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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의 비명(碑銘) -조경(趙絅)
우리 도(道)가 동쪽으로 간 지 오래 되었다. 본조(本朝)의 열성(列聖)들이 솔선(率先)하여 도안(道岸)에 올라서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공자(孔子)의 법궤(法軌)를 존숭하였으며, 청아(菁莪)와 역박(棫樸)으로써 성균관의 선비들을 양성하고 현훈(玄纁)과 예폐(禮幣)로써 암혈(巖穴)의 은일(隱逸)들을 초빙하였다.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의 3대에 더욱 이 방술에 가의(加意)하여, 이에 송도(松都)에서는 서 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얻었고 호서(湖西)에서는 성 대곡(成大谷, 성운(成運))을 얻었고 호남(湖南)에서는 이 일재(李一齋, 이항(李恒))를 얻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 조식)은 영남(嶺南)에서 병립(並立)하였으니, 진실로 그 무리 중에서 빼어난 분이었다.
선생은 영남의 삼가(三嘉) 사람으로, 두류산(頭流山) 밑에 은거하면서 올바른 법도를 실천하고 인의(仁義)를 패복(佩服)하였으며 반드시 준승(準繩)을 깊이 음미하였다. 학문은 안자(顔子)를 모범으로 삼았고 뜻은 이윤(伊尹)을 표적(標的)으로 여겼으며,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을 먹는 고생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천사(千駟)의 높은 벼슬도 돌아보지 않았고 만종(萬鍾)의 많은 봉록(俸祿)도 받지 않으면서, 홀로 자득(自得)하여 절대 자신이 즐기는 바를 버리고 세상에 나갈 뜻을 갖지 않았다.
징초(徵招)의 예우가 세 임금을 거치면서 해이(解弛)되지 않고 더욱 빈번하였으므로 선생이 부득이하여 일어나서 궐하(闕下)에 나아가니, 임금께서 전전(前殿)에 사대(賜對)하였는데, 곧 명종[明廟] 때였다. 이에 임금께서 맨 먼저 나라를 다스리고 학문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자, 선생은 질언(質言, 직언(直言))을 갖추어 이치로써 대답하였고,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일을 묻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한(漢)나라 황실(皇室)을 회복하고자 도모하려면 반드시 영웅(英雄)의 힘을 빌려야만 되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선생은 그 이튿날에 즉시 산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선생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사양할 때에 이어 상소(上疏)하여, 국사(國事)가 잘못되고 천의(天意)가 떠나가고 인심(人心)이 이반(離叛)한 것을 극렬히 말하였는바, 위로 자전(慈殿)이 여(輿)를 타는 것을 언급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명종께서 그 말이 너무 곧은 것에 화를 내어 죄를 주려고 하였다가, 대신(大臣)이 힘껏 선생을 구해(救解)한 덕분에 힘입어 중지되었다. 그 뒤 선조[宣廟] 원년(元年, 1568년)에 선생이 봉사(封事)를 올려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근본을 논하였고, 또 서리(胥吏)들이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의 폐단을 논하였는데, 수십 백 마디나 되는 말이 통쾌하게 요령을 들어 말하였고 그 곡절(曲折)이 정연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2백 년간 국가가 키워 온 병통을 후련하게 설파하였으니, 비록 창공(倉公)과 편작1)(扁鵲)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우대하는 뜻으로 비답을 내렸고, 소지(召旨)와 속육(粟肉)을 전후로 서로 잇달아 내려준 것이 여러 해였으나, 선생은 한번 거취(去就)를 결정하고서 다시 번복하지 않았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 봄에 선생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본도(本道)에서 그 일을 조정에 알리니, 임금께서 중사(中使, 내시)를 보내어 문병(問病)하게 하였는데, 중사가 공의 집에 이르렀을 때 선생은 이미 서거(逝去)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증직(贈職)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일찍이 선생에게 이 관직을 임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편 것이었다.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賻儀)를 내려 주게 하였고 또 의조(儀曹, 예조(禮曹))에 명하여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여 낭관(郎官)이 제문을 갖고 와서 제사하였다.
