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鍾)은 죽은 제후의 무덤 같았다. 위엄을 한껏 부려보지만, 혼자서는 어떤 소리도 복기하지 못하였다. 종은 엎어놓은 둥실한 항아리 같았다. 밤이면 항아리는 뿌루퉁한 입술로 새달을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항아리의 둥그런 테두리가 이(齒)처럼 촘촘하란 의식이었다. 종은 죽은 공주의 묘 같았다. 동그란 봉분 위 파릇한 풀빛이 그러하고, 장례식에선 금기시되는 빨간 헝겊을 묘 두덩에 떨어뜨리고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기억한다. 에밀레종의 존재가 신화로 변해가던 순간을. 지나가는 중에게 여인은 제 아들을 시주하겠다며 농을 건넸고, 그것은 감히 어길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버렸다. 단숨에 쇳물에 던져진 아이는 깊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척추뼈를 세우며 눈부시게 일어나고 있었다. 금박을 입힌 아이는 살림 넉넉한 절의 동자승 같았다. 아이는 종의 안쪽, 당좌에 탯줄을 매달았다. 그리고 종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당좌에 탯줄을 달면서 아이는 침묵하는 법부터 익혔다. 종소리와 종소리의 맥놀이가 없다면, 그래서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없다면, 그것은 메아리이지 종소리가 아니다. 메아리는 멀리 갔다 되돌아오지만, 종소리는 넓게 펴지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의 몸이 울린다. 아이는 그네를 타듯 종의 추를 잡고 종속을 횡단한다. 미끈한 등허리와 두 다리는 바깥세상을 향한 아이의 눈부신 도약이다. 이대로 추를 잡고 마구 당긴다면 종은 흔들흔들 떨어져 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금박을 입힌 아이는 햇빛에 닿자마자 몸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릴 것이다.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아이는 종의 가장자리에 앉아 아주 오래전의 바깥세상을 기억했다. 그때 아이는 아주 오래된 식물, 고사리의 맛을 알아가던 참이었다. 종의 미끈한 곡선을 타고 내려온 연꽃 문양의 당좌에 탯줄을 달고, 아이는 세상의 바람을 마셨다. 언젠가는 일어나 한 번이라도 걷고 싶었던 밖을 향하여 아이는 소리쳤다. 그러나 나오는 소리는 에밀레 뿐이었다. “에”는 노승의 한밤중 혼잣말 소리를 닮았다. “밀”은 경매시장 경매인 아저씨의 입술 언저리를 닮았다. “레”는 미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독경 소리를 닮았다. 사원의 종에는 오래된 적막이 고여 있었다. 한 발짝만 더 다가가도 종은 “쨍”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았다. 자신의 무게 하나 어쩌지 못해 고리를 끊어버린 종이 있었다. 자신의 무게를 더는 감당할 수 없어 휘어지다, 휘어지다가 마침내 지상으로 내려앉은 종이 있었다. 비파를 켜고 있는 비천상은 지상의 바람에 날개옷을 펄럭인다. 아이가 셋이 되도록 비천녀는 이 지상을 떠나지 못하리라. 종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연꽃의 수술에는 꽃밥이 가득하여 천 년이 지나도록 에밀레종은 배곯지 않았다. 기도가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고 배고픔이 하늘이다. 철제 무기의 시대를 지나 철제 농기구의 시대에도 벼의 수확과 다산을 비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벼농사를 짓는 나라에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자연히 인구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동이 밥을 얻는 시대가 되었다. 원래 종은 중세 기도원에서 식사시간을 알릴 때 쳤던 일종의 알림 벨이었다. 띄엄띄엄 방들이 있다 보니 일일이 찾아가 식사하라고 말하기가 번거로워 이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은 유리가 깨지는 듯 쇳소리가 많이 나고 여운이 짧다. 