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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 De profeet Obadja. Waterverf schilderij ca. 1888. *티소(James(-Joseph-Jacques) Tissot) (요약)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에나멜 세공인. 출생: 1836 / 사망 : 1902 / 국적: 프랑스 후기 빅토리아조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로 유명하다. 종교교육을 받은 뒤 19세 때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1859년 살롱전(프랑스 정부가 후원하는 공식 미술전람회)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초기에는 다소 고뇌에 찬 작품을 그렸으나 그뒤 세련된 풍속화와 초상화로 전향하면서 파리의 미술계에서 급속히 성공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참가한 뒤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가 그 직후(1871. 5)에 런던으로 도피했다. 런던의 세인트존스우드에 살면서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림 외에도 에칭·드라이포인트·메조틴트 등의 동판화들을 많이 제작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칠보 세공에도 관심을 보였다. 때때로 외국여행을 하기도 했지만, 1882년 11월 아일랜드 태생의 애인이 죽을 때까지 계속 런던에서 살았다. 파리로 돌아가 예전의 인기를 되찾으려고 한동안 노력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1885년 신비한 신앙적 체험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를 삽화로 그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차례 성지를 순례했다.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350여 점의 수채화를 그려 2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소묘들을 그리던 도중에 죽었다. |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혹시 도둑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만족할 만큼 훔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탈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빼앗겼는고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내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내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이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혔던 자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네겝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오바댜 1장 1절 -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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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디야(Book of Obadiah)
(요약) 유대교 정경에서 하나의 책으로 취급하는 12권의 소예언서 가운데 4번째 책.
Abdias라고도 씀.
'오바디야가 본 환상'을 기록했다고 하며, 21절의 1장만으로 이루어져 〈구약성서〉에서 가장 짧다. '야훼의 종'을 뜻하는 '오바디야'라는 이름 외에 이 예언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이 책에서 오랜 동안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던 에돔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이방인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다.
많은 학자들은 그러한 서술로 미루어 이 책은 BC 586년 바빌론 포로 이후에 씌어졌다고 주장했으나, 어떤 학자들은 〈열왕기 하〉 8장 20~22절에 나오는 에돔에 대한 적대감정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BC 9세기초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모든 민족에 대한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선언하며, 그날에는 모든 악은 심판을 받고, 의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향땅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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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돔(Edom)
(요약) 고대 이스라엘과 경계를 이루는 고대 지역.
사해와 아카바 만 사이의 요르단 남서부 지역이다. 에돔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은 대략 BC 13세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인들과 가까운 혈족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성서에 따르면 이들은 에사오의 후예들이라고 함) 이들은 이스라엘인들과 빈번하게 충돌했으며 이스라엘 왕국(BC 11~10세기) 때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돔은 아라비아와 지중해 간 무역로상에 위치하는 전략적 이점과 에지온게베르에서의 구리 산업으로 번영을 누렸다. 나중에 나바테아인들에게 에돔과 모아브가 점령당하자 에돔인들은 남부 유다로 옮겨갔다. 이곳에 살던 그들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두매인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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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칼립스(Apocalypse묵시, 默示)
아포칼립스는 신약 성경 마지막 권인 요한묵시룩의 영어 명칭이다. 요한묵시룩이 전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내용과 맞물려 아포칼립스는 ‘세계의 멸망’ 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그에 준하는 대재앙이나 재난을 일컫기도 한다. 아포칼립스는 그리스어인 아포칼뤼프시스를 그대로 영어화한 것이며 아포칼뤼프시스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묵시(黙示), 계시(啓示)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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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칼립스(Apocalypse, 묵시, 默示)
1. 개요
신이 계시를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는 묵시(默示)를 뜻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유래한 말로, 현대에는 ‘종말, 대참사’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어원은 ‘공개, 계시, 폭로’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다.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떼다, 덮개를 걷다’라는 뜻으로 가려두었던 것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신이 특별한 사람(예언자)을 통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인류의 운명과 세계의 종말, 신의 목적, 새로운 세상의 도래 등을 계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2. 고대 신화에서의 종말
인간 사회의 종말에 대한 서사는 고대에서부터 있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신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신이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한 인간인 노아는 신의 명령에 따라 미리 방주를 만들어 가족들과 짐승들을 태워 살아남는다. 대홍수로 인한 문명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는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신화에 등장하고 있다.
다니엘 맥리즈 《노아의 번제》(Noah's sacrifice, 1847~1853) | 에드워드 힉스 《노아의 방주》(Noahs Ark, 1846) |
3. 묵시문학
인간이 신의 계시를 받아 숨겨진 진실이나 미래를 기록한 책을 묵시문학(계시문학)이라고 한다. 특히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경에 걸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융성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대표적이다. 《요한 묵시록》의 경우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현실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보존하고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 저항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묵시문학은 신에 의한 계시(啓示), 환상, 신비적 요소, 상징주의, 미래에 대한 관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신의 목적과 세상의 원리, 천사나 악마 등의 특징, 천지창조, 인류 역사와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표현한다. 대부분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멸망과 마지막 심판, 인류의 운명, 구원자의 재림, 선택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미래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도래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스 부르크마이어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 복음사가》(St John the Evangelist in Patmos, 1518) 신의 계시를 받는 성 요한 복음사가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천사와 일곱 나팔 11세기 독일 라이헤나우 수도원에서 제작한 〈밤베르크 묵시록(Bamberger Apokalypse)〉의 삽화. 《요한 묵시록》에서는 일곱 천사가 차례로 나팔을 불 때마다 재앙과 기적이 일어난다. | 빅토르 바스네초프 《묵시록의 네 기사》(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1887) |
4. 대중문화에서의 활용
1) 포스트 아포칼립스
현대 대중문화에서 아포칼립스는 세계 멸망이나 대참사를 뜻한다. 대규모 전쟁(핵전쟁)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기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문명이 멸망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아포칼립스로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상은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라 한다.
