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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비방
가가호호 방방곳곳 예수복음
전파하라 명령하시네
비상시국 일수록
방방곳곳 전파하라 하시네
*가전비방- 한 집안에서만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약의 처방.
*가전비방 명의
무태안
취재일: 1991년 10월 7일 가전비방 명의 제갈춘대 옹
제목: 선조 때부터 물려온 비방으로 난치병 고치는 민간의술자
요점: 안면신경 마비시켜 와사증 치료해내 고약 붙여 무좀·습진 등 피부병 치료
생약을 이용해 피부 괴사 수술하기도 어떤 의서에도 없는 독특한 경험비방들
이 세상에 뿌리가 없는 것이 없으니, 의학의 뿌리를 들라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 삶과 향토 속에 스며 있는 민간의술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탄생한 이래 질병은 뒤따랐고, 자연이 내린 질병은 자연 속 어디엔가 약과 치료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인간이 생존본능으로 찾아내고 경험과 지혜로 축적 시킨 게 바로 민간의술이다.
오늘날 동양의학에서 즐겨 쓰고 있는 침구법·생약 치료법도 투박한 민간의술의 방법을 가다듬은 결과이며,서양의학도 비록 17세기 데카르트와 뉴튼 이후 기계론적 의학으로 편향되긴 했지만 애초에는 자연에서 그 치료 방법을 구하였다. 서양의학의 의성(醫聖)이라 일컫는 히포크라테스가 "자연은 바로 질병의 의사"라고 말한 게 좋은 예이다. 따라서 인간은 수천 년에 걸쳐 저 들녘의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성을 찾았고, 하찮은 시골집에서 쓰는 치료법에서도 의술의 지혜를 얻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의술의 뿌리인 민간의술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 가치를 무시해 버리는 감이 없지 않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열매에 영양제를 주기보다 뿌리를 북돋우어야 하듯이, 의학의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그 뿌리인 민간의술을 살리고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서양의학의 인공화학적 치료방법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암과 에이즈 그리고 살과 뼈가 문드러지는 병 등 예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질이 늘어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의학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약을 찾아야 하고, 의학의 모태인 민간의술에 숨겨져 있는 경험적 지혜에서 치료의 단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중국은 오늘날 늘어나는 각종 괴질을 정복하기 위해 그들의 중의학은 물론, 지방 곳곳에 숨어 있는 민간의술을 쳬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의술을 총동원하여 암·고혈압·중풍·당뇨 등 난치병 치료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병 고치는게 의술' 이라고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민간의술을 인정하고, 민간의술사인 가도(街道)의 의생(醫生)을 국민의 질병 치료에 참여시키고 있다.
이런 풍부한 '의술자산'의 바탕 위에 중국은 현재 어느 나라보다 의술발전을 활발히 이룩해 나가고 있고, 세계 자연의학의 중심국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의학발전과 난치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민간의술이나 비방이 전국 곳곳에 무수히 숨어 있으니, 경북 달성군의 제갈춘대(諸葛春大, 취재 당시 81세) 옹의 비방도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제갈 옹이 살고 있는 곳은 대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약 40분 가량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제법 개발되어 차도 시원스레 다니고 공장도 들어서 있지만, 마을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쳐 있고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우리네 시골 풍치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제갈 옹의 비방은 구안와사풍과 피부병을 약초와 고약을 이용해 치료하는 방법이다.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구안와사풍은 양방병원에서는 고치지 못하는 질환이고, 요즘의 피부병 또한 약국에서 각종 약을 팔고 있지만 근본 치료와는 거리가 멀고 낫기도 힘든 병이다. 하지만 제갈 옹의 비방약을 쓰면 입이 돌아간 게 간단히 돌아 오고, 피부병이 말끔히 낫는 특징이 있다.
그의 비방약은 집안에서 전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공개하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 실체를 알 수 는 없었다. 하지만 제갈 옹과 잠깐 동안의 대화를 통해 그 의술의 특이함과 그 속에 담긴 지혜를 알 수 있었다.
제갈 옹이 구완와사풍 치료에 쓰는 약재는 물기가 마르지 않은 두세 가지 생약초이다. 이를 환자가 오면 그 자리에서 찧어 지름이 약 2.5㎝ 되게 둥글게 뭉친 다음, 입이 돌아간 쪽 관자놀이 부분의 위턱과 아래턱이 맞물리는 곳에 붙여 준다. 이 약초를 하루 붙인 뒤 일주일 동안 그 자리에 사람의 침을 바른다.