오호(嗚呼)라, 선생의 도(道)는 ≪주역(周易)≫에서 고괘(蠱卦)의 상구효2)(上九爻)에 해당하여, 오직 도덕(道德)을 견지(堅持)할 뿐이고 때를 잘 만나지 못하여 고상하고 결백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임금과 백성을 걱정하였으므로, 대부분 입으로 하는 말들이 한갓 처사(處士)의 큰소리만은 아니었다. 옛날에 양가죽 옷을 입은 남자3)(男子)가 황제(皇帝, 한 무제(漢武帝)를 가리킴)와 함께 와외(臥外)에 있었는데도 반 마디 말도 한나라 황실을 비보(裨補)해 준 일을 들어보지 못하였고, 태원(太原)의 주당4)(周黨)은 숨어 지내면서 찾아뵙지도 않았을 뿐이었다. 이는 비록 덕망이 높은 고사(高士)로서 한 시대에 이름이 대단하였으나 운대 박사(雲臺博士) 범승5)(范升)의 기롱(譏弄)이 그 뒤를 따랐다. 선생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올린 봉사(封事)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일과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하려는 방책이 아닌 것이 없었다. 천추(千秋) 후세의 선비들은 반드시 절반도 채 읽기 전에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성군(聖君)들이 잇달아 왕위를 계승하였으되 선생의 그 말을 모두 채용하지 못하였으니, 허물을 돌릴 곳이 없다. 어찌 유독 선생 혼자만의 불행이겠는가?
나 조경(趙絅)은 태어난 것이 늦어서 선생이 살았던 시대보다 1백여 년이나 뒤진다. 오직 예전에 남토(南土)에 객거(客居)할 때에 선생의 상재향(桑梓鄕,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을 말함)에 들렀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밤을 알리고 옥(玉)처럼 아름다운 물이 골짜기에 뿜어 나왔으므로 티끌 하나라도 정신을 흔들지 않았으며 어렴풋이 선생의 기침 소리를 그 곁에서 읍(揖)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니, 배회하면서 슬퍼하였고 선생을 흠모한 것이 오래 되었다.
지금 선생의 후손인 찰방(察訪) 조진명(曺晉明)과 진사(進士) 조준명(曺俊明) 등이 영남의 인사들과 더불어 상의하기를, “조정에서 처음에 선생에게 간의(諫議, 대사간을 말함)를 추증하였고 뒤에 의정(議政)을 가증(加贈)하였으며 또 시호(諡號)가 있으니, 법으로 볼 때 마땅히 풍비(豐碑)를 묘도(墓道)에 세웠어야 되는데도 지금까지 현각(顯刻)이 없으니, 불초(不肖)들이 감히 집사(執事)를 번거롭게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예(禮)로써 사양하기를, “아닐세. 아니 맞는 말이네. 불녕(不佞)은 단지 구곡사(拘曲士)일 따름이니, 어찌 감히 노선생(老先生)의 성덕(盛德)을 형용하겠는가? 부처의 머리에 똥을 칠한다는 기롱(譏弄)이 두려울 뿐이네. 그러나 남명 선생의 추상(秋霜) 열일(烈日)과 같은 훌륭함은 지금까지도 아녀자나 농사꾼의 입에서까지 민몰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유독 이들보다 뒤지겠는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먼저 선왕(先王)이 현인에게 나아가 원대함을 체득한 이수(異數)를 서술하고, 이어 선생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의 대절(大節)을 말하였다. 선생이 학문을 배운 차례와 도(道)에 들어감이 분발하고 용맹한 것과 문장(文章)이 기고(奇古)한 것에 대해서는, 선생이 도의(道義)로써 사귄 벗인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 성운)이 애써 갖춘 비석에 빠짐없이 자세하게 쓰여 있으니, 다른 사람이 뱀의 다리를 그리듯이 덧붙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선생의 휘(諱)는 식(植)이고, 자(字)는 건중(楗中)이며 호(號)는 남명(南冥)이다. 조씨(曺氏)는 예로부터 관족(官族)으로서, 고려로부터 조선조[我朝]에 들어와 명경(名卿)과 대부(大夫)들이 끊이지 않았다. 조언형(曺彦亨)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선발되어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곧 선생의 황고(皇考, 선고(先考))이며, 이원(李原)의 딸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남평 조씨(南平曺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조차산(曺次山)을 낳았는데 재주가 있었으나 펴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편방(便房, 측실(側室)을 말함)을 두어 약간 명을 낳았고, 조준명(曺俊明)과 조진명(曺晉明)은 손자이다. 선생의 묘소는 두류산(頭流山) 운동(雲洞)의 산천재(山天齋) 뒤에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에 학자(學者)들이 덕천(德川)과 회산(晦山)의 두 곳에 서원(書院)을 창립(創立)하여 제향(祭享)하였다.