아포칼립스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장르를 종말물(終末物)이라 한다. 각각 아포칼립틱 픽션(Apocalyptic fiction), 포스트 아포칼립틱 픽션(Post-apocalyptic fiction)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둘 다 일반적으로 SF의 하위 장르로 여겨지지만, 다양한 소설과 영화, 만화, 게임 등에서 아포칼립스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더 로드(The Road, 2009)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지구적 재난이 일어난 뒤의 세상(포스트 아포칼립스)을 배경으로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2) 종말물의 등장
종말을 소재로 한 현대적인 소설은 19세기에 등장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1826)에서는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미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20세기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아포칼립스 소설은 본격적으로 대중화했다. 주로 공상과학소설(SF)이나 과학 판타지(Science fantasy), 공포 소설(Horror fiction) 등에서 즐겨 사용했다. 현대에도 소설뿐 아니라 만화와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2008)
모든 사람이 시각을 상실하는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3) 종말의 원인: 두려움의 반영
아포칼립스 픽션은 실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반영한다. 이야기 속 종말의 원인도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관련이 있다. 주로 등장하는 원인은 기후변화, 운석 충돌 등의 자연재해와 핵전쟁, 전염병 등의 인공적 원인, 좀비의 창궐이나 외계인 침공 등이 있다. 많은 작품이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측면과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2015)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22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에게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5. 관련도서
나는 전설이다. 황금가지 | 종말문학걸작선 1 황금가지 | 종말문학걸작선2 황금가지 | 아키라(AKIRA) 1 세미콜론 그래픽 노블 세미콜론 | 눈먼자들의 도시 해냄출판사 |
로드 문학동네(주) | 세계대전 Z 황금가지 | 최후의 인간 1 아고라 | 최후의 인간 2 아고라 |
6. 관련영화
메드멕스 2(로드 워리어) Mad Max 2: The Road Warrior | 메드멕스 3 Mad Max : Beyond Thunderdome |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 그날이후 The Day After | 12 몽키스 Twelve Monkeys |
매트릭스 The Matrix | 매트릭스 2 리로디드 The Matrix Reloaded | 매트릭스 3 레볼루션 The Matrix Revolutions | 아키라 Akira | 28일후... 28 Days Later... |
랜드오브데드 Land of the Dead | 더로드 The Road | 눈먼자들의 도시 Blindness | 멜랑콜리아 Melancholia | 디즈파이널아워스 These Final Hours |
월드 Z World War Z | 설국열차 Snowpiercer |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 칠드런오브맨 Children of M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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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 , 默示文學)
(요약) BC 200~AD 200년경에 걸쳐 특히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융성했던 문학 장르.
묵시록('묵시'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apokalypsis에서 유래한 단어)은 1차적으로 핍박을 당하고 있거나 문화적 대변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종교집단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씌어졌기 때문에, 신실한 선민(選民)을 위해 하느님이 불시에 인간의 역사 속으로 임하는 극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인간사에 하느님이 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수반되는 사건들 또는 그것을 예고하는 사건들은 우주적 규모의 대격변들로서, 예를 들어 사탄이 잠시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것, 하늘의 징조들, 핍박, 전쟁, 기근, 전염병 같은 것들이다.
묵시문학의 저자들도 당대의 현상들을 관찰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박해가 과거 묵시적인 예언들이 성취되는 사건들인가의 여부를 결정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은 미래의 일, 즉 미래에 악이 정복당하고 메시아적인 인물이 임하실 것, 그리고 영원한 평강과 의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에 대한 것이었다. 악한 자들은 지옥에 떨어지고 의인 또는 선민들은 새로운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 또는 메시아와 함께 다스린다고 묵시문학은 묘사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은 묵시문학을 대표하며, 신·구약 중간기의 책들도 묵시적 주제들을 담고 있다. 묵시적 주제들은 현대문학에서도 다루어지며 특히 공상과학소설에서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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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시사상(apocalypticism , 默示思想)
(요약) 비밀의 계시에 관한 여러 가지 종말론적 견해(말세관)와 운동.
급박하고 극적이며 파국적인 하느님의 역사 개입, 만인의 심판, 신실한 선민의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통치한다는 등에 초점을 맞춘다. BC 6세기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이란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묵시사상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종말론적 사상과 운동에서 더 풍성하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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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론(Eschatology , 終末論)
‘종말론’의 기본적인 의미는 영어 ‘에스커톨로지(eschatolog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는 ‘마지막’을 의미하는 에스커토스(eschatos)와 ‘가르침’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로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종말론은 인간 존재의 그릇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하나의 시각이다.
