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그 밖의 지명 유래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지명의 유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서울의 지명과 부근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역사적 의미와 철학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 서울지역
◑ 사대문
仁義禮智(인의예지)와 관련이 있다.
1.동대문(興仁之門) : 흥인지문은 五常(오상)의 仁(인)을 근원한다. 仁은 어질고 자애롭다는 의미다. 동대문은 다른 문보다 위치가 낮아 기를 북돋기 위해 4글자로 홍인지문이라고 했다.
2.남대문(崇禮門) : 숭례문은 禮(예)를 근원한다. 남대문은 길흉화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2주 전에는 승례문이 전소되었고, 한일합방 3일전에는 승례문 현판이 떨어졌다.
6.25발발 몇 개월 전에는 승례문 좌측 성벽이 돌연 무너졌다.
2008년에도 화재가 발생했는데 2008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적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3.서대문(敦義門) : 돈의문은 義(의)를 근원한다.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서 맞이한 문이었다.
4. 북문(肅靖門) :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거의 사람 왕래가 없었던 문이다. 음양오행가운데 음에 해당되어 가뭄이 들면 기우를 위해 문을 열고, 비가 많이 오면 문을 닫았다..
◑ 용산 : 무학의 남쪽으로 부터 한강변을 따라 구비구비 산줄기가 마치 용이 몸을 비트는 것 같다고 하여 용산이라고 불렀다.
주한 미군들도 용산을 dragon hill이라 부른다.
◑ 신당동(新堂洞)과 약수동(藥水洞)
신당동의 지명 유래는 이곳은 원래 광희문 밖에 있는 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무당촌을 이루었으므로 신당(神堂)으로 부르다가 후일 갑오개혁 때 한자를 神에서 新으로 바뀌며 현재의 신당동(新堂洞)이 되었다.
약수동은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유명 약수(버티고개부근)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
다.
◑ 압구정(鴨鷗亭)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 찬탈을 도운 최측근으로 성종 때 까지 영의정과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성종 눈밖에 벗어나자 한강 부근에 정자를 짖고 말년을 보냈는데 명나라 예검이
라는 자가 갈매기가 노는 곳, 즉 압구정으로 지어 주었다. 나중에 압구정=한명회 호가 되었다.
◑평창동 ᆞ북창동ᆞ 남창동ᆞ 염창동
오늘날 국세청에 해당되는 선혜청의 관할 창고에 해당된다.
평창동은 장기 보관 창고, 북창동과 남창동은 단기보관하며 염창동은 소금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 양재동
어질고 재주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니 후세들 명문대 합격을 바라면 여기에 주거지를 둘만도 하다.
◑ 삼청동
셋 삼이 모두 맑다는 것이다. 즉 산ᆞ물ᆞ 사람이 모두 맑다는 의미니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곳이다.
◑ 오금동
인조가 병자 호란시 남한산성으로 피난 갈 때 오금이 저린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문래동
문익점 선생이 맨 처음 목화를 전래한 동네란다.
◑ 이태원동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이태원이라는 시설이 이태원동에 자리 잡았다. 한다.
◑ 세종로
세종이 태어난 옥인동 근처에 도로를 세종로라고 불렀다.
◑ 태평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한 태평관이 위치해서 태평로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과거 약소국인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 왕심리
도성까지 십리정도 떨어져서 그렇게 불렀다.
◑ 마장동과 목동
옛날에 말 목장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 흑석동
이 곳에서는 검은색의 돌들이 많이 나와서 흑석동이라고 불렀다.
■ 서울외 지역(고려 왕건관련 지명)
◑ 팔공산(대구)
고려 왕건이 이곳에서 여덟 명의 장수를 잃었다 해서 팔공산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 안심면
왕건이 단기 필마로 도망가는데 이 곳에서 후백제 군사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아 안심한 곳이라고 해서 안심면이라고 불러졌다.
◑ 반야월
왕건이 숲길로 도망가는데 반달이 그곳을 비추었다하여 반야월로 부르게 되었다.
◑ 명성산
포천에 명성산은 후 고구려 궁예가 왕건에 쫓겨 도망가다 자기 신세타령하면서 울 명, 소리
성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하여 명성산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