리 / 1994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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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수직
누군가를 위해 빌딩이 수직으로 서 있다.
누군가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수직으로 서 있다.
누군가를 위해 전광판이 수직으로 서 있다.
누군가를 위해 전신주가 수직으로 서 있다.
누군가를 위해 도로표지판이 수직으로 서 있다.
그 위에 햇빛이 금화같이 찰찰 수직으로 쏟아지고
좌회전 한국은행 우회전 대한투자신탁 직진 코스닥
누군가를 위한 벤츠 한대가 수직으로 질주한 뒤에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들은 수직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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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색
달빛 먹고
달빛 먹고
달빛 먹고
오늘밤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다.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적막이여
때가 왔구나. 너의 때가 왔으니 나가라.
나는 심정을 탁한 세상에 두련다.
차면 기우는 것은 달 뿐이 아니다.
우리의 생마저도 그러하니
삶이란 삶은 다 죽이지 못하고
죽음이란 죽음은 다 살리지 못한다.
마을의 지붕들이 내려앉고
인적이 사라지는 처처에 너는 있어라.
누가 또 달빛을 받아먹는가.
달빛 먹고
멈춰 서서 적멸할 수도 있는가.
해안선이 능선을 팽팽하게 당긴다.
산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달빛을 빨아들인다.
과거에 달이 빛 날 때마다 적막이여
널 바다로 내보내고 내 마음에 천공을 끌어들여
내 몸 더불어 지상에서 떠오르고 싶었다만
오늘밤은 내, 산머리에 이마를 깊숙이 댄다.
이것으로 내 인생의 의문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면 달은 빨리 질 것이다.
달이 지면
달이 지면
달이 지면
난 이제 그만 만사에 능란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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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 대하여
한낮에 어둠을 앓은 아들에게
체온을 주어버리고 목소리를 주어버리고
투명한 몸만으로 떠다니는 햇빛이
어린 것을 불러 순결을 보여주는 모습을
나는 오월이라 생각했다.
이미 자란 꽃나무에 새순하나 더 싹틔워
청산이 흙과 물의 힘을 꿈꿀적
햇보리 익는 들판에 둥실둥실 떠돌며 한톨
이삭에 영그는 어미아비들 마음을
또 다시 오월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러면 어느해 남도에서 내가 만난 오월은
노여운 얼굴을 하고 길가에 쓰러져
이 시절의 눈물대신 붉은 꽃잎 뚝뚝 떨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더듬이를 잃은 벌레들이
이슬에 갇혀 사람이 그리워 울고
어린것들이 땅바닥에 주저 앉아
풀물 씹으며 햇빛에게 팔매질하면
나는 오월이라 믿었다.
그 순간부터 들판에 온몸을 바치고도
익은 보리가 되어 살지 못하여
어미아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노을녘에
황사바람 일어나 흐려 놓을 때를
언제나 나는 오월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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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생에게
너는 햇빛을 가지지는 못해도
맑은 눈빛으로 네 생일을 밝힐 날 온단다
아직은 해를 쳐다볼 수 없더라도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진 말렴
오월에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쑥국새는 오월에 돌아와 울지 않니
뜻도 없이 달빛 저무던 밤에
아빠의 온몸이 썩은 가마니에 싸여
한길에 버려져 있더라는 소문에도
아빠를 찾으려고 눈뒤집혀 나간 엄마가
개천에 나자빠져 있더라는 소문에도
배내짓 웃음 방긋방긋 웃던 아가야
네 생년월일을 은유로 말한다면
사람에게 사람의 할 일을 묻던 날이지
이제는 아빠 엄마의 삶보다 넓은 네 삶 이뤄야 해
자라는 동안 자신을 위해 친구들과 싸우진 말고
황토를 딛고 알곡 거둘 손발을 잘 키우렴
커서는 친구들 모아 들꽃에 얼굴 대고
그 들꽃 누구 넋으로 돋았는지 생각하렴
사람들은 오월에 떠나서 말 없어도
오월에 부는 바람이 대신 흐득흐득 울지 않니
너는 바람소릴 가지지는 못해도
고운 음성으로 네 생일을 말할 날 온단다
~~~~~~~~~~~~~~~~~
질경이
질경이는 밟혀서 자란다.
