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신들의 땅 덕유산
이 도 연
점과점 선과 선으로 이어진 많은 날이 점멸하는 전구처럼 낮과 밤이 깜빡이며 하루가 또 밝아 왔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날이지만 특별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은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행의 아침으로 유달리 잠을 설친 밤의 터널은 길었다.
덕유산 상고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촉촉하게 젖은 길 위로 밝아 오는 청록빛 새벽이 상쾌하고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여행이 주는 설렘 같은 기쁨이다.
시원하게 도로를 달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날 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지만 돌아올 곳이 있어야 여행을 떠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타고난 사람의 유전자 지도 같은 것 인지도 모른다.
차는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를 거처 무주 나들목을 빠져나와 49번 지방도로를 향해 길을 잡아 약 35km 가파르게 일어서는 길을 숨 가쁘게 달려 무주리조트 설천 하우스 앞에 도착한다.
눈덮힌 설산이 커다란 병풍처럼 시야 가득 펼쳐지고 산 정상을 향하는 곤돌라는 쇠줄 하나 머리에 걸고 까마득한 정상을 향해 이름 모를 산새 울음소리를 내며 끼룩끼룩 줄지어 올라간다.
눈 덮힌 나무의 우듬지를 밟고 길게 늘어선 눈 계곡 위를 줄을 타는 외로운 곡예사의 심정을 아는지 함박웃음으로 달빛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이 설천봉을 향해 오른다.
상고대 안개 바람이 시야를 가리고 눈보라가 설산을 경계하듯 거칠게 밀고 당긴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설산은 눈이 부시고 시리도록
아름답다.
안나프르나 히말라야산맥에서 펼쳐진 드라마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
덕유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원대한 산맥의 대간이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거느리고 태백에 정기를 품어 설악으로 고도를 높인다.
추풍령을 넘어 계룡산에서 힘을 받아 신풍령 속리산 자락에서 힘차게 솟구쳐 올라 덕유산에 이르러 크게 뻗어내려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의 정점을 찍어 바다로 자진하다 한라에서 구름을 머리에 이고 바람을 흔들어 높이 솟구친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을 아우르는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적성산, 두문산으로 흐르고 남서쪽으로는 중봉을 지나 무룡산 남덕유산으로 기운차게 산하를 이어간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가면서 덕유산(1610, 6)은 지리산(1915. 4), 설악산(1707, 9) 다음이며 한라산을 제외하면 대간 상으로 세 번째 높은 산이다.
28km에 달하는 무주구천동 계곡을 품고 있는 덕유산은 골이 깊고 울창해서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렵고 웅장해서 전체를 시야에 품을 수 없다.
산 아래 겨울이
해산으로 풀어진 골짜기는 절기상 대동강물이 풀리는 우수에는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옥 같은 물줄기가 흐르는 설산의 자태는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2월의 햇살이 은은하게 풀어지는 능선 따라 거친 산맥을 덮고 있는 설산의 부드러운 곡선이 은빛 블라우스처럼 흘러내린다.
설천봉과 향적봉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산과 산이 겹치며 운해가 출렁이다 때로는 고요 속에 침묵하는 설산의 정맥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은 경이와 감탄의 수식어로 부족하다.
능선을 넘고 거대한 직벽에 몸을 부딪치며 거칠게
불어오는 눈보라도 상고대의 나무를 어쩔 수 없는지 눈의 미립자를 나무에 뿌려 놓고 제 갈 길을 간다.
상고대의 주목아
천년 세월을 바람 앞에 자유로운 영혼이여!
풍화와 침식을 거듭하며 너의 이름 불러줄 그리움이 화석처럼 굳어진 장구한 시원을 기억하며 숭고함으로 태고의 그곳에서 침묵하고 있구나!
사람아!
바람을 잡으려 마라! 어디로 가느냐 묻지를 마라!
바람의 길은 그런 것이라고,
남덕유산맥을 넘어 달려온 설산 고봉 준령을 뒤로 하고 기운차게 뻗어 내려온 산맥의 줄기가 정점을
이루어 설천봉에 닿아 있다 .
완만하고 온화한 상고대의 능선 위로 길을 뻗어 향적봉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얼음 왕국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제국으로 향하는 설국의 무대 같은 느낌이 든다.
찬바람이 온몸을 엄습한다.
태산준령에 오른다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인내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극한의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는 의지를 알게 하는 과정이다.
삶의 여정을 걸어가듯 천천히 능선을 오르자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얼음 요정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마법의 겨울 산이 즐겁다.
설산에 피어난 눈꽃이 신비로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눈의 알갱이가 보석처럼 아름답다 .
향적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장관은 자연이 써 내려간 장엄한 대하 서사시가 펼쳐진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산에 오르는 꿈을 꾸었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의 영역으로 입산하는 일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신 앞에 작아지는 존재를 극복하며 도전과 존엄, 두려움과 용기 그리고 산에 오른다는 것은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새파란 창공 아래 펼쳐진 설산에 오르는 자, 신을 경배하라!
그것은 신의 땅에 입성한 자들이 행하는 당연한 의식이니라!
신들의 경고가 귓전에 메아리친다.
"산은 인간의 오만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신성한 땅 위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영혼의 노래처럼 들려온다.
향적봉 정상에서 발아래 펼쳐진 풍경 앞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에 성호를 긋고 두 손을 합장하며 위대한 신들의 땅을 향해 숙연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