아! 선생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기국(器局)이 준정(峻整)하여 평소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선생을 보면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남에 대하여 허가(許可)하는 바가 적었으나, 유독 퇴계 선생(退溪先生, 이황(李滉))에게는 평소에 하루도 서로 만난 아분(雅分)이 없음을 혐의하지 않고서 매우 빈번하게 서독(書牘)을 주고받았으며 반드시 선생이라고 칭하였는데, 후세의 논하는 자들이 간혹 두 선생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방장산(方丈山)은 높고 높아 만 길이나 솟아 있고, 선생의 기상은 백세토록 추앙을 받네. 쌍계(雙溪)의 물은 깊고 넓게 출렁거리고, 선생의 도덕은 갈수록 더욱 발발(潑潑)하네. 군자(君子)는 진퇴(進退)와 출처(出處)를 신중해야 되니, 도(道)로써 아니하고 어찌 은둔(隱遁)을 취하겠는가? 도를 행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거두어 속에 품고서 구원(九畹)의 난초처럼 자생(滋生)하였네. 선성왕(先聖王)이 선생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기리어 찬미하셨네. 장차 천하의 선비들을 풍동(風動)하려는 것이었으니, 산해정(山海亭)의 골짜기는 운물(雲物)이 바뀌지 않았네. 자라 모양의 빗돌 받침과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비 머리를 갖춘 선생의 신도비(神道碑)에 내가 글을 새기도록 명하여, 푸른 대나무 무성한 곳에서 하상(遐想)을 일으키게 하였네.
각주
1) 창공(倉公)과 편작(扁鵲) : 창공(倉公)은 한대(漢代)의 명의(名醫)로 성(姓)은 순우(淳于) 이름은 의(意)이며 벼슬이 태창장(太倉長)이었고, 편작(扁鵲)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명의로,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임.
2) 고괘(蠱卦)의 상구효(上九爻) :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인 고괘(蠱卦)는 그 괘상(卦象)이 간상 손하(艮上巽下)인데, 그 상구효(上九爻)의 괘상이 “불사왕후(不事王侯) 고상기사(高尙其事)”임. 곧 군자(君子)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고 세상 일에 매이지 않음을 상징함.
3) 양가죽 옷을 입은 남자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을 말함. 자(字)는 자릉(子陵)이고, 회계(會稽) 태생으로, 젊었을 때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글을 배웠으나, 유수가 칭제(稱帝)하자 그는 성명(姓名)을 바꾸고 양가죽 옷을 입고서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였음. 광무제가 그를 초빙하자 궁궐에 들어와 광무제와 함께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다리를 광무제의 배 위에 걸쳐 올리는 등 태연하게 굴었으며, 간의 대부(諫議大夫)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으로 돌아가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냄.
4) 태원(太原)의 주당(周黨) : 후한(後漢)의 주당(周黨)은 태원(太原) 태생으로, 자(字)는 백황(伯況)임. 왕망(王莽)이 찬위(簒位)하자 병을 핑계대고 두문 불출하였고, 광무제(光武帝)가 누차 초빙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은거하면서 저술에 전념하다가 일생을 마쳤음.
5) 범승(范升) :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字)는 변경(辯卿)임. 광무제(光武帝)가 초빙하여 의랑(議郞)에 임명하였고 이어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상소하여 양공(梁恭)과 여강(呂羌)에게 양보하였으나 광무제가 허락하지 않고서 그를 더욱 예우하여 중대한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방문하여 자문하였음.
남명 조 선생 행장 융경 6년 임신(1572, 선조5) 윤2월 일 〔南冥 曺先生 行狀 隆慶六年壬申閏二月日〕-정인홍
선생의 성은 조씨(曺氏),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태조의 딸 덕궁공주(德宮公主)가 하가(下嫁)하여 아들 서(瑞)를 낳았는데,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선생의 시조가 된다.
