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배롱꽃 아래에서 당신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고두현 기자 입력 2023.08.14 10:00수정 2023.08.16 08:56 생글생글 812호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서안나 : 1965년 제주 출생. 1990년 <문학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 <립스틱 발달사> 등 출간.
이 시에는 많은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시인의 경험과 그 속에 깃든 사연이 종횡으로 엮여 있지요. 어느 해 여름, 동료 시인들과 문학 순례를 떠난 시인은 안동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서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산서원에는 붉은 목백일홍(배롱나무)꽃이 만발해 있었죠.100일 가는 꽃 … 백일홍 → 배기롱 → 배롱목백일홍은 꽃을 한번 피우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나무’라고 부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서 ‘배기롱나무’로 불리다 ‘배롱나무’가 됐죠. 이 나무는 붉은 꽃을 석 달 반 넘게 피워 올립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과 다르지요.
그 비결은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게 아니라 여러 꽃망울이 이어 가며 새로 피는 데 있습니다. 아래로부터 위까지 꽃이 다 피는 데 몇 달이 걸리죠. 그래서 꽃말이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청렴한 선비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시인은 목백일홍꽃이 붉게 핀 병산서원과 고즈넉한 만대루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곳에 앉아 유장하게 흘러가는 하회 강물과 병풍처럼 버티고 선 절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강학에 힘 쏟던 한 선비를 떠올렸습니다.
‘그 선비는 어쩌면 뒷방 늙은이처럼 게으르게 만대루에 앉아 그늘을 따라 옮겨 앉으며 침묵의 깊이를 관조했을지도 모른다. 밤늦은 시간이면 어둠 속에서 떠나보낸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하심(下心)’이란 단어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잠긴 것은 불같이 타오르는 꽃 때문이었지요. 시인이 어릴 때 아버지는 집 뒷마당에 백일홍을 가득 심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백일홍에 얽힌 전설을 들려줬지요.
옛날 어떤 어촌의 한 처녀가 이무기에게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는데, 어디선가 용사가 나타나 이무기를 처치하고 처녀를 구해 줬답니다. 보은의 뜻으로 혼인을 청하는 처녀에게 용사는 지금 전쟁터에 나가는 길이니 100일만 기다리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요. 만약 흰 깃발을 단 배로 돌아오면 승리해 생환하는 것이요, 붉은 깃발로 돌아오면 주검으로 오는 줄 알라고 말이에요. 100일 뒤 용사가 탄 배가 나타났으나 붉은 깃발이었습니다. 그걸 본 처녀는 절망해서 그만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용사의 피가 흰 깃발을 붉게 물들인 것이었죠. 그 뒤 처녀의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백일기도를 하던 처녀의 넋이라 하여 백일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그 전설 속에 투영된 할머니의 일생입니다. 어릴 적 시인은 할머니와 방을 함께 썼다고 해요. 할머니는 무서우면서도 엄격한 분이었죠.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출가해 버린 남편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를 다 감당하고 어린 아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시묘살이까지 9년이나 했죠.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늘 창가에 앉아 몽롱한 눈빛으로 밖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시인은 그 할머니의 등에서 깊은 슬픔의 그늘을 읽었습니다. 그 슬픔과 백일홍의 짙은 꽃빛이 비극적으로 겹쳐졌지요.꽃잎처럼 떨어지는 ‘하심(下心)의 문장’그 백일홍은 배롱나무와 다른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이긴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 붉은 꽃이 병산서원의 목백일홍과 닮아 보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선비의 절제와 할머니의 아픈 삶, 백일홍의 붉은 꽃잎과 침묵의 무게, 하회의 물결이 함께 어우러지고 그 경계의 접점에서 당대의 역사를 초월한 시 한 편이 탄생했지요.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태어난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서원입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2층 누마루인 만대루죠. 강학과 휴식을 겸한 복합 공간입니다. 벽과 문이 없는 7칸의 누각 사이로 사시사철 다양한 풍광이 7폭 병풍처럼 펼쳐지지요.
만대루는 자연경관을 건축의 구성 요소로 빌려 온 ‘차경(借景)’의 으뜸 사례입니다. 그래서 서원 건축의 백미로도 꼽히지요.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와 어우러지는 풍광을 보는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습니다. 그 뒤를 돌아 들어가면 배롱나무 고목들이 피워 올리는 붉은 꽃 천지를 만날 수 있지요.√ 음미해보세요시인은 목백일홍꽃이 붉게 핀 병산서원과 고즈넉한 만대루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곳에 앉아 유장하게 흘러가는 하회 강물과 병풍처럼 버티고 선 절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강학에 힘 쏟던 한 선비를 떠올렸습니다. ‘그 선비는 어쩌면 뒷방 늙은이처럼 게으르게 만대루에 앉아 그늘을 따라 옮겨 앉으며 침묵의 깊이를 관조했을지도 모른다. 밤늦은 시간이면 어둠 속에서 떠나보낸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하심(下心)’이란 단어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잠긴 것은 불같이 타오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