"얼굴엔 양쪽으로 통하는 신경선이 있고만. 그 하나가 마비돼 뿔면(버리면) 반대쪽으로 입이 삐뚤어지고 얼굴 전체가 돌아가 뿌리는 기라. 침술은 막힌 혈을 뚫어 주고 마비를 풀어 주는 치료법이지만도, 내가 쓰는 약치료는 반대로 마비되지 않은 쪽도 마저 마비시켜 똑같이 땡겨 주는 거이고만. 신경이라 카는 건 같이 마비돼 가지고 균형이 잽히면 다시 통하게 되아 있어. 그게 인체의 묘한 법인기라. 침술로 하는 건 효과는 빠르지만 확률이 적고, 약재라 카는 건 시간이 길지만도 치료확률은 높은 편이지. 내도 혈압으로 온 중풍은 침 줄 줄 알지만 더러 실수가 있거든. 하지만 약은 똑같이만 하면 실수가 없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입이 발라지는(바르게 되는)기라. 그래 원래 입 삐뚤어진 거에는 침 안 줘 봤지." '마비를 통해 마비를 푼다.' 어느 의서에도 없는 그야말로 민초 속의 경험이 축적되어 우러나온 독특한 의술이 아닐 수 없다. 독으로 독을 다스리는 맥락이라고나 할까. 와사풍의 치료 과정을 좀더 들어 보자.
"약초를 하룻밤 붙였다 떼면 가에가 툭툭 부리키거든(부풀거든). 가쪽에만 헐고 복판은 안 허는데 일주일 간 사람 침을 자꾸 발라 충분히 헐어야 돼. 안 헐면 입이 안 돌아오는 기라. 밤낮으로 잘 때도 발라 주면 좋은데, 너덧 시간 자는 건 개안찮고, 오래 자 말라 뿔면 안 되는 기라. '살성'이 좋고 피부가 두꺼운 사람은 잘 안 허는 데 '살성'이 안 좋은 사람은 대박 헐어. 나중엔 화상 입은 사람마냥 물집이 생기고 진물이 나는데, 그게 차차 한 20일 간 아물어지고 딱쟁이가 떨어지면서 입이 발라져. 그게 어려운 점은 마르지 않게 노상 침을 발라 대는 거이지. 볼때기 헐아 놓으면 숭 질까 걱정하는데, 숭은 안지는고만. 처음에 까무리하니 있다 차차 본색이 돌아오고, 나중에 딱쟁이 떨어지고 아물 때는 숭이 없고만. 단지 '살성'이 좋아 헐지 않는 사람은 별도로 시게(세게) 쓰는 약이 있어. 그건 숭이 좀 지지만, 그래도 입이 삐뚤어져 있는 것보단 낫지. 그래 시게 약을 쓸 땐 당자한테 묻거든. 여간 숭이 져도 개안찮냐(괜찮냐), 숭 지는 게 부당하냐 묻고 개안타면 해주지." 약초를 붙이고, 침을 바르고, 얼굴을 헐게 하고, 모든 게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질그릇 같은 느낌이다. 모든 걸 세련되게 설명하고 치료하는 양방이 화원의 꽃이라면, 제갈 옹의 민간 비방은 모진 풍파를 이기고 핀 저 들녘의 야생초라고 할 수 있었다.
피부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어떠한가? 피부병은 고약을 붙여 치료하는데, 고약 역시 건재상에서 약초를 구해 제갈 옹이 손수 집에서 고아 만든 비방약이다. "무좀이나, 습진이나, 몸 근지러운 거나, 피부병이라 카는 건 피부 밑 땀구멍이 막혀 거기에 나쁜 피가 점점 모여져 생기는 거이고만. 거기에 고약 붙여 놓으면 피부가 새까마니 돼. 고약 붙이면 좋은 혈 있는 데는 살이 가만 있고 나쁜 피 있는데는 여드름 솟듯이 꽉 솟는 기라. 그래 딱쟁이 들쳐 눌러 뿔면 비지밥 같은 게 꾸역꾸역 솟아 나지. 그게 삭아져 나와 완전 청소되아 뿔면 피부병이 완전히 낫는데, 서너 번 갈아 붙이면 죄 되는고만. 그래 내 환자가 와도 피부 고약 많이 안 가아 가라 카지."