고조 휘 은(殷)은 중랑장을 지냈고, 고조비 곽씨(郭氏)는 현감 곽흥인(郭興仁)의 따님이다. 증조부 휘 안습(安習)은 성균 생원이고 증조비 문씨(文氏)는 학유 문가용(文可容)의 따님이다. 조부 휘 영(永)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비 조씨(趙氏)는 감찰 조찬(趙瓚)의 따님이다. 부친 휘 언형(彦亨)은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를 지냈는데, 충순위 이국(李菊)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 6월 임인에 가수현(嘉樹縣) 토동(兎洞)에서 선생을 낳았다.
관례를 올리기 전부터 공명과 문장을 이루리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당시 세상을 압도하고 천고의 옛날 사람들을 능가할 뜻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춘추좌씨전》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좋아했고 글을 지을 때는 기이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여, 당시 세상에 유행하는 문체로 짓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가정 병술년(1526, 중종21)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선생은 집안이 대대로 청빈했다. 김해로 장가들었는데, 처가가 자못 부유했으므로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봉양했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시신을 담은 관을 모시고 삼가현으로 돌아와 부친의 묘소 동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여묘살이를 부친상 때와 같이 했는데, 몸에서 상복을 벗지 않았고 발걸음은 움막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을 마치자 원래 살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옛날 살던 집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어 ‘계부당(鷄伏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는 곳에 띠집을 지어 ‘뇌룡사(雷龍舍)’라고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우레와 용의 모양을 그려 벽에 붙여 두었다. 만년에 두류산 아래에 자리 잡았는데, 그 집을 다시 ‘뇌룡사’라고 이름 지었다. 따로 정사를 하나 지어 ‘산천재(山川齋)’라는 편액을 내걸고, 거기서 노년을 보냈다.
선생의 호방하고 고상한 성품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며, 밝고 높은 식견은 천성에서 나왔다. 중종 정유년(1537) 선생의 연세가 37세 때였다. 당시는 나라에 곧 닥칠 환난이 없었지만, 선생 혼자 걱정스럽게 잘못되어가는 기미를 보시고 마침내 어머님께 요청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림에 숨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령의 명경대를 사랑하여 오가며 깃들어 지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 김해의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강학하면서 덕을 쌓았는데, 이름이나 이익 등 외부적인 것을 원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종 때 비로소 헌릉 참봉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때 전생서 주부,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고, 또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상소를 했으나 임금의 답이 없었다. 그 뒤 또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유일(遺逸)로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상서원 판관으로 부르자 벼슬에 임명해 준 것에 대해 사은숙배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치란의 도리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고금의 치란에 관한 것은 책에 실려 있으니, 신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감과 의리로 서로를 믿어야하고 툭 트여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정치를 하는 방법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신하들을 마치 친구처럼 대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치세의 도리를 강구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정감과 의리로 서로 미더워진 뒤에라야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흩어진 것이 마치 물이 흘러가버린 것 같으니, 이것을 구제하려면 마땅히 불난 집에 불 끄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의 학문은 정치가 나오는 뿌리인지라,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한갓 다른 사람의 말만 들어서는 아무런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또 삼고초려의 일에 대해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반드시 영웅을 얻은 뒤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세 번이나 찾아가도 제갈량이 나오지 않은 것을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사정이 그랬던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열황제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했으면서도 결국 한나라 왕실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원래 살던 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융경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교서를 내려 선생을 불렀으나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매우 늙은 데다 병도 깊고 죄도 깊어 전하의 명령을 좇아 감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재상이 하는 일이란 사람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오늘날은 누가 착한지 악한지도 따지지 않고, 누가 간사한지 정직한지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임금님의 측근에 있던 신하가 경연에서 임금님께 “조식이 배운 것은 유학자와 다릅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양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으므로, 임금님께서 교지를 계속해서 내려 선생을 반드시 벼슬에 불러내려고 했으나, 선생은 다시 사양하면서 “‘구급’이란 두 글자를 바쳐서 몸을 바치는 것을 대신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그 당시의 폐단 십여 가지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온갖 병이 급하니 하늘의 뜻이나 사람의 일을 제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으면서 헛된 이름만 일삼으니, 이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친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골의 버려진 물건 같은 신을 불러내어, 어진 이를 찾으려 했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하시니, 이름으로는 실제상황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림의 떡으로 굶주림을 구제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청하옵건대 일의 완급과 허실을 더욱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때 임금께서는 유학에 대해 물으셨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조정에 가득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것만 논하여 조정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무너져갔다. 선생은 이 점을 깊이 생각했으므로 이런 데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무진년(1568, 선조1)에 또 교지를 내려 재촉해서 부르자, 선생은 사양하면서 봉사를 올려 말했다. 임금께서 “이 바른 말을 보니, 재주와 덕이 높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겠노라.”라는 비답을 내렸다.