인간은 기원전 1만 년경 사냥 · 채집 경제에서 농업 · 정착 경제로 전환하면서 시 · 공간에 대한 시각이 다변화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도시와 문자를 만들면서 문명생활이 시작되었고, 도시 정착민들은 농경 순환주기에 맞추어 시간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환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순환적인 반복을 기준으로 삶의 형태를 고정시키고 소위 절기를 만들어 안정적인 순환을 기원하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루었던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오리엔트(Orient)는 순환적 시간관을 기초로 문명을 구축하였다. 순환적 역사관은 기원전 12세기경 오리엔트, 특히 고대 이란에 등장한 인도-유럽인들의 한 분파인 인도-이란인들의 역사관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인도-이란인들은 세상은 태초부터 선신과 악신의 끝없는 투쟁이며, 이 투쟁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한다고 생각했다. 종말은 시간과 공간이 멈춘 비역사적인 순간이다. 역사는 실제 사건이 발생하는 ‘시대’로 구분된다. 그 ‘시대’가 끝나면 어떤 현실이나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시대’로 대치되는데, 이 중간 과정을 ‘종말’이라 한다. 종말은 순환적인 시간이 아니라 선형적인 ‘시간’으로, 그 시간엔 ‘끝’이 있으며, 모든 인간은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심판받게 된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종종 종말론적인 담론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종말’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의 끝’이자 동시에 ‘새로운 세계’이며, 새로운 삶과 사상, 그리고 존재방식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위기는 역사에서 신의 개입, 전쟁, 환경의 변화 혹은 새로운 인간의식으로 진입과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종말론은 순환적인 역사관을 지탱하려는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세기 그리스도교의 탄생 시기, 15~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 시기, 16~17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 17~18세기 러시아 혁명 시기에 등장한 역사관이다.
종말론은 현대에도 사회 · 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때 종종 드러난다. 대부분 현대 종말론은 현존하는 세계의 단절과 파괴를 의미하지만, 셈족이 상상한 종말론은 신의 개입으로 선형적인 시간이 멈추게 됨을 의미한다.
후에 등장하는 조로아스터교와 아브라함(Abraham) 종교의 종말사상의 연원은 고대 이집트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후 신체의 보존을 중요하게 인식했다. 원래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사막에 묻어 자연적으로 시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왕조시대부터 귀족들은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정교한 방부처리를 통해 시신을 인공적으로 말리고 천으로 둘러 관에 보관하였다.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장례 문헌으로서 기원전 1550년부터 등장한다. 이 문헌은 죽은 자가 ‘두아트(Duat)’라는 지하세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사후세계로 인도되는 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의 서』는 초기의 『피라미드 문헌』과 후대의 『관(장례) 문헌』의 일부로, 이 주문들은 무덤 벽이나 관에 기록되었다. 『사자의 서』는 대부분 돌에 새긴 성각문자나 사제들이 파피루스(papyrus)에 기록한 사제문자로 기록했지만, 종종 죽은 자가 지하세계의 여러 관문을 거치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사자의 서』의 주문을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사후세계의 본질을 추론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장례의식은 인간 존재의 여러 요소들을 다시 모으며, 시체 방부처리를 통해 육체를 보존하여 신적인 특징을 지닌 이상적인 형태로 전환시킨다고 생각했다. 『사자의 서』는 죽은 이의 시신을 보전하기 위해 사제가 시체 방부처리를 할 때 낭송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의 지력과 기억력을 보관하고 있는 ‘심장’인 ‘입’을 특히 잘 보존하였다.
실제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심장 모양을 한 보석을 대신 묻었다. 인간의 ‘영혼’인 ‘카(ka)’는 시신과 함께 무덤에 있어, 후손이나 제사장이 지내는 제삿상의 음식, 물, 그리고 분향으로 생명을 유지한다고 생각되었다. 죽은 자의 ‘이름’[이집트어 ‘렌(ren)’]은 그 사람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해야 할 의무이자 개성이기에, 죽은 자는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인상’을 ‘바(ba)’라고 하며, ‘바’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한 새 모양을 하고 낮 동안에 무덤에서 나와 세상으로 날아다닌다.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그림자를 의미하는 ‘슈트’도 보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잘 보존하고 심판을 통과하면, 그는 신들 가운데 영원히 사는 ‘앙크(ankh)’가 된다.
지하세계인 ‘두아트’를 적절한 주문을 외워 통과하면, 죽은 자의 ‘심장’을 천칭(天秤)에 다는 의식을 거행한다. 죽은 자는 시체 방부처리 신인 아누비스(Anubis)에 이끌려 지하세계의 신 오시리스(Osiris) 앞으로 간다. 그는 이 신 앞에서 ‘42가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맹세를 한다. 그런 후 죽은 자의 심장은 진리와 정의의 여신을 상징하는 타조 깃털 ‘마트(Maat)’와 함께 천칭에 올려져 무게를 잰다. ‘마트’는 죽은 자가 사는 동안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다. 만일 죽은 자의 심장 쪽으로 천칭이 기울어졌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암무트(Ammut)라는 괴물에게 먹히고 만다. 옆에는 죽은 자가 생전에 한 일을 모두 기록한 생명의 책을 들고 있는 토트(Thoth) 신이 있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만일 천칭의 양쪽 무게가 같다면, 그는 오시리스 신의 인정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이 장면은 사람의 심판과 사후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설명한 최초의 기록이다. 특히 죽은 자는 심판을 받기 전에 42가지 ‘부정의 고백’을 한다. 부정의 고백이란 살아 있는 동안 악행을 하지 않았다는 맹세이다. 이 부정의 고백은 후대 유대-그리스도교의 십계명에 영향을 미쳤다. 살아 있는 동안의 윤리적 · 도덕적 삶이 영생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명제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모든 개인이 반드시 심판을 받으며, 지상의 삶의 질에 따라 영생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개인의 심판 사상은 후대에 등장하는 집단 전체, 인류 전체의 심판 사상의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말론에 관한 가장 선명한 글을 남겨 후대 아브라함 전통들, 즉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종말론 형성의 근간을 마련해준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문헌 중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라는 용어는 아베스타(Avestā)어로, 모든 악을 제거하고 만물이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교리를 지칭한다.