제갈 옹의 아들 영수(취재 당시 45세) 씨는 고약을 붙이면 피가 나쁜 데는 고약이 빨아 낼 게 많기 때문에 잘 붙는다고 한다. 하지만 피가 좋은 데나 피부병이 삭아져 좋은 혈이 나온 데는 고약이 빨아 낼 게 없으니 붙여 놓아도 이내 말라 떨어진다며 고약의 신통한 작용에 대해 부연 설명해 주었다.
한편 제갈 옹이 치료하는 피부병 치료 중 특이한 것은 피부가 점점 죽어 들어가는 병의 치료법이다. 이 죽어 가는 살을 약초와 고약을 이용해 들어낸다. 일종의 생약 수술법이라 하겠다. 살이 점점 죽어들어가는 병이라면 대개 피부암·버거씨·나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병은 난치 중의 난치인 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 병을 생약을 이용한 수술법으로 고친다니 민간의술의 잠재력에 놀라울 뿐이다.
"사람 중엔 살이 째벼도 안 아프고 죽어 들어가는 게 있지. 살이 죽으면 땀이 몬 올라 오거든. 그걸 오래 놔두면 진물이 나고 썩어 가고 나병자가 된다 카이. 그건 단순히 피 순환이 안 돼 나서 그라거든. 나뭇 가쟁이 뿌렁이도 물이 몬 타고가면 말라 죽듯이, 살도 피가 못 가면 썩게 돼 있어. 그건 약을 대서 죽은 살을 쏙 빼내야 되는데, 먼저 피가 통하는 부위와 안 통하는 부위를 분리 시키는 약을 쓰지. 그리고 피부병에 쓰는 고약을 붙여 놓으면 그 주위가 뱅 돌아 가지고 죽은 살만 고둥알 빠지듯이 쏙 빠져나와 뿌러. 죽은 살엔 피가 안 통하니 피는 안 나오지만 새살 돋을 때까지 무척 아파. 그곳에 새살 돋우게 하는 생약을 찧어 담빡 채 놓으면 억시게 더 디지만 차차 나술 때까지 물이 나와 좋은 살 맨들어 내지. 주위에 그런 사람 여럿 고쳐 주었고만." 역시 어느 의서에도 없는 독특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경험은 과학적 연구와는 또 다른 창조의 지혜이다.
마비를 마비로 풀고, 고약으로 인체의 불순물은 뽑아 내고, 생약초로 수술하는 제갈 옹의 비방과 같은 독창적인 민간의술은 민초들의 경험적 지혜가 쌓아 이루어 놓은 의술이라 하겠다. 이런 경험적 지혜가 있기에 고래(古來)로 우리 선조들은 민간의술에 담긴 새로운 의술 창출의 가치성을 소중히 여겨 누항(陋巷)에 널려 있는 민간방을 샅샅이 수집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조 때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한 <향약집성방> 등이 좋은 실례이다.
한편 제갈 옹은 자신의 비방약의 치료효과는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건대, 와사풍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피부병은 고약으로 완전 무결하게 치료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와사풍이 완벽하지 않은 건 간혹 '살성'이 좋아 약을 붙여도 피부가 헐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갈 옹의 말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나, 필자가 간 날은 환자가 없어 그 치료과정이나 치료효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들은 의료면허나 약품허가가 없는 관계로 외부에서 환자가 오는걸 극히 꺼려 하였다.
따라서 제갈 옹의 비방이 집안이나 동네사람이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찾아 오는 환자 위주로 쓰일 뿐인지라 찾아오는 환자를 찾기가 더욱 힘들었다. 다만 나중에 마을 입구 양지 쪽에 앉아 한담을 나누던 7~8명의 노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그 효과를 확인하였다. 태어나서부터 제갈 옹과 같은 고향에서 살고 있다는 노인들은 제갈 옹의 집안이 선조 때부터 와사풍이나 피부병을 비방으로 특별히 잘 고쳤고, 주위에 나은 사람도 많이 있다고 들려 주었다. 특히 몇몇 노인은 자신들이나 가족들도 치료를 받고 말끔히 나은 적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제갈 옹이 '가족의사'가 되고 '동네의사'가 된 건 약 40년 전. 그렇지만 의사 일(?)은 병원도 없는 조그만 산골에서 동네사람이 아프다거나, 가끔 다른 데에서 병을 고치지 못하고 환자가 찾아올 때만 종사할 뿐이었으니 평생의 일은 농사이다. 달성군 현재의 고향에 뿌리 내린 건 9대째이며 비방약은 선조 때부터 내려왔다.