종소리는 뭔가 잔뜩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음은 가파르다. 이에 비하자면 에밀레종 소리는 에. 밀. 레. 세 음이 모두 다르다. “에”는 낮은 단조의 저음이어서 약간의 무서움마저 인다. “밀”은 단조로운 한 음을 울리며 순간처럼 지나간다. “레”는 갑자기 음을 떨어뜨리며 멀어진다. 지고 있는 꽃잎처럼. 절 입구에서, 가짜 종을 팔고 있던 아주머니를 보았다. 좌판에 종을 진열해놓고 종을 사라고 거듭 말했다. 조악한 종은 중국제였다. 종의 가장자리를 감싸고 올라간 용은 미꾸라지 같았다. 종의 방울은 둔탁해서 지독한 게으름뱅이가 내는 소리 같았다. 사양하며 돌아서는데, 아주머니의 한 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맨날 절만 찾아다니면 뭐 하는겨? 좋고 싫고 예쁘고 못난 분별만 하고 있는데. 이럴 땐 못난 종(鍾) 한 개 사 주는 것도 불교야. 똑같은 쇳동가린데 이건 되고 저건 안돼?” 속으로는 백 가지도 더 아닌 이유를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스님들의 밭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나무의 가지를 억지로 비틀거나 생자로 유도하지 않았다. 식물에도 고통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철사로 줄기를 유도해 공중까지 세워 올려도, 스님은 식물에 고통을 주어 많은 수익을 내려 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의 착취 대상이 아니라는 걸 스님은 말하고 싶으리라. 솟대, 자물쇠, 경첩, 운판(구름판), 오래된 사찰에는 마치 숨은 듯 철이 들어 있었다. 그 유연성으로 철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을까? 철은 이제 딱딱한 직선에서 유려한 곡선으로 진화하고 있다. 철을 먹는 녹마저 녹이고, 철은 부식되지 않을 세월을 살아가며 어느새 자연의 곡선을 닮아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딱딱한 금문교에서 그것을 카피한 남해 금문교를 지나, 지금 철이 가진 양면성은 현대 미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자전거와 안경, 그리고 전위미술의 구부러진 시계처럼, 왜곡된. 나에겐 살아가는 날들이 나날이 자기 표절 같았다. 고기 타는 연기에 어정쩡한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뒤집는 것이 나는 새삼 불만스럽다. MZ세대라는 신입들은 고기를 굽기는커녕 회식에 참석해 주는 것만도 고맙고, 과장인 양반은 아예 고기를 굽지 않는다. “우리는 왜 부자에게 돈을 쓰는 것은 투자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은 왜 비용이라고 하나?” 그들은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술자리에 불러내면서도 정작 서빙을 하는 아이들은 함부로 대했다. “어이, 가위 좀. 미련해 터진 놈아. 내가 주인이면 넌 벌써 잘렸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가슴속에는 에밀레종 소리가 울린다. “에”는 마치 저승에서 온 듯한 어두운 소리여서 덜컥 겁이 났다. “밀”은 단조로운 한 음을 울리며 순간처럼 쉬이 지나간다. “레”는 갑자기 툭 떨어진다. 꽃이 떨어지듯 하강의 속도는 급작스럽다. 에밀레종 소리는 1시간마다 5분씩 스피커에서 울려 나온다. 여름에 듣기에 에밀레종 소리는 조금 무겁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에밀레종 소리의 비밀은 아주 과학적이다. 종소리를 사람 목소리처럼 낼 수 있는 것도 에밀레종만이 가진 주조공법 때문이다. 종의 한쪽은 두툼하게, 다른 한쪽은 얇게 만들어 차례로 맥놀이를 하면 소리끼리 윤회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회하는 것이 어디 소리뿐이랴, 바람도 천 년 전의 그 바람인 것을 저 나무도 끄덕끄덕 잘도 아는 것을. 그리하여 어느 가을날, 천 년을 건너온 에밀레종 위로 파아란 가을 하늘이 깨질 듯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