조로아스터 문헌은 인류의 시기를 3000년, 6000년, 9000년, 그리고 12000년으로 구분한다. 12,000년 후에 인류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분다히슨(Bundahishn)』이라는 조로아스터 경전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0~3000)는 아후라 마즈다의 우주창조의 완벽한 상태인 ‘메녹(menok)’이 유지된 이상적인 시간이다. 첫 3,000년 동안 어떤 움직임이나 생각 혹은 물질도 없었다. 시간은 정오에 고정되어 있고 평화와 고요만이 있었다. 그 가운데 어둠의 심연에서 아리만(Ahriman)이 등장한다. 아리만은 악과 거짓의 상징이다. 아리만은 빛을 보고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한 빛의 세계를 본다. 아리만은 이 빛의 세계를 공격하지만, 아후라 마즈다는 아리만을 물리치고 다시 암흑의 심연으로 몰아내 나오지 못하게 한다. 아리만은 그 안에서 많은 악마들과 죽음을 관장하는 혼들을 만들어 전쟁을 하려 한다. 아후라 마즈다는 아리만과 계약을 맺어, 이 두 신들 간의 우주적 전쟁은 9000년 후에 하기로 정한다.
두 번째 시기(3000~6000)는 정신적인 상태인 ‘메녹’이 물질적인 시기인 ‘게틱(getik)’으로 전환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 아리만은 무력하게 심연에 감금되어 있다. 아후라 마즈다는 1년 안에 우주를 창조한다. 그는 하늘, 물, 땅, 식물, 이로운 동물들, 그리고 불을 창조한다. 특히 불은 어둠의 신인 아리만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세 번째 시기(6000~9000)는 소위 ‘혼동’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구메치슨(Gumezishn)’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아리만과 악마들이 심연에서 탈출하여 아후라 마즈다와 그가 만든 우주를 공격하는 시기이다. 처음에는 인류의 시조인 이마(Yima)가 등장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악의 세력들이 공격한다.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아지 다하카’라는 악마가 지배한다.
마지막 시기(9000~12000)는 ‘분리’의 시기로, 아후라 마즈다는 조로아스터에 자신의 뜻을 계시한다. 『분다히슨』에 의하면, 조로아스터의 정자가 동부 이란의 세이스탄(Seistan)에 위치한 카사오야(Kasaoya) 호수에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상의 처녀들이 이곳에서 정결의식을 치르고 임신하여 3명의 구원자를 낳는다. 3명의 구원자는 각각 1,000년 후에 태어나 종말신앙을 선포한다. 이 3명의 구원자 중 첫째가 우쉐다르(Usherdar)이다. 그는 조로아스터의 계시를 갱신히고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 그 후에 둘째 우쉐다르마흐(Usherdarmah)가 황금시대를 열며, 셋째 구원자 아스바테레타(Ashvat-Ereta)가 모든 질병과 죽음에서 인류를 구원하여 아후라 마즈다의 천상의 시대를 시작한다.
조로아스터는 종말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건널 ‘분리(심판)의 다리’인 ‘친바트 페레투(Chinvat Peretu)’에서 모든 인간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아베스타 문헌인 『야스나(Yasna)』에서 “남자나 여자나, 네가 누구든지, 오, 아후라 마즈다시여, 그대들은 인생에 있어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옳음’을 위해 의를 행하는 자마다, ‘바른 마음’의 도움으로 행하는 자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하기 위해 모두를 불러 모으고, 나는 그들과 함께 ‘심판의 다리’를 건널 것이다.”(야스나 46: 10)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의 다리’에 서서, 진실한 자들의 옳음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악한 영혼은 의로운 자들의 길을 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악한 행동, 자신의 악한 혀의 말들은 자신의 족쇄가 되며, 그는 무서워 떨고 그가 잘못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야스나 51: 13)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특히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벤디다드(Vendidad)』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후라 마즈다가 대답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시간이 다하면, 사악하고 악행하는 다에바(Daeva, 악마)는 그의 시력을 없앤다. 세 번째 날에 동이 트고 해가 오르면, 웅장한 무기를 가진 신인 미트라(Mithra) 신이 항상 즐거운 산에 도달한다. 그리고 해가 떠오른다. 그때 아자레샤라는 악마가, 오 스피타마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여! 죄 안에 살고 있었던 악한 다에바 숭배자들의 영혼을 묶어 끌고 간다. 영혼은 시간이 만든 길로 들어간다. 그 길은 악한 자와 의로운 자에게 열려 있다. 친바트 다리의 꼭대기에 마즈다가 만든 거룩한 다리가 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영혼과 정신을 위해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다리에서, 만일 그 영혼이 의로우면 그 다리는 점점 넓어지고, 영혼이 악하면 그 다리의 끝은 면도날처럼 얇아져 추락한다.”
모든 사람의 행동은 미트라(Mithra), 스라오샤(Sraosha), 그리고 라슈누(Rashnu) 신 앞에서 머리카락의 무게도 잴 수 있는 정교한 천칭으로 심판받는다. 만일 그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 그는 구원을 받는다. 죽은 지 3일 만에 그는 자신의 인격화된 양심인 ‘다에나(Daena)’를 만난다. 『덴카르드(Denkard)』9.19에 의하면, 만일 그가 의로우면 다에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나, 그가 악하면 못생긴 할머니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여인 다에나는 『하도크트 나스크(Hadokht Nask)』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의 양심이 아름답고, 빛이 나며, 하얀 팔을 가진, 건강하고, 얼굴이 예쁘며, 허리가 꼿꼿하고, 가슴은 올려 있고, 우아하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가문이며, 보기에는 15세 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의로운 자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아베스타에서 아후라 마즈다의 집이나 ‘보후마나’의 집으로 묘사한다. 그곳은 덥지도 춥지도 않고, 눈이나 비가 없으며, 걱정이나 고생이 없고, 눈물과 고통도 없고, 어둠과 병과 늙음과 죽음이 없는 곳이며, 노동과 부족함이 알려지지 않는 곳이다. 후대 『팔라비 루바이야트(Pahlavi Rubaiyat)』에서는 “출산을 알지 못하는 성적인 만족이 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악한 자들이 거주하는 운명은 다음과 같다. “지속적인 어둠, 나쁜 음식, 울음이 있는 장소로, 너의 행동에 따라 너의 양심이 너를 인도할 것이다.”(야스나 31: 20) 그곳에서 그때 심판자들은 그에게 독, 뱀, 전갈, 그리고 악어를 데리고 온다. 그들은 또한 그에게 썩은 음식을 가져온다.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룬 사람들은 지구와 별들 가운데 위치한 하메스타간에 거주한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추위와 더위의 고통을 느낀다.