"집안에 아버지 형제가 세 분이었거든. 큰집에 백부(伯父)는 글도 많이 했고 조선시대 때 고을 향장(鄕長)이 었는데, 침술에 능하셨어. 혈압으로 온 중풍이나, 얼라(어린 아이) 경기, 속병을 잘 고쳤어. 중부(仲父)는 처가가 청도인데 처가 쪽의 조부가 병을 잘 봤어. 거기서 우리 중부도 피부병 고치는 걸 배웠는 기라. 그때는 촌에 의사도 없고, 갈라 카면 거북하고, 그래 상부터 집안에 물려 내려오는 의술이 있었어. 집의 선친은 스므남 살 잡술 때였는 갑도만 입이 삐뚜러져버린 기라. 근데 그걸 나술려고 아무리 여러 해 침을 맞고 약을 먹고 고생해 대녀도 안 되거든. 그때 달성 어디엔가 바깥양반이 문씨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 안 양반이 약초로 하는 걸 갈차 줘서 해봤도만 발라졌는 기라. 그래 숱해 고생 많이 해놓으니께, 선친이 농사 지으면서도 평생 방방곡곡 환자가 오면 다 나사 줄라꼬 결심했는 기라. 그래 환자 오면 불쌍한 사람이라꼬 치료해 주고, 점심 대접까지 해 가지고 보냈어. 광복 되고 나서 82살에 돌아가셨으니께 여러 해 했지. 우리 보고 만날 '배와라 배와라' 캐도 젊었을 적에 어디 신경써져야 말이지.
침술하는 것도 옳게 배우지도 몬 하고. 그래도 약은 평소에 듣고 어떻게 하니라 알고 있었으니, 선친 돌아가시고 나서 그대로 해보니 된다 말이지. 그래 그 뒤에도 사람이 찾아오면 해주고 그랬지." 이렇게 환자를 치료해 주고 제갈 옹이 받는 대가는 약 재료비에 불과한 일이천 원 정도. 한 번에 수만 원내지 수십 만원씩 들어가는 병원 치료비를 생각한다면 비할 바가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 준 약재와 간단한 자연적 치료방법을 이용하고, 자신의 재주를 이용한 치부를 꾀하기보다는 환자의 아픔을 생각하는 제갈 옹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내가 의술하는 건 우리 선친도 그랬지만 돈 벌라꼬 하는 게 아니고만. 내 수고 들여 아파 찾아오는 사람위해 약 만들어 줄 뿐이지. 내야 평생 농사를 짓고 의술을 전업으로 안 했지만도 내 가족을 고쳐 주었듯이,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 재주 있으면 서로 도와 주는 게 그래도 인심이지. 그냥 돌려 보내는 건 사람 일이 아니고만. 자식들은 내가 면허 없으니 사람 몬 오게 하고, 내 보고도 하지 말라 캐도 환자들이 와 사정하니 우에 하노. 간혹 관에서 왔는지 사람이 와서 면허 없이 이런 일 종사한다고 말도 하지. 내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개안치만, 시집 갈 처녀가 입 삐뚤어져 가지고 와 엎드려 퍽퍽 우는 걸 보면 사람 맘 가지곤 몬 뿌리쳐. 내야 하등 오늘날까지 돈 벌라꼬 한 일 없으니 관에서 오면 알아서 처리하라 카지. 그러면 안 그렇다 카면서 '하이소 하이소' 그래. 우리 집 와 보면 돈 벌라꼬 하는 사람 아니란 걸 가들도 짐작카거든.
그래도 갈 때는 '넘은 나사 주지 말고 집안에 병난 사람만 나사 주이소' 하고 가는고만." 세상이 바뀌고 제도가 바뀌면 인심도 바뀌어야 하는가. 제갈 옹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사면허가 없다고 아픈 사람을 보고도 방치하도록 감시하는 요즘 인심이 너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한 질병 치료에 능력이 있는 민간의술자라면 한정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도록 인정하는 중국의 '가도의생'과 같은 제도가 우리에게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제갈 옹과 같은 비방이 국민의료에 수용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비방으로 남아 있는 한, 그 손해는 결국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새 사람들이 약국 약이나 병원 의술만 의술로 알지, 내 같은 조약(調藥)이나 의술을 어디 알아주기나 하나. 하지만 의술이나 약은 자연 산 속에서 나지, 약국이나 병원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만." 향토 깊숙이 숨어서 독창적인 의술을 꽃 피우고 묵묵히 이웃의 질병을 치료해 주는 제갈춘대 옹. 그가 담담한 어조로 했던 말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고서도 오래도록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