제수한 관직을 바꾸어 종친부 전첨을 제수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 것이 1년이 넘었다. 신미년(1571, 선조4)에 크게 흉년이 들자 임금께서 곡식을 내렸다. 그래서 선생께서 감사하는 글을 올리고 다시 상소했던 내용을 거듭 아뢰었는데, 더욱 간절하였다.
이해 12월에 병이 났는데, 침과 약을 썼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었다. 임금님께서 환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셨는데, 그 환관이 도착하기 전에 선생께서 일생을 마치셨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 8일이었고, 향년 72세였다.
선비들이 조문하면서 우리 유학을 위해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하생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보통 사람과 다른 데다, 자신을 극복하고 다스려 오랫동안 힘쓴 결과 의리가 바탕이 되었고 믿음이 그로 인해 성취되었다. 역량은 만 길 산악처럼 우뚝 솟아나기에 충분했고, 고상한 풍채는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만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찮은 풀이나 티끌처럼 보았으나, 그렇게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바라지도 않았다. 인과 의를 가지고 살아가며 ‘내 어찌 부족해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을 가벼이 하여 쓰이기를 구하지 않았다.
반듯하고 엄격하고 맑고 고상한 성품을 지녔으나, 온화하고 수월하며 간절하게 동정하는 마음으로 보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속세와 멀리 떨어져 고상하게 살면서도, 사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생각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를 모실 때는 새벽마다 반드시 문안드리고 저녁마다 반드시 잠자리를 깔아 드렸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혹시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어버이는 늙고 집은 가난하였지만, 콩 같은 간단한 음식과 맹물로도 오히려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렸을 뿐, 녹을 받기 위해 벼슬하러 나가지 않았다.
어버이의 상례를 치를 때는 예법을 따라 어기지 않았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화목하게 지냈는데, 집에서 간직하고 있던 것은 모두 형제들에게 주어 살아가도록 하고, 자신은 터럭만큼도 차지하지 않았다. 아우 환(桓)과는 같은 담장 안에서 함께 살면서 출입할 때 같은 대문을 썼다. 늙어서도 자신에게 대를 이를 적자가 없자,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중요한 책임을 환에게 맡겼다. 다른 사람을 접할 때에는, 비록 비루한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라도 반드시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말씨로 대하여, 그 사람이 그 심정을 다 할 수 있도록 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여 칭찬하였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선도해 주었다. 서로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문제점을 감추지 않았고, 문제점을 계기로 침과 약 같은 충고를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고치게 하였다. 비록 관계가 먼 사람이라도 그 장점을 매몰시키지 않았고, 비록 친하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단점을 감싸지 않았다.
사람을 볼 때,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력과 사람의 비중을 파악하는 쌓인 공력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쉽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세상을 잊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곤궁함을 생각하여 마치 아픔이 자신에게 있는 듯이 했다. 가슴에 많은 사실을 간직하고서, 말을 하게 되면 간혹 목이 메었다가 이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벼슬을 맡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힘을 다해서 일러주어 혹시라도 시행되기를 바랐다.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옳게 여겨지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았기에 사람들 가운데는 선생을 ‘고상한 체 뻣뻣하여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자기 한 몸만 깨끗이 하여 세상을 떠나 멀리 가서 사는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일찍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달려 나가서 아뢰는 말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였고, 두 번 상소를 하여 순수한 정성을 열어 밝혔으니, 군신간의 의리를 애초에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역전(易傳)에서 “선비가 고상하게 지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시대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사람도 있고, 만족함에 그치는 도를 알아 물러나 자신을 보전하는 사람도 있고, 능력과 분수를 알아서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데서 편안히 지내는 사람도 있고, 맑은 지조를 스스로 지켜 천하의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한 몸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거짓을 행하는 폐단이 있어,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앞서서 의리를 잃고, 겉으로는 도덕을 가장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고, 시세에 따라 이름을 취하는 자들이 온 세상과 함께 휩쓸리고 있다. 마음을 파괴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잘못 인도하는 것이 어찌 홍수와 이단뿐이겠는가? 선생께서 자신을 행하고 일을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전혀 학자가 하는 것 같지 않은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속학들은 그것을 꼬투리 잡아 선생을 헐뜯었다. 이는 실로 명분만 취하고 실질을 말살시키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그 가운데는 만약 진실로 공부하는 자가 있더라도, 가짜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경우가 있다면, 마음 아파할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단지 공부하는 것이 진실하지 못할까를 걱정했을 뿐이었지, 이런 것을 어찌 걱정했겠는가?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고상하게 성명(性命)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꾸짖어 금지시키며 “공부하는 것은 애초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 공부하는 선비 가운데는, 간혹 그 부모형제에게 잘 하지 못하면서, 갑자기 천도의 오묘함을 탐구하려고 하니 이 무슨 학문이며, 무슨 습관인가?”라고 했다.