먼지 이는 길 가에서도 먼지를 잠재울 줄 알며
자갈 하나에 깔려서도
질경이는 대지의 힘을 얻는다.
밟히면 밟히면 눕고 눕고
잠시 누웠다가 기어코 일어나는 끈기
콱 콱 밟힐수록 밟힐수록
뿌리 뻗어내는 뿌리 뻗어내는 뚝심
질경이는 잎을 포개고
벌레를 쉬게 하지만
잎만으로 뜬 세상을 살지 않는다.
우리가 맨몸으로 살아가며
가꾸는 어린 목숨도
쓰러지고 일어날 때 튼튼해지는 기쁨
봄 아침에 풋풋하게
질겨지는 질경이
~~~~~~~~~~~~~~~~~~~
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날이 흐린다.
나무들은 햇빛을 받아들여 뿜던 초록빛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다.
바람이 분다. 잎새가 흔들린다.
다시 바람이 분다. 가지가 흔들린다.
드디어 나무들이 흔들리고 세상 크기대로 흔들리면서
제 목숨을 뿌리에서 밑동으로 밀어올리고
제 생김 생김을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드러내어 모든 잎맥으
로 저를 키운다.
바람이 분다. 분다. 잎새들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나무들은 홀로 흔들리면서도 숲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바람에게 저를 맡기지 않고 다만 저의 일생을 가다듬는다.
벌레한테 싱싱한 부분을 내주고도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울울하다.
비가 온다. 비 온 뒤에
나무들은 일시에 맑아져 자연으로 푸르러져 간다.
이 동류!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 푸른숲,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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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인도네시안 부부는 불법체류자
한국에서 낳은 자식도 인도네시안
아들은 그래서 불법체류자
불법체류한 지 반십 년
인도네시안 부부는 벌금을 내려고
이미 적금을 부어놓았지만
아들이 내야 하는 벌금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부모가 합법체류하는 동안에
한국에서 태어난 자식이
부모가 불법체류자가 되면
덩달아 불법체류자가 되어
똑같이 벌금도 물고
똑같이 강제출국 당해야 했다
옷 만드는 공장에서 일해 온
인도네시안 부부는 귀국하면
옷 파는 가게를 차릴 작정하지만
아들이 크더라도 물려주고 싶진 않았다
국경 없는 공장/ 삶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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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부락-두렁에서 술 마시고 놀고 일해서 힘세다
늙은 아비는 털버덕
마당에 주저앉아 맥놓았다
아들이 죽었다
지방대학 마치고 일자리 없어서
농업을 직업으로 삼은
아들이 두렁에서 자살했다
아비가 남겨준 전재산은
논 네 마지기에 밭 한 마지기
돈사 한 동에 돼지 열 마리
아들은 논으로 밭으로 돈사로 오가며
나락 잘 베고
감자 잘 캐고
종돈 잘 먹였지만
해마다 줄어들었다
늙은 아비가 벌떡
마당에서 일어나 소리질렀다
"우리 아들은 두렁에서 술 마시고 놀고 일해서 힘세다.
근력이 모자라 농약을 먹었겠냐? 배가 고파서 농약을 먹
었겠냐?"
베드타운 / 창작과비평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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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
이래라 하신다 해서 꼭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님께서
는 둔덕에 돋은 들쑥 캐시고 저는 바구니 들고 서 있습니
다. 초봄 되니 일찍 새잎 낸 들쑥이 님을 이끌고, 저는 님
께 이끌리어 고즈넉합니다. 가까이 님을 계시게 한 지난
겨울, 저는 하늘에 떠오르지 않는 그믐달을 그리워했고,
님께서는 저를 멀리 보시며 갈무리해 논 오곡 중에서 명
년에 쓸 종자를 잠자코 가려 두셨습니다만, 그때 숨결과
온기를 다 땅에 내려 줘버린 만물이 지금 님과 저를 주시
합니다. 아직 파종하기 이른 오늘 한나절은 님께서 한 움
큼씩 건네주시는 들쑥을 받아 저는 바구니에 담습니다.