유대교 종말론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달라진 역사적 상황을 창조적으로 풀기 위한 장치였다. 기원전 6~4세기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과 함께 종말론 사상을 받아들인다. 특히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대왕이 강요한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유대인들은 이전의 순환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선형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게 된다. 유대교의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메시아(Messiah)’로,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왕이나 대제사장이 즉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었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메시아였다.
이 용어가 기원전 6세기 고대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Babylonia)로부터 침입당해 나라를 잃게 되자, 이전에는 찾을 수 없던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강압적인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고, 그 가운데 암울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종말론이 대두되었다. 미래에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은 그 당시 신의 정의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혹은 현재의 재앙이 자신들의 과거의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였다.
현재의 상태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기록은 문헌 기록자마다 그 표현방식이 다르다. 초기 유대교 문헌들은 유대인들을 지탱하고 있던 주요한 사회 · 정치 · 종교 기관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B.C. 586년) 이후 파괴되는 모습을 기록한다. 후대 문헌은 다윗(David) 왕가의 통치자의 부재와 예배 의식의 중단, 그리고 디아스포라(Diaspora) 상황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설상가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와 이교도적인 문화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기원전 6세기 예언자들은 종말론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역사가 급진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중단되어, 자신들이 유배와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돌아와 다윗 왕가를 다시 건립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의례를 다시 행할 것을 꿈꾸었다. 심판의 날이 오면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회개한다면 새로운 이스라엘이 건립될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믿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 로마 제국의 정책 아래서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것이 그들의 종말 사상이다.
기원전 6세기 예언자들은 미래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새로운 시간은 최초의 시작과 일치한다. 이들은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계약을 강조하는데, 특히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Isaiah書)」는 새로운 창조를 강조한다. 우주가 처음 창조될 때의 순서처럼, 심판과 새로운 창조가 「제1 에녹서」와 「이사야서」 24~27장의 내용이다.
새로운 시작은 현재 질서의 종말이다. 새로운 시작은 현재와의 현격한 차이, 분리를 의미한다. 새로운 시대는 악의 세력이 영원히 사라지고 우주를 창조했던 그 신이 다시 등장하여 영원히 다스린다. 새로운 창조는 과거의 창조 시간을 넘어서는 강력한 마지막 창조 사건이며, 이 창조는 또한 ‘이원론적 종말론’에 기초한다. ‘이원론적 종말론’이란 첫 창조 사건과 비교하여 훨씬 더 강력한 선-악, 천사-악마, 질서-혼돈 간의 대결을 기반으로 세상의 마지막과 시작을 묘사한다. 영생이란 새로 창조된 세상에서 불멸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개인의 영혼이나 정신은 영원히 지상으로부터 천상으로 올라가, 저주의 장소가 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세계에 거주한다.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 예레미야(Jeremiah)나 에스겔(Ezekiel)은 예언들이 성취되는 특별한 시간에 대한 말한다. 제2 이사야는 구원의 시대는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제3 이사야, 학개(Haggai), 그리고 스가랴(Zechariah)와 같은 예언자들은 신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할 것이라고 믿었다. 신의 개입과 종말이 일어나지 않게 되자, 그리스 · 로마 시대 저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신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신의 계획은 우주창조 이전에 운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묵시문학적(默示文學的)인 시각은, 지상의 모든 사건들은 천상의 토판문서에 만세전에 기록되었다는 에녹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각은 1세기 유대교의 한 분파인 쿰란(Qumran) 공동체의 지배적인 사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의로운 자들의 기도와 토라(tôrāh)의 올바른 이해, 그리고 순교를 통해 종말을 앞당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 로마 세계 안에서 등장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하였다. 초기 그리스 사상 안에서 종말은 종교나 신화적인 사변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관심 분야였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가 연소되고 재생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연소’를 통해 세상이 끝난다고 주장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몇 번의 순환을 거쳐, 결국에는 정결한 불로 남는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는 황금시대에 트로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적인 순환은 ‘처음’과 ‘마지막’과 ‘주요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영원성을 주장하였지만, 인간의 문명들은 정기적으로 자연에 의해 파괴되며 재생한다고 생각했다. 헤시오도스(Hesiodos)와 플라톤에게 과거 시대의 구분은 중요하다.
