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믹스 / 엄현옥
식사 후의 포만감에 나른하다. 커피를 마시려는데 우연히 커피 믹스 끝부분에 적힌 숫자가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는 5 이상의 숫자부터 단맛이 강하다고 했고, 다른 이는 1, 2번은 정말 쓴맛이라며 맞장구 쳤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는 상쾌한 아침이면 2, 3번이, 피곤이 밀려드는 오후에는 9번이 좋았다. 어쩌다 7번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때면 네 잎 클로버를 찾아낸 것만큼 기뻤다.
기호에 맞는 한잔의 커피가 주는 행복감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바쁠 때면 평준화된 맛에 입맛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간편함 때문이다.
그런데 꼼꼼한 성향의 A 선생만이 수긍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탕 조절 부분이 별도로 있는데 굳이 숫자로 당도 조절을 중복 표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다수의 위력에 분쟁은 쉽사리 평정되는 듯했다.
마침 차를 마시기 직전이어서 각기 다른 번호를 털어 넣고 더운물을 부었다. 서로 남의 커피까지 시음한 결과 1번은 씁쓸했고 10번은 아주 달다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떨떠름한 표정의 A 선생이 분연히 일어나 포장에 적힌 소비자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상냥한 여직원의 명쾌한 응답을 재연했다.
“고객님, 생산 라인의 번호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생산시에 스틱이 10열로 된 기계 장치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하자 발생 시 위치 파악을 쉽게 확인하기 위한 단순한 품질 관리 번호였던 것이다.
이만한 플라시보 효과를 찾기가 쉬운 일이랴. 그 동안 1, 2번이기에 씁쓸했고 10번이기에 달다고 생각했던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