일에서도 언제나 님께서는 스스로 먼저 행하시고 저는
들러리입니다. 늦봄 되어 산줄기가 님을 이끌면 저는 님께
이끌리어 한적해지고, 들판이 님을 이끌면 저는 님께 이
끌리어 부지런해질 것입니다. 그땐 무얼 택하시렵니까?
대답 아니하시면 제가 님을 이끌어 가렵니다. 들음들음이
없더라도 어디로 가느냐 묻지 말아주십시오.
제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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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가족사
어린 그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 쓰라려했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핥아 빼주었다
그날부터 눈알이 밝아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어린 그가 벌레에게 물려 몸을 긁적였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침을 발라주었다
그날부터 한동안 온몸이 가벼워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대신할 수 있었다
어린 그가 어른이 되어 낳았던
어린 자식들이 어른이 되던 날까지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그는 혀끝으로
티끌 들어간 눈을 핥아 빼주었고
벌레 물린 몸에 침을 발라주었다
그러나 티끌과 벌레 더욱 들끓는
빈부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자식들은
그가 하려는 일을
먼저 보지도 않고
대신하지도 않고
혀를 빼물거나
혀를 끌끌 찼다
시와 사람 / 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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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살자고 하는 짓
밭고랑에서 삐끗해 금 간 다리뼈 겨우 붙으니
늙은 어머니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마당가로 가
참나무 아래서 도토리 주워 껍질 까다가
막내아들이 쉬라고 하면 내뱉었다
놔둬라이, 뼈에 숭숭 드나드는 바람 달래는 거여
장가 못 든 쉰줄 막내아들이
홀로 된 여든줄 어머니 모시고 사는데
막내아들이 검정콩 베어다 마당 한복판에 쌓아놓으면
늙은 어머니는 참나무 가지로 타닥타닥 두드려 털고
막내아들이 멀리 튄 콩 주워오면 소리질렀다
놔둬라이, 한구석에 묻혀서 명년까지 있고 싶은 거여
막내아들이 갈아입힌 속옷에 새물내 나서
늙은 어머니는 코 킁킁거리며 새물새물 웃다가
막내아들이 겉옷에 붙은 풀씨 뜯어내면 중얼거렸다
놔둬라이, 혼자 못 가는 곳에 같이 가자는 거 아니겠냐
늙은 어머니가 해거름에 집 안으로 들 적에
이웃집 수캐가 어슬렁어슬렁 대문 먼저 넘어서
암캐에게 올라타려고 낑낑거리는 꼴이 민망해서
막내아들이 콩줄기 거머쥐고 후려치면 말렸다
놔둬라이, 지들 딴엔 찬 밤 길어지니 옆구리 시린 게여
다들 지 살자고 하는 짓이여 다들 지 살자고 하는 짓이여
반대 쪽 천국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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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의 이면사
두 사람의 오른손이 맞잡고
팔 흔들며 웃으며 말할 때
두 사람의 왼손은 주먹 쥐거나
손가락 꼼지락거리거나 손바닥 편다
오랜만에 만났거나
볼일로 만났거나
처음 만났거나 간에
두 사람이 뜻하지 않아도
오른손들이 저절로 앞으로 나오는 건
그간 쪼였던 햇볕의 양을 보여주려 하든가
그간 움켜쥐었던 돌멩이의 수를 보여주려 하든가
그간 박수쳤던 힘의 크기를 보여주려 하든가
그런 속내가 숨어 있다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서다
오른손이 전면에 나서는 동안
화 돋우면 주먹질할 수 있도록
욕해야 한다면 손가락질할 수 있도록
부끄러워지면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도록
왼손은 측면이나 후면에서 기다린다
시와 미학 / 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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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상징어사전
내가 '산등성마루' 로 올라갈 때
너는 '상수리' 로 올라간다고 말해서
같이 산행을 하면서
상수리나무 열매로 올라가는
너를 상상하고는 갸웃했다
내가 '드라이클리닝' 할 옷을 맡기러 세탁소 갈 때
너는 '화학빨래' 를 시키러 가느냐고 묻고
내가 '원피스' 를 입은 너에게 멋지다고 칭찬했더니
너는 '달린옷' 이 멋지지 않느냐고 되물어서 멋쩍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를 따러 가자고 청했을 때
너는 '조국의 앞날을 떠메고 나갈 어린 세대' 를 딸 수 없다고 거절했고
내가 나는 '사람' 이다고 주장했을 때