이런 구분은 유대인 사상에 영향을 끼쳐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Daniel書)」 7~9장에 역사적이 구분이 묘사되었다. 초기 로마시대에 평화로운 시대가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책 『아이네이스(Aeneis)』에서 ‘황금시대’를 위대한 통치자와 연결했다. “여기에 너희가 종종 소문으로 들었던 예정된 사람이 있다. 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이다. 그는 라티움(Latium)에서 황금시대를 열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중요한 신이었던 아이온(Aion) 신을 받아들였다. 아이온 신은 우주와 무한의 신으로서 황금시대를 가져다 줄 신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불멸은 신들만의 특징이었으며, 동시에 인간 영혼의 특징이기도 했다. 헬레니즘식 영혼관이 초기 유대교 문헌에 영향을 끼쳤지만, 유대교는 불멸이란 종말에 부활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추할 수 있다. 예수가 자신을 종말론적인 인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그를 종말에 등장한 메시아로 보았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에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다.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선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론과 현저하게 달라 마찰을 빚었다. 신약성서 중 복음서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나,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 ‘나라’라고 해석되는 용어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번역보다는 ‘하느님의 통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가깝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유대교에서 신이 곧 활동을 계시(啓示)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예수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전달하는 자로 묘사된다.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는 구절들도 등장한다. 서로 상충되는 내용 같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의 도래로 시작되었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수의 이런 종말론적인 생각이 독특한 것은 아니다. 같은 시대 문헌인 쿰란 사본에서도 임박한 종말론을 선포한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았다. 예수는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메시아의 범주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세웠던 바울(Paul)은 예수를 지칭하여,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크리스토스’라고 불렀다. ‘크리스토스’는 예수의 이름이 되었다. 바울에겐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라는 용어만큼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긴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이다. 이 명칭은 예수가 자신을 스스로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 ‘사람의 아들’이란 명칭은 복음서에만 주로 등장하다.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이 용어는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종말론적인 용어이다.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는 말하는 사람을 낮추는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는 분명 천상의 구원자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관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묵시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데살로니카 전서(Thessalonica 前書)」 1장 9~10절에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어떠한 영접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을 섬기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 곧 장차 닥쳐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퍼뜨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유대교의 이원론적 종말론을 받아들였다. 시간적인 이원론, 즉 ‘이 세대’와 ‘다가올 세대’는 공간적인 이원론, 즉 ‘이 세상’, ‘저 세상’과 일치한다. 바울이 유대교의 이원론적 종말론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로 이미 미래의 저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수의 부활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의로운 자들이 부활할 첫 신호라고 믿었다. 유대 종말론의 엄격한 구분이 예수 사건을 통해 무마되거나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 부활과 종말 사이의 ‘파루시아(parousia)’ 안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바울은 ‘주의 날’이라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대치하여 유대교의 신 중심 종말론을 예수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가톨릭은 특히 종말론에 대한 정교한 교리를 만들었다. 가톨릭에서는 모든 사람은 사망한 후 바로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다. 신앙을 가진 자 중에서 정화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연옥(煉獄)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천국은 신의 은총을 받은 거듭난 사람들이 들어가 영원히 거주하는 곳이며, 지옥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를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나 종말의 날이 오면 예수가 영광 중에 오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하늘로 올라가 예수를 만나고,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
가톨릭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은 대림절(advent)이라는 절기를 1년에 한 달씩 마련하여 종말의 시간을 간접 경험하고 예수가 다시 오심을 묵상한다. 종말은 개인의 죽음, 심판, 천국, 연옥과 지옥으로 들어감, 세상의 마지막, 살아 있는 자들의 휴거, 육체의 부활, 예수의 파루시아, 그리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사망한 후, 불멸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고 믿는다. 인간의 원죄로 육체는 땅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성서에서는 ‘연옥’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중요하다. ‘연옥’은 죽음 후에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연옥’은 살아 있는 동안 신을 알려고 노력하였지만, 구원받을 만큼 노력하지 못하고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한 신의 은총이다. 조로아스터교의 ‘하메스타간’과 유사한 개념이다. 지옥은 사람들과 천사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거주하는 장소 혹은 상태이며, 또한 자신들의 영혼에 원죄를 지니고 죽은 이들의 상태이다.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상태이다.
이슬람은 이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 가장 정교한 종말론을 지닌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은 종말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슬람의 신인 알라(Allah)는 ‘마지막 날’의 심판자이며, 무함마드(Muhammad)는 ‘마지막 날’의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 선택된 예언자이다. 『쿠란』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쿠란』은 또한 육체적 부활을 전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는 실제적이고 다소 성적이기도 하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전례 없이 강한 어조로 종말론을 주장한다.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전에 아라비아의 부족적 삶의 형태는 ‘자힐리야(jahiliyah)’가 특징이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이슬람교 이전 시기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무지의 시대’라고 번역되지만, 그 원래의 의미는 ‘화를 잘 냄’이었다. 초기 무슬림 경전에서 ‘자힐리야’는 공격, 오만, 맹목적 애국주의 그리고 폭력과 보복을 향한 만성적인 경향을 의미했다. 기원후 6세기 후반에 이르러 무함마드 선지자가 태어났을 때, 부족의 전쟁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임박한 재앙에 대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무함마드가 속해 있던 부족인 ‘쿠라이시(Quraysh)’는 유목생활을 버리고 메카(Mecca)에 기반을 둔 상업제국을 세웠다. 무역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부족간 전투를 포기하고 지역의 분쟁에 대한 고고한 중립적 태도를 길렀으며, 메카의 중심부에 위치한 고대 성지인 ‘카바(Ka’bah)’를 둘러싼 지역을 폭력이 금지된 성역으로 지정하였다. 이 조치들이 반도 전체에서 온 아랍 사람들로 하여금 피의 복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가 그 당시 아라비아의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은 전통적인 자힐리야의 오만함을 유지했다. 그들은 상상 이상으로 성공했고 이제 빈곤의 공포에서 자유로웠지만, 부유함에 대한 욕망 속에서 그들은 부족체제의 인도적인 면을 잊기 시작한다. 그 사회에서 더 약한 부족 일원을 돌보는 대신에, 몇몇 가족들은 부를 과도하게 축적했고, 반면 대부분 다른 이들은 점점 빈곤해졌다.