이기(李芑)가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기는 《중용》 읽기를 좋아한다 하여 그 당시에 추앙을 받았는데, 선생께 편지를 보내어 의리가 의심스러운 곳을 논의하여 왔다. 선생은 “상공(相公)께서는 제가 과거를 보기 위해 산림에 들어와 있으니, 혹 학문이 쌓여 식견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시지만, 남에게 속은 것이 이미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군요. 이 몸은 병이 많아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깃들어 단지 여생을 유지하려 할 뿐입니다. 의리에 관한 학문은 저가 강론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공손하게 사양하고 만나지 않고 피하였으니, 실로 깊은 뜻이 있었다. 이기는 결국 을사사화를 일으킨 흉악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생은 출처를 심각하게 여겨 군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고금의 인물을 널리 논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들의 출처를 본 뒤에 행실의 잘잘못을 논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근세에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출처가 의리에 맞는 사람은 내가 들은 바가 없도다. 요즈음 오직 경호(景浩)만이 옛사람에 가깝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 대해 극진히 논하려고 했으나, 결국 세세히 다 논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임금의 명에 대해 사은하러 갔을 때, 일재(一齋) 이항(李恒)도 사축(司畜)으로 부름을 받아 한양에 와 있었다. 어느 날 만나보니, 선비들이 성대하게 모여 있었고, 일재는 스승으로 자처하며 후배들과 의리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생은 술잔을 주고받을 적에 문득 그에게 장난을 걸어 “자네와 나는 모두 도둑놈일세. 이름을 도둑질하고 관작을 훔쳤는데, 감히 다른 사람을 향해서 학문을 논하는가? 어째서 자네는 소뿔을 굽히지 않으며 경건하고 신중하지 못한가?”라고 했다. 선비들 가운데 괴이하게 여겨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은 “일재가 세상의 습속에 함께 휩쓸려 엄연히 자신을 어진이로 생각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선생은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척 미워했다. 숨는 것과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반드시 때를 보고 하려고 했으며, 자신을 지켜 다른 사람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초야의 선비로 문을 단단히 닫고 지내며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을 일러 ‘천 길을 날아오르는 봉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의 군자들이 벼슬에 나가서 시대에 맞게 쓰여 좋은 일을 하려다 일은 실패하고 자신도 죽음을 당하고 사림에 화를 끼치는 것이, 사람들이 기미를 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때를 살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원풍(元豐) 시대의 대신들과 같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나라의 큰일을 맡은 사람들이 기미를 모르고 때를 살피지 않고 마음으로 화합하지 않은 채, 강하고 날카로움을 자임하여 아무렇게나 일을 하여 간혹 서로 당기고 밀며 승부를 겨루는 것이, 처음부터 정성스런 마음으로 나라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사로운 마음을 따른 것일 뿐임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일을 행할 수 있게 한다면, 큰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선생은 “나는 덕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우두머리가 되지 못하니, 어찌 일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옛날 정승을 존경하고 후배들을 장려하고, 크고 작은 어진 인재를 추천하거나 발탁하여 각자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앉아서 그들이 공을 이루는 것을 보는 정도는 내가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지금의 과거제도는 결코 폐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은 “옛날에는 선비를 선발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온 선비들은 모두가 어진 인재였다. 비유하자면 수풀을 기르면 마룻대 기둥 대들보 서까래 등의 재목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게 되니, 그루마다 베어서 큰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재목을 기르는 데 법도가 있고 취하는 데 있어서 버리는 재목이 없다면, 재목의 쓰임이 풍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제갈공명이 소열황제의 삼고초려 때문에 세상에 나와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어떤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을 두고 이르기를 “그를 작은 데다 썼다는 유감이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끝내 소열황제를 위해서 일어나지 않고 차라리 융중(隆中)에서 늙어 죽었다면, 천하 후세에 제갈공명이 한 일이 있은 줄을 알지도 못했겠지만, 안 될 것도 없다.”라고 하셨다. 옛날 사람들을 논하면서 이전 사람의 말에 구애되지 않고 한 가닥 새로운 의미를 다시 캐는 것이 때때로 이러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이러했다. 