너는 내가 '혁명과 건설의 주인' 이 아니다고 부정했다
'꽃봉오리' 와 '사람' 이란 각 낱말의 상징을
우리가 각각 다르게 해석해서 쓰던 그날부터
둘 중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낱말을 버려야
한곳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계간 시와문화 / 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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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타운-매뉴얼
임직원들은 회사에 출근한 뒤
컴퓨터 켜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가능하면 화장실에서 짧게 볼일 본다
(당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매뉴얼에 나와 있진 않지만)
사적인 외출을 금지하고
업무차 출장을 나가서는
매뉴얼에 씌어진 대로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며
무조건 잘 웃는다
돌아서서 역겨워할망정
(회사의 미래 이익을 위해서라고
매뉴얼에 나와 있진 않지만)
임직원들은 퇴근한 뒤
집에 돌아가서 피곤한 채
아내와 섹스를 하지 않고
일찌감치 잠에 빠져든다
(익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매뉴얼에 나와 있진 않지만)
베드타운 / 창작과 비평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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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 도둑
골목 모퉁이에 놓여 있는 헌옷 수거함은
뚜껑 잠긴 채 투입구만 뚫려 있었다
겨우내 헌옷만 입고 다니는 나는
이따금 갇힐까 싶어 종종걸음쳤다
평일 밤에는 슬그머니 긴 집게를 넣어
투입구로 몇 벌씩 빼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층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남자들은
긴 바지와 셔츠만 골라서 가져 가고
지하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자들은
예쁜 속옷만 골라서 가져 갔다
빈국으로 수출한다는 수거업자는
주말 낮에만 와서 자물쇠를 풀어 뚜껑 열고
그들이 남긴 옷가지만 트럭에 실으면서
나에게 오며가며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단 한 벌도 쑤셔 넣어본 적 없는 내가
헌옷 수거함에 갇히고 싶도록 남루하던 날
얼른 투입구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내가 입은 옷보다 새것 한 벌이 잡혀 나왔고
그 하루가 싱긋 웃으면서 지나 갔다
불교문예 / 2006년 봄호
누가 살고 있기에
새가 와서 잠시 무게를 부려보기도 하고
바람이 와서 오래 힘주어 흔들어보기도 한다
나무는 무슨 생각을 붙잡고 있는지 놓치는지
높은 가지 끝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잎이 다 시드는 동안 나무는
가슴을 수없이 잃고 찾고 했나보다
그의 둘레가 식었다가 따스해졌다가 반복하는데
내가 왜 이리도 떨릴까
아직 가까이하지 않은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하고
곁으로 빨리 오지 못하는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한
온기가 나를 감싼다
그의 속에는 누가 살고 있기에
외롭고 쓸쓸하고 한없이 높은 가지 끝에
잎사귀들 얼른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그의 생각을 끊어놓고 이어놓고 하는 걸까
나무가 숨가쁜 한 가슴을 꼬옥 꼭 품는지,
나도 덩달아 가슴이 달떠지는 것이어서
내 몸속에도 누가 살고 있기는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보는데도 나는
무슨 생각을 그리움처럼 놓쳤다가 붙잡았다가 하고
여전히 그는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
새가 부려두고 간 무게를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바람이 흔들어대던 힘을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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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노래
우리 만난 이 세상에 풀꽃 피고
네가 살아 있을 때
널 따라 나비 날거든 나도 살아가는 줄 알거라.
햇살에 부신 눈을 비비며
한세월 보이잖는 길을 더듬어
푸른 하늘 서러운 황토에 왔다.
우리 괴로운 이 세상에 먹구름 끼고
네가 눈물 흘릴 때
널 따라 비 오거든 나도 우는 줄 알거라.
햇살에 부신 눈을 비비며
한세월 보이잖는 길을 더듬어
푸른 하늘 서러운 황토에 왔다.
우리 괴로운 이 세상에 먹구름 끼고
네가 눈물 흘릴 때
널 따라 비 오거든 나도 우는 줄 알거라.