오래된 부족의식은 이제 신생 시장경제의 새로운 상황들에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함과 영적인 불만감이 존재했다. 아랍인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의 신에 대해 알았고, 그 신이 자신들의 신인 알라[알라는 (바로) 그 신이란 의미]와 동일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선지자나 그들의 언어로 된 어떤 경전도 내려주지 않았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610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결국 『쿠란』이라고 알려진 경전으로 모아졌다. 이 영감 넘치는 신탁들은 메카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쿠란』의 기본 메시지는 사적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잘못이며, 당신의 부를 공평히 나누어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정중히 대우받는 공정하고 격조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무함마드의 어록집인 『하디트(Hadith)』에서 무함마드는 “스스로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도 이루어지도록 바라지 않는다면 너희들 중 누구도 신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쿠란』은 알라 신께 순명하여 살지 않는다면, 알라께서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시간에 심판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인간들을 부활시킨다고 기록한다. 알라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보여준 ‘분명한 신호’를 수용한 사람과 무시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을 구분하여, 불타는 지옥인 ‘자한남(Jahannam)’이나 기쁨이 가득 찬 천국인 ‘잔나(Jannah)’로 인도한다. 천국과 지옥의 대비는 오아시스와 사막의 대비만큼이나 확실하다. “불신자들은 ··· 지옥 불 가운데 있어 거기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들은 최악의 피조물들이다. 그러나 믿고 옳은 일을 행한 신앙인들은 최상의 존재들이다.”(수라 98: 6-7) 지옥은 사막처럼 뜨겁고 건조하며 그 거주자들은 항상 목마르다. 천국은 시원하고 물이 항상 있으며 부족한 것이 없다. 지옥의 거주자들에게 ‘물’이 주어지나, 그 물은 뜨거운 쇳물이라 마시는 사람의 내장을 전부 태운다. 그들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여 살갗이 항상 상해 있고, 불집에 살아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양떼처럼 먹는다.
천국 안에는 오아시스와 강물이 있어 거주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안락한 쿠션 의자에 앉아 있다. 그들은 평안하며 피곤하지 않고, 진귀한 온갖 과일을 먹고, 취하지 않는 와인을 마시며, ‘후르’라는 여인들이 시중을 든다. “천국에 거주하는 자들은 행복에 빠져 있다. 그들과 그 아내들은 그늘 아래 안락한 소파에 누워 있다. 거기에는 모든 과일과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있다.”(수라 36: 55-57)
인간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알라는 예언자들을 통해 천국을 택하라고 촉구하지만, 인간은 그 경고를 듣지 않고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아뎀[성서의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리스도교처럼 원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물론 쿠란에서 ‘이블리스(Iblis)’라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지만, 인간은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함마드를 통해 전해준 알라의 ‘분명한 신호’를 받아들여 도덕적이며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각자 개인의 책임이다.
심판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 등장하는 천칭에서 재는 것처럼 분명하다. 당시 유목민들의 상거래에서 이용한 천칭으로, 그 사람의 일생의 행동과 말을 견주어 본다. 거기에서는 그 사람의 재산이나 일가친척이 그를 도울 수 없다. 만일 그가 무함마드를 통한 알라의 ‘분명한 신호’를 받아들여 기도를 하고 희사(喜捨)를 하면서 그 의무를 다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반대로 알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종말이 오는 표식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람들은 나방처럼 흩어지고, 산들은 양털처럼 뽑혀 모래 더미로 변하면, 땅은 흔들려 가루가 되고, 하늘은 갈라져 감기며, 별들은 흩어지고, 바다는 끓어 넘치며, 태양은 빛을 잃는다. 그러나 『쿠란』에서 이런 종말의 징조와 종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후대 무슬림 종파들은 『쿠란』의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에 설명을 첨부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첨가하여 더욱 정교한 종말론을 형성한다.
수니(Sunni)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행적이 담긴 글 모임인 『하디트』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종말론을 정교하게 형성시킨다. 이들은 특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종말에 등장하는 인물들, 심판, 사후세계, 형량 감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더한다.
‘바르자크(Barzakh)’라는 단어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지칭한다. 12세기 이슬람 신학자 알-가잘리(al-Ghazāli)는 바르자크에 일어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죽음의 순간에 죽음의 천사인 ‘이츠라일’이 등장한다.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천사들에 의해 하늘로 간다. 그 후에 문카르(Munkar)와 나키르(Nakir)라는 천사들이 죽은 자의 행동에 대해 심문한다. 특히 죽은 자들은 바르자크 동안 산 자들과 꿈을 통해 소통한다. 『쿠란』의 계시와 심판의 날 사이에 종말론적 인물이 등장한다. 거짓 예언자인 알-다잘(al-Dajjal)과 진실된 예언자인 마흐디가 등장한다. 이들은 『하디트』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알-다잘은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긴 천재지변 후에 나타나 세상을 정복하나, 후에 등장한 이사[성서의 예수], 혹은 마흐디, 혹은 『쿠란』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무자디드(Mujadid)’가 나타나 알-다잘을 물리친다. 마흐디와는 달리 무자디드는 항상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종말이 오지 않고 지연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인물이 무자디드로 등장한다. 『쿠란』 주해서에 의하면, 심판의 날은 천사장 이스라필(Israfil)의 트럼펫 소리 두 번으로 시작된다. 그때 영혼이 무덤에 있는 육체와 결합하여 부활하고, 그 후에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그들의 행위는 천상의 책에서 선포되어 천칭에서 행위의 선악을 저울질한다. 그들이 불 위에 놓인 다리를 무사히 건너면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다리에서 불길 가운데로 떨어지는 이들이 있다. 신자이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그리고 불신자이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영원히 불길 가운데 거한다. 다리를 건넌 신자는 천국으로 들어가면 ‘알라’의 모양을 한 존재가 기다린다. 거기에는 각각 예언자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이끌고 그를 맞이한다.