선생은 25세 때 친구들과 함께 산 속의 절에서 학업을 익혔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이윤(伊尹)이 뜻 둔 바에 뜻을 두고, 안연(顔淵)이 배운 바를 배워, 벼슬에 나가서는 하는 일이 있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있어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하는 바가 없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없다면, 뜻 둔 바와 배운 바를 가지고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말에 이르자, 옛날에 했던 자신의 학문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등에 땀이 났고 정신이 멍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새도록 잠자리에 눕지 않고 있다가 동이 트려 하자 친구들에게 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확실히 두고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 다시는 속된 학문에 뜻이 꺾이지 않았다. 얽매이지 않고 날아오르려는 기질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묵묵히 있을 때 다시는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스스로는 아직 옛날 것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겼다. 글을 읽을 때는 일찍이 단락이나 구절로 해석한 적이 없었고, 때로는 한꺼번에 열 줄씩 읽어 내려가다가 자신에게 절실한 내용에 이르면 그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넘어갔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화(和), 항(恒), 직(直), 방(方)을 네 글자의 부절로 삼았고, 격물치지를 으뜸가는 공부로 삼았다. 경(敬)으로써 마음과 호흡을 서로 돌아보며, 기미로써 은미한 움직임을 살피고 알아서, 하나에 집중하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법으로 삼았다. 〈금인명(金人銘)〉을 짓고 ‘색태(塞兌)’자를 써두어 말을 조심하는 경계로 삼았는데, 모두 표제로 삼아서 생각을 거기에 두었다. 항상 쇠방울을 차고 다니며 이름을 성성자라 불렀으니, 자신을 일깨우려는 공부였다. 선성 공자와 선현들의 초상을 그려 때때로 책상 위에 펼쳐 두고 용모를 엄숙하게 하며 마주했다.
늘 가죽 띠를 매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명을 썼다.
혀는 새는 것이고 / 舌者泄
가죽은 묶는 것이라네 / 革者結
살아있는 용을 묶어 / 縳生龍
깊은 곳에 감추어 두리라 / 藏漠沖
보검을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였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 일을 결단하는 것은 의리라네.”라는 명(銘)을 썼다.
일찍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린 다음 명을 지어 넣었다. 안으로는 마음을 잡아 함양하는 실체를 나타내었고, 밖으로는 살펴서 사욕을 이겨 다스리는 공부를 밝혔다. 안팎이 구분이 없는 본체와,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 서로 기르는 이치가 그림을 살펴보면 분명하여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스스로 터득하여 손수 그린 것이다. 선유가 논한 천도, 천명, 심, 성정, 이기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차례와 더불어, 덕에 들어가는 노선을 손수 그림으로 그린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모두가 아주 분명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늘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근사록》 등의 책을 연역하여 그 근본을 배양하고 그 뜻을 넓혔으며, 그 가운데서 더욱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에 나아가 다시 그 의미를 맛보았다. 그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는데, 구차하게 널리 풍부하게 아는 것처럼 해서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한 적이 없었고 문득 강설을 행하여 바깥사람의 논의를 야기한 적도 없었다. 이것은 선생께서 착실하게 요점을 따랐기 때문이다. 맨 나중에는 특별히 ‘경’과 ‘의’ 두 글자를 들어 창과 벽 사이에 크게 썼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만고의 오랜 세월을 통해서도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현의 천 마디 만 마디의 말도 그 귀결처를 요약해보면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학문은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그저 책에만 의지하여 의리를 강론해서 밝히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는 사람은 결국 받아들여 쓰일 수가 없다.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라도 입으로 말하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배우는 사람은 말 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대개 선생은 이미 경서와 그 주석을 널리 탐구하였고 제자백가에 두루 통하였으며, 그런 뒤에 번잡한 것을 수렴하고 간명한 데로 나아가며 자기 몸에 돌이켜 요점을 실천하여, 스스로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일찍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공부할 때는 먼저 지식과 식견을 높고 밝게 해야 한다. 태산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다 낮아지게 되는 것과 같은 뒤에야 내가 행하는 바가 순조롭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대도시의 큰 시장에서 마음껏 노닐다 보면, 금, 은, 보배, 노리개 등 없는 것이 없지만, 하루 종일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값을 이야기해 봤자 결국 자기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내 베 한 필을 가지고 가서 생선 한 마리 사오는 것만 못하다. 지금 배우는 사람들이 성리학에 대해서는 고상하게 이야기하면서 자기에게 얻는 것이 없는 것이 이와 어찌 다르겠는가?”라고 하셨다.
