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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蘇洵)의「장익주화상기(張益州畵像記)」는 유명한 글이다. 소순 자신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유명한 문인인데다 「장익주화상기」라는 글이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는 명문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고문을 익히면서 이 글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창희(金昌熙, 1844~1890)처럼 이 글을 읽고 그 후미에다 위와 같은 감상을 남긴 문인은 드물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차라리 고발에 가깝다. 지역 차별이라는 사회 모순을 끝내 좌시할 수 없는 양심의 분기이다.
소순의 글은 본디 1054년 송(宋)의 인종(仁宗)이 장방평(張方平)을 촉에 보내 촉의 동요를 진정시키자 장방평의 치적에 감사하는 촉의 백성들이 정중사(淨衆寺)에 장방평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향사하기로 하고 소순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완성된 것이다. 장방평은 당시 촉 사람들은 변란이 많다며 이들을 도적처럼 대했던 지역 차별의 결과 촉에서 항상 변란이 일어났음을 통찰하고 촉 사람들을 제나 노와 같이 중심부의 사람들처럼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촉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장방평의 마음은 800여년의 세월을 흘러 김창희의 마음에 도달한다. 김창희는 소순의 글에서 장방평의 마음을 읽고 조선 사회의 촉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평안도와 함경도, 통칭하여 서북 지방은 조선후기 사회를 주도한 기호 지방의 먼 변방이었다. 조선의 촉이었다. 오랫동안의 지역 차별로 정치적 입신이 제한되고 사회적 성세가 미약하였으며 지방관의 자의적인 수탈이 만연한 가운데 항시 변란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평안도 사람들은 1810년대에 홍경래의 지휘 하에 청천강 이북을 휩쓸며 중앙 조정에 저항하였고, 함경도 사람들은 1860년대에 두만강을 건너 대규모 월경하는 엑소더스의 물결로 중앙 조정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김창희가 함경도 길주, 명천의 부로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그가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어 함경도 민정을 살폈던 1876년 당시 함경도 지방의 집단적인 민중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야기 속에서 효명세자(孝明世子)는 함경도 사람들에게 신화가 되어 있다. 함경도 지방관들의 성격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1827~1830)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로 구별된다.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정신을 강조했던 정조(正祖)의 손자답게 효명세자는 변방에 대한 공평한 대우를 생각하여 지방관의 임용에도 신중하였으나, 세자 사후 함경도 민심은 지방관의 선치가 전무한 절망을 목도하고 있었다.
효명세자 사후 세도정치기의 정치적 관성은 고종대까지 이어져 함경도 사람들을 예와 법으로 다스리는 지방관을 창출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예로 다스린다는 것, 그것은 서북 사람들을 기호 사람들처럼 대우하는 마인드의 형성이다.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 그것은 이러한 마인드에 기초하여 항시 모든 지역 행정을 국법의 안에 두는 것이다. 법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에 예치를 언급할 여력이 있을까만 오히려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 원인이 예치의 부재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 평안도는 한국 유교문명의 원류로 소급되는 옛 기자조선의 터전이고 함경도는 왕조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조선왕실의 발상지라고 생각되었다. 서북 지방은 궁마지향(弓馬之鄕)이라는 말처럼 무(武)의 정체성이 강했지만 유교의 근원과 왕조의 고향에서 기인하는 문(文)의 자부심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김창희가 이 글을 지었던 1880년대에는 조선성리학의 학적 연원을 갖춘 유림(儒林)이 서북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문무차별에서 기인하는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은 엄존하고 있었다. 서북을 기호로 대우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북의 문(文)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어쩌면 대한제국기에 서북 지방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학교가 급격히 확산된 것도 기호와 동등하게, 아니 기호를 추월해서 문(文)을 인정받으려는 서북의 오랜 열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방’에 파견된 무과 수령들이 얼마나 이러한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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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사시간이네요. 에고, 뭐가 뭔지..아리송.
에공~! 해골이 복잡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