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疾走) / 엄현옥
잠에서 깬다. 새벽 2시가 지났다. 실내는 어둠과 정적뿐이다. 다시 잠들기를 마다하고 거실로 나간다. 주방 쪽의 창문이 밝다. 밖을 내다보니 한낮처럼 분주하다. 찻집 ‘가을꽃 겨울나무’의 네온도 환하다.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들을 본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신호에 대기하기도 조급한 모양이다. 심야에 속도를 늦추지 않는 자동차가 많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멈추어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자정이 지났음에도 잠들지 않은 사람들, 저들의 질주는 언제 멈출 것인가.
사람들은 달린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는, 왼편 한켠을 속도를 지향하는 자들에게 내어 준 지 오래다. 그러나 러시아워일 때면 너도나도 걷는다. 아니 달린다고 함이 적절하다. 빨리 갔다고 해서 전철을 먼저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열차가 홈에 들어와야만 타는 것이다. 여유를 잃은 도회인의 조급증은 이처럼 매순간 타인의 속도에서 이탈하는 것이 불안한 것일까.
전철 1호선에 급행 구간이 있다. 많은 역에서 멈추지 않고 통과하는 이 노선이 생긴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급행만을 선호한다. 모든 역을 정차하는 열차는 언제부턴가 완행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행이 아니다. 정규 노선일 뿐이다. 그런데 역마다 멈추어 타인들이 승하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듯하다. 두 개의 열차가 동시에 홈의 양쪽에 멈추어 있기라도 하면 재빠르게 바꾸어 탄다. 이는 경인전철 1호선의 급행구간을 이용하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시간으로 따지면 길어야 10여 분인 것을……. 자신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더디지만 당연한 과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자본주의와 느림은 상극”이라는 밀란 쿤델라의 말을 떠올리면 저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빠름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속도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과연 나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퇴근길, 약속 장소가 1호선에서 가까운 경우는 그것을 타는 것이 그날의 최대 목표인 양 서두르지 않았던가.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자신을 끊임없는 속도전의 최전방에 배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속도 위주의 삶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리라. 우린 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 사실은 조금 느리게 몇 걸음 뒤처진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그러나 속도를 잃은 멈춤의 순간이 두려운 것이리라. 이는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기 위해 쉴새없이 움직이는 메트로놈(metronome)과 무엇이 다르랴.
‘무위(無爲)’라는 말이 생각난다. 오래 전 서예에 열중했을 때 그 어휘를 조롱박 표면에 굵은 예서체로 써 놓고 매듭을 만들어 벽에 걸어 두었다. 그것을 보며 인위적인 지혜나 힘을 더하지 아니한, 평화로움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현상을 초월하여 상주(常住) 불변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체와 마주한 듯한 텅 빈 충만에 잠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이들처럼, 늘 자신을 옥죄이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질주에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리할 수 없다. 직통 전철의 속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노라면 맹인용 지팡이를 조심스레 두드리며 동전바구니를 내미는 거친 손이 있다. 간혹 만나는 그들의 남루함을 외면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과도한 속도 경쟁의 사회 분위기는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모든 일에 남들보다 한 발 앞서기만을 강요한다.
느림의 미학을 읊은 한시(漢詩)가 떠오른다.
山行忘坐坐忘行 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廳水聲 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居 후아기인선아거
各歸基止又何爭 각귀기지우하쟁
산길 가다 보면 쉬는 걸 잊고 쉬다 보면 갈 줄을 모르는데
소나무 그늘에 말 쉬게 하고 강물 소리를 듣네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따라 앞섰으나
제각기 제 길 가니 그 무슨 상관이랴.
―송익필(宋翼弼)의 ‘산행(山行)’
산길을 가면서 느낀 정취를 즐기는 옛 선비의 유한(幽閑)함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다 보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가게 마련이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련만 어쩌자고 모두들 초조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일까. 물론 잠시 쉬는 사이 뒤에 오던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문명으로 치닫는 과도 경쟁의 시대도 아니었던 1500년대를 살았던 선비의 여유로움이 참 멋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좀더 단순해지고 싶다. 지금 당장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로 여겼던 일들은 사실 착각인 경우가 많다. 당면한 일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단순함을 즐겨 볼 만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단순함이, 복잡함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도적인 단순함은 도리어 부담일 수 있다.
나의 속도를 찾아야겠다. 질주하는 세상에 편승하여 망각하고 있었던 나만의 속도를 꼭 찾고 싶다. 시간은 항상 거기에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근래 번지고 있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유행처럼 사라질 어휘는 아닌 듯하다. 천천히 깊은 생각에 잠겨 산보하듯 모든 걸 제쳐 두고 싶다. 느림 속에 자신을 방치하고 속도에서 이탈되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미 질주에 익숙하여 나만의 속도를 찾는 것이 힘든 일일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걷고 달려 나를 앞지르겠지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른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다소 늦었다고 해서 항상 뒤처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오늘도 1호선을 탈 것이다. 그러나 굳이 급행열차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레일을 구르는 느릿느릿한 마찰음으로 미끄러지는 완행열차에 앉아 얼마간이라도 시계를 쳐다보지 말아야겠다. 느림 속에 나를 방치하며 선인의 시처럼 말을 멈추고 소나무 그늘에서 물소리도 들을 것이다. 앞질러 가는 이들의 뒷모습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볼 것이다. 잡상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여 봐야겠다. 물론 내가 조금 늦는다고 하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나브로 날이 밝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