무함마드와 무슬림 공동체는 그 전체 공동체를 인도한다. ‘하우드’라는 연못에서 무함마드는 불길에 떨어진 무슬림을 위해 변론하기도 한다. 천국과 지옥의 모양도 무함마드의 예루살렘으로 밤에 여행했다가 하늘로 승천한 ‘미라지(Miraj)’ 기록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옥은 7단계로 되어 있고 각각의 단계마다 다른 형벌이 기다린다. 천국에도 7단계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알라의 왕좌가 놓여 있다.
힌두교는 43만 2,000년 동안 우주가 네 번 커다란 변화를 거친다고 말한다. 크리타 혹은 사트야 유가(Satya Yuga), 트레타 유가(Treta Yuga), 드바파라 유가(Dvapara Yuga), 그리고 칼리 유가(Kali Yuga)이다. 이 유가[‘기간’] 동안 인간은 신으로부터 점점 더 떨어져 죄를 지었다. 비슈누(Vishnu)는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적어도 9번 이상 인간의 형태를 하고 지상에 내려왔다. 육신의 형태로 온 ‘아바타라’들은 물고기, 거북이, 곰, 사람-사자, 난쟁이, 브라만들을 보호하는 라마, 아요다의 왕이자 라마야나 서사시의 주인공인 라마, 크리슈나(Krishna), 그리고 마지막으로 붓다(Buddha)이다. 이 우주론에 의하면 우리는 네 번째 유가이며 가장 타락한 유가인 ‘칼리 유가’에 살고 있다. 비슈누가 마지막으로 아바타라 칼키(Kalki)로 태어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구원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심판자로 온다. 힌두교도들은 인간의 문명이 칼리 유가 시대에 점점 영적으로 타락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에서는 종종 ‘다르마(dharma)’를 황소로 표현한다. 첫 시대인 사트야 유가에서 이 황소는 네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져, 마지막 시대인 칼리 유가 시대에는 황소가 다리 하나로 지탱한다. 칼리 유가는 종말론적인 괴물, 칼리와 연관이 있다. ‘칼리’는 ‘싸움, 부조화, 경쟁’이란 의미이다.
자이나교는 작지만 강력한 힌두교의 한 종파이다. 자이나교도들은 네 기간이 이미 지났다고 주장한다. 첫 기간은 ‘수사마 수사마’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에 사람들은 지상의 파라다이스에서 살며, 키가 가늠할 수 없이 크고[6마일], 생명나무가 그들의 모든 욕구를 해결해 준다. 그들은 죽은 후 천국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기간인 ‘수사마’는 첫 기간의 ‘수사마 수사마’와 비교하여 모든 것이 반으로 준다. 사람들의 키는 4마일이며, 다소 짧은 인생을 살지만, 아직도 생명나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죽은 후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 ‘기간’을 지날수록 사람들의 키와 삶의 안락함이 줄어든다. ‘수사마 두사마’ 기간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인 ‘두사마’ 기간이 도래한다. 이 기간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자이나교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절대악이 지배하는 ‘두사마 두사마’ 시대 바로 직전이라고 믿는다. 그 기간에는 사람들이 20년 정도 살며, 전염병이 창궐하고 덕은 사라진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에 따르면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다.
이들의 종말론이 그리스도교와 비교하여 비관적인 것 같지만, 이 믿음들은 사실 비교적 긍정적이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시간관은 선형적이지 않고 순환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염세적인 상황은 다가올 새롭고 희망적인 세계를 위한 직전 단계이다. 힌두교에서 칼리 유가 시대의 마지막은 우주의 파괴로 이어지는데, 이 파괴는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사트야 유가의 시작이기도 한다.
불교 종말론에 대한 담론은 가우타마 붓다(Gautama Buddha)가 자신의 가르침이 5,000년 후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시작되었다. 붓다의 팔리어로 기록된 경전인 『수타 피타카』에 의하면, 인간이 반듯이 행해야 할 열 가지 도덕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열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을 것이다. 열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는 도적질, 폭력, 살인, 거짓말, 사악한 말, 간음, 험담, 탐욕, 사악한 의도, 방종한 욕심이다. 이것들은 결국 빈곤의 시작이며 참된 종교의 끝이다. 5,000년 동안 붓다의 가르침은 점점 사라진다.
깨달은 아라한(阿羅漢)들은 점점 사라지고 붓다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어져, 결국 다르마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붓다에 대한 기억마저 없어지고, 붓다의 유물도 모두 부다가야(Buddha-Gayā)에서 화장된다. 그 후에 새로운 붓다인 ‘미륵보살(Maitreya)’이 등장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갱신하여 니르바나(nirvāna)로 가는 길을 재발견한다.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Tusita heaven)에 거주하며 세상에서 환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힌두교처럼 불교는 윤회설을 믿는다. 현재는 그 마지막이며, 역사적 석가모니는 만세 전부터 존재했던 붓다의 가장 최근 인물이다. 밀교 형태인 금강승(金剛乘) 불교와 다른 신비 불교들은 『탄트라(Tantra)』의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탄트라』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정토종(淨土宗)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속하며,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종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종파에서는 누구든지 깊은 신앙심을 갖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태어나게 된다고 믿는다. 한국의 경우 종파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원효를 포함한 신라의 고승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정토신앙에 대한 교학적 연구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일본의 정토신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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