또 “밤중에 공부가 많이 되니, 잠을 많이 자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평소에 거처하면서 처자가 나와 섞여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자질이 아름다워도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이 모두가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그 자품을 보고 거기에 맞추어서 격려하려 했고, 바로 책을 펴서 강론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예부터 전해오는 성인들의 정미한 말과 오묘한 뜻 가운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주염계(周濂溪), 정자(程子), 장횡거(張橫渠), 주자(朱子) 등이 서로 계승하여 남김없이 밝혀 놓았다. 배우는 사람들은 알기 어려울까 걱정할 것 없고, 단지 자신을 위한 공부가 되지 않을까를 걱정하면 될 따름이다. 단지 수면상태를 깨게 하기만 하면 된다. 깨달은 뒤에는 하늘과 땅 해와 달을 장차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책을 지은 적은 없고, 단지 글을 읽을 때 중요한 말을 적어 모은 것이 있는데, 이름을 《학기(學記)》라고 했다.
선생은 기상이 맑고 높았으며 두 눈은 밝게 빛나 바라보면 속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이 뛰어나 마치 우레가 울고 바람이 일어나듯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이욕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러했다.
편안히 지낼 때는 종일토록 꼿꼿하게 앉아 계셨으며, 게으른 모습을 한 적이 없었다. 귀한 손님을 대할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신분이 낮거나 어린애들을 대할 때도 태만하지 않았는데, 연세가 일흔이 넘어서도 늘 한결같았으니 그 자연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삼가현의 선대 살림살이는 아주 궁핍하여 혹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가족들이 거친 음식도 잇지를 못했지만 선생은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산속에서 산 뒤로 화전에서 거둔 것 덕분에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선생은 화락하여 늘 아주 풍부한 듯이 여겼다.
병에 걸렸을 때는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여러 번 했지만, 죽고 사는 것 때문에 생각이 조금도 어지러워진 적이 없었다. 의리상 부녀자 앞에서 죽을 수가 없어 부실(副室)로 하여금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병이 조금 낫게 되었을 적에 ‘경’과 ‘의’자에 대해 문생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를 “이 두 글자는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니,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공부가 푹 익도록 해야 한다. 푹 익으면 한 가지도 가슴 속에 걸리지 않는데, 나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라고 했다. 평생 간직한 마음을 여기서 더욱 증명할 수 있다.
아아! 한 쪽에 치우쳐 있고 문명이 없는 나라가 말세가 되어 도학(道學)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선생은 우뚝하게 떨쳐 일어나, 스승이 전해주는 것에 말미암지 않고 능히 스스로 학문을 이루어 높게 뛰어나고 홀로 나아갔으니, 이런 것에 능한 사람이 드문 지 오래 되었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한다고 아첨하는 말이 아니다.
이 해(1572, 선조5) 겨울에 두류산에 상고대가 생겨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돌아가실까 근심하였는데, 선생께서 과연 병을 얻어 낫지 않았다. 숨을 거두는 날에는 매서운 바람과 폭우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충순위 조수(曺琇)의 따님 남평 조씨와 결혼했으나,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차산(次山)은 풍골이 범상치 않았으나 9세 때 일찍 죽었다.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딸 둘을 낳았는데, 장녀는 권지 승문원 부정자 김우옹(金宇顒)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에게 시집갔다.
부실이 삼남일녀를 낳았는데, 차석(次石)은 부사 김수생(金水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차마(次磨)는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며 차정(次矴)과 딸은 모두 어리다. 4월 6일에 산천재 뒤쪽 임좌 병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융경 6년(1572, 선조5) 윤2월일에 문인 생원 정인홍은 삼가 행장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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