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미소(河下微笑)(김한식)
榮山流水呼白龍(영산유수호백룡)
馬韓之魂行月明(마한지혼행월명)
旻天虛空河下笑(민천허공하하소)
過客窓戶開絶景(과객창호개절경)
榮山에 흐르는 물은 白龍을 부르고
馬韓의 맑은 영혼
달빛 따라 거니는데
가을 하늘 드높아
銀河가엔 얇은 미소가 방긋
나그네의 窓가에는 絶景이 피어나네
해설: 김한식
그대는 들었는가? 노령(蘆嶺)을 지우며 영산(榮山)으로 흐르는 새찬 물줄기가 백룡을 부르는 것을, 천자의 얼굴을 용안이라 이르고 그 자리를 용상이라 하던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용(龍)을 임금이나 위대한 인물을 상징하는 말로 사유해왔다. 계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도 그렇다. 가장 으뜸가는 용이 영산의 백룡 저수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용은 무엇을 이르는 말이며, 강물은 무엇 때문에 용을 부르고 있는가?
월명사(月明師)는 밭두렁을 걷고 있을 때 왕의 부름을 받는다. 이로 본다면 그는 직업 승려가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이고, 피리로 시름을 달래며 삶의 의미를 추구하던 시인이다. 월명이 피리를 불면 구름에 떠가는 달마저 길을 멈춰 그 마을을 月明이라 이름했다.
河下선생의 고향은 馬韓 유적지가 가까운 月明里다. 물방구치며 미역감던 티 없이 맑은 어린 시절, 그는 하얀 쪽배를 타고 은하수 건너는 꿈을 꾸며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달을 따러 갔을 것이다. 그 해맑은 마한의 얼이 가을밤에 달과 함께 나란히 길을 걷는다. 길 가는 나그네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아름다운 정경 아닌가? 그의 인문학적 삶의 토대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영산강(榮山江)가의 월명은 제망매가에서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므로 두렵고’라고 읊는다. 생사의 길, 삶과 죽음의 길은 열린 선택지가 아니다. 하지만 삶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을 강요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어두운 숲길이나 가시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생의 심연에서 절망의 벤취에 앉아 쓰디 쓴 소태나무 열매도 씹어야 하지 않던가?
河下선생이 쓴 「고려가요에 나타난 시간 현상 연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동안의 숙고를 통해서 빚어낸 시간에 대한 그의 인문학적 사유이다. 그는 영산을 흐르는 강물에서 시간의 얼굴을 보았던 것일까? 銀河에서 시간의 색깔을 보았던 것일까? 한 생애를 통해 고전문학을 배우며 가르치던 인문학자로서의 화두(話頭)는 시간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순간 순간마다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가?
동동(動動)의 정월령에는 ‘正月 나릿물은 아으, 어져 녹져 하논되 누릿 가운데 나곤 몸하 하올로 녈셔’라는 싯구가 있다. 얼었다 녹았다 하는 정월의 냇물은 냇물 그 자체가 지닌 사물성이다. 그것은 자연 현상으로 보이지만 세상 가운데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시적 자아와 맞닥뜨릴 때, 그것은 해석되고 ‘고독과 사랑’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요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 하던가? 삶은 고독과 사랑이 교차되는 시간 현상이 아니겠는가? 핫산 알반나의 말대로 시간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진지한 삶이다.
우리 선인들은 하늘을 성스러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봄하늘을 창천(蒼天), 여름 하늘을 호천(昊天), 가을 하늘을 민천(旻天)이라 불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들인가? 가장 높은 하늘에는 은하(銀河)가 있고 사람은 누구나 하늘 아래 산다고 사유했다. 하늘은 삶의 지성소요 신령한 영역이기에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고무상(至高無上)인 하늘에서 선생은 무엇을 보았던가? 텅 빈 하늘은 그에게 어떤 비밀을 말해 주었는가? 그의 인문학적 향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넘어설 때에 사원에 있는 고귀한 그림을 통해서, 철학자들의 깊은 깨우침을 통해서, 그리고 시인들의 시를 통해서 자신들의 한없는 욕구를 다스려 왔다. 신화 속의 인물들이 절제나 좌절의 본보기를 보여 인간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해준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인 그리스 비극은 범람하는 욕망에 제동장치를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河下선생은 때때로 범람하는 강물을 보면서 그 근원을 텅 빈 하늘에서 찾는다. 2만 8천 광년 거리에 있는 우리 은하에서 물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그 물은 범람하는 욕망의 강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쓰디 쓴 외로움의 눈물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달고 쓰고 매운 세상살이를 겪으며 비탈진 오솔길을 걸어 온 선생은 銀河가에서 방긋하고 미소를 짓는다. 멀리서 보면 위엄이 서리고 가까이 대하면 온화한 얼굴을 君子의 모습이라 하던가? 용안(龍顏)이란 바로 이런 얼굴이 아닐까? 백제의 미소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영원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창가에 피어나는 맑은 미소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단한 나그네길 인생에서 은하의 방긋거리는 미소가 영원으로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출처] 하하미소(河下微笑)|작성자 가을 나그네
첫댓글 멀리서 보면 위엄이 서리고 가까이 대하면 온화한 얼굴. vs 멀리서 보면 온화하고 가까이 대하면 위엄이 서린 얼굴?
가을밤에 달과 함께 나란히 걷는 여정, 고독과 사랑이 교차하는 시간을 살아내는 삶. 하늘이 깊듯이 고독도 깊다. 맑다.
순간 순간마다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가 .
봄하늘을 창천 蒼天
여름 하늘을 호천 昊天
가을 하늘을 旻天 민천
은하가에서 방긋하고 미소를 짓다
온화한 얼굴이 군자君子의 모습이라 하던가.
맑은 미소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엄한 얼굴 ×
위엄있는 얼굴 ×
방긋거리는 미소가 피어나기길
기도한다 .
고단한 나그네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