갈대 서걱거리는 허허벌판 바라보며
바람 부는 벼랑 끝에 장승으로 서 있지만
모진 마음은 더욱 응어리지는구나.
우리 헤어지는 이 세상에 천둥치고
네가 죽을 때
널 따라 벼락 떨어지거든 나도 죽는 줄 알거라.
인생 한 번 간 뒤에도 밤이 오듯이
사람 사랑하는 것은 운명 아니냐.
천지간에 어둠이 뒤덮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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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유산
논물 빼려고 물꼬 트듯 아버지는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 모두 열어서
평생 먹던 쌀밥과 된장국을
이제는 먹고 마시는 족족
자식에게 질펀하게 내놓는 것이었다
끝까지 물려주지 않아야 똥오줌이나마 받아준다고
논밭에 일찍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곤 하더니
끝까지 왔는데도 안 물려주고 똥오줌이나 먼저 받으라는가,
잠시 아버지를 뵈러 온 자식은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자식은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심어먹었던 잡곡과 채소
아버지가 날마다 길어먹었던 뒤란 찬 우물물마저
몸에서 다 비워내고 나면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자식은 논밭을 팔아먹을 것이다
그래도 거름 만들려면 정란 펴니듯 아버지는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 모두 끌어서
논두렁 다지던 발걸음과 새 쫓던 팔매질도
씨앗 꾸러 온 이웃에게 해대던 손사래마저 모아
자식에게 조용히 내주고 맥놓는 것이었다
무언가 찾아올 적엔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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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鹽河)에서
무얼 하러 여기 왔는가.
서해는
적요한 바다의 가슴에 한강과 임진강을 품는데
나 무얼 더 찾으려고 예 왔는가.
이쪽 섬에 도래한 철새같이
내 반 평생의 절반은 따뜻한 하늘이 그리워 울었고
저쪽 뭍에 웅크린 산줄기같이
내 반 평생의 절반은 응달 양달에 순종하였다.
남어지 남은 내 반 평생은
거친 들을 지나 햇빛과 바람에 젖어 깊어 가는 강물처럼
깨끗한 사람의 땅에 길이 닿고 싶어라
왜소나무 울울한 야산 한 자락 깍아 일구는 밭뙈기
어린 자식들은 언제 커서 여기서 저무는 해에 안길 것인가.
질긴 쑥 뿌리는 캐도 캐도 돋아나 둔덕을 덮는다
내 육신이 기거하는 집은 고독하구나.
염하를 건너가면 아침은 내게 밀물이되어 세상에 넘치라 하고
염하를 건너오면 저녁은 내게 썰물이 되어 세상에 좀 모자라라
하느니
무얼하러 왔는가.
서해는
적요한 바다의 가슴에 한강과 임진강을 품는데
나 무얼 더 찾으려고 예 왔는가.
* 염하는 강화와 김포를 연결하는 강화대교 아래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되어 간만을 이루는 곳이다
포옹 / 3인시집 / 1993.2
하종오.김정환.고형렬/ 제3문학시선/제3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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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매화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 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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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
사나운 개가 공장 문 앞에 매여 있어서
공장장이 목줄을 잡아주어야
동남아인 노동자들이 출입했는데
한낮에 개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공장장이 몽둥이 들고 공장 문 앞에 서 있다가
시간 되자마자 퇴근하는 필리피노 하나
다음 퇴근하는 스리랑칸 하나
그다음 퇴근하는 타이랜더 하나
개 잡아먹으러 빨리 간다고 두들겨 팼다
그 이튿날 아침
공장장이 몽둥이 들고 공장 문 앞에 서 있다가
시간 지나서 출근하는 필리피노 하나
다음 출근하는 스리랑칸 하나
그다음 출근하는 타이랜더 하나
개 잡아먹고 늦게 나온다고 두들겨 팼다
한낮에 고급승용차 타고 온 사장이
이쑤시개로 이빨 쑤시고 쩝쩝거리며
사나운 강아지 한 마리 내려놓으니
공장장이 달려와 목줄 잡아당겨
공장 문 앞에 매어 놓았다
둘이 짖어대는 강아지 보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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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