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식
나와 집사람, 딸 세 사람이 아침 일찍 산책하러 나갔다. 집을 나설 때 하늘이 잔뜩 흐려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산을 챙겨들고 갔다. 강둑에 이르니 우리보다 먼저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이 오갔다. 경남일보사 앞을 지날 때 보행이 서툰 70대 남자가 중풍을 맞은 사람이 걷는 걸음걸이로 걸어와 지나쳐 갔다.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진양교 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 때는 비가 제법 내렸다. 운동하던 사람들이 서둘러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무림 제지 앞을 지날 때 우리 보다 50m 정도 앞서가던 사람이 홍가시를 심어 놓은 울타리에서 무엇인가 꺼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 생각으로는 우산을 숨겨 두었다가 비가 오니 가져가려고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119로 신고를 하려고 하니 부축을 받으며 일어 난 당사자가 한사코 하지 말라고 하면서 걸어갔다. 나는 그 분의 의견을 존중하여 신고하지는 않았다.
고마운 일은 한 사람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근로자의 차림새였다.
정황상으로 볼 때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 하고 지나친 사람이 여러 명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경우를 만났을 때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협심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구난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를수록 외면하는 빈도가 많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무관한 일에 휘말려 곤욕을 치를까 두려운 생각에서 일 것이다. 경찰서로 불려가 여러 번 조서를 받는다거나 증인으로 불려가는 정신적 고통이 있게 될까봐 아예 못 본체 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교통이 불편하고 환경이 열악한 농촌에서 자랐다. 동네사람들이 아프거나 위급하면 밤낮 구분 없이 우리 집으로 제일 먼저 찾아온다. 그러면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님은 내색 않고 그 집에 가서 도움을 주곤 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런 영향을 받아선지 나도 어려운 역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편이다.
1969년 하숙집 할머니를 따라 섬진강에 재첩을 채취하러 갔었는데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대부분 여자들이라 물속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동네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강가에서 자랐기에 수영을 좀 할 줄 안다. 그리고 해양훈련도 받았다.
옷을 벗고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강물은 맑았다. 헤엄처서 갔는데 모래가 움푹 파인 곳에 머리가 풀어 헤친 여자가 보였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서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들어가 머리채를 움켜쥐고 나왔다. 열예닐곱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해양훈련 때 익힌 방법에 따라 가슴 압박 술로 인공호흡을 시켜도 소생하지는 않더라. 경찰과 동네사람들이 왔는데 칭찬만 들었지 불이익은 없었다.
고향의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직원체육을 하는데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생이 물에 빠졌다는 연락이 왔다.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다. 나와 이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갔기에 먼저 도착했다. 국도변 다리 밑 웅덩이 인데 강폭은 넓지 않으나 물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속을 헤매다가 발에 걸리는 물체가 있어서 끌고나왔다.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었다. 점심 먹으러 갔다가 빠진 것을 늦게 알고 건졌는데 혜를 끄집어내고 물을 빼니 코에서 이물질이 쏟아져 나와서 손 쓸 겨를도 없었다.
완행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데 어린 아이 두 명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물속에 빠지는 것을 여러 승객들과 함께 목격했다. 비포장도로라 버스가 천천히 달리기 때문에 정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그것을 보고도 그냥 차를 운행해 가는 것이다. 나는 순간 운전석으로 달려가 큰 소리로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가면 어떻게 해요. 차세워” 했더니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달려가 구했더니 물만 조금 먹었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십 오륙년 전에 가족끼리 제주도 여행을 갔다. 질녀가 비탈길 내리막을 운전해 가는데 우리를 앞질러 승용차 한대가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조금 갔더니 그 차가 도로 옆 배수로에 처 박혀 있었다. 우리 식구들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달려갔다. 창문을 열고 보니 운전하는 여자는 이마에서 피를 조금 흘릴 뿐 이상이 없었고, 뒷좌석의 남편은 순간 정신을 잃었는지 넋나간 사람처럼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여고 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복 차림의 여자애는 축 늘어져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달려가 차례로 부축해 내고 여학생은 끌어 낸 다음 도로위에 자리를 깔고 눕히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형님 두 분과 형수 두 분이 팔다리를 주물렀다. 피를 흘리던 엄마는 길가에 꿇어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고, 아버지는 한참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기도를 드리던 엄마가 우리 곁을 오더니 아이를 주무른 다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형님은 어이가 없어서 버럭 화를 내며 “죽어가기에 꺼내어 살려 주었더니 모리배 취급을 한다면서 뒤지도록 놓아두고 가자” 하며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형님은 군에 있을 때부터 이런 경험을 많이 하신 분이다. 그래도 형수는 구급차가 도착할 때 까지 수족을 주무르다가 구급차에 인계 하고 돌아왔다.
교원대학에서 교장 연수를 받을 때다. 수료 마지막 날은 조별끼리 종파티를 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 조도 시내에 까지 가서 술을 먹었다. 그날 폭우가 쏟아졌다. 택시를 타고 오면 뒷문 200m 쯤 지점에 내려주고 회양해서 간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배수로에 술 취한 사람이 빠져 배수로 턱을 부여잡고 허리쯤 흘러가는 물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내 앞에 많은 연수생들이 지나갔다. 모두 외면하고 지나 간 것이다. 나의 룸메이트도 그냥 지나치려는 것이었다. 나는 앞서가던 룸메이트를 불렀다. 이분의 팔을 끌어 달라. 그러면 내가 내려가서 안아서 들어 올리겠다. 하고 배수로에 들어가 들어 올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무겁다. 내가 입은 옷은 말이 아니었다. 수료하던 날 풍문으로 이런 말이 나도는 것을 들었다. ‘포항의 고등학교 교장은 어떤 초등학교 교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등산을 갈 때도 경련에 사용하는 스프레이는 반드시 가져 다닌다. 종전에는 우황청심환도 가져 다녔는데 변질이 우려되어 그것은 그만 두었다. 경련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을 보면 먼저 다가가서 물어본다. 스프레이가 있는데 드릴까요? 허락하면 뿌려주고 주물러 해소해 준다. 여름철이면 높은 산에서 이런 현상을 자주 접하고 또 도움을 준다.
전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주말에 운전을 하여 등산을 갔다 오는데 날이 어두웠다. 사천에서 진주 사이의 고속도로 1차선 안쪽으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연이은 차들이 모두 지나갔다. 나도 못 본체 하고 지나갔다. 순간 내가 2차선으로 차를 몰고 나가 세운 후에 신고하면 내가 사고를 낸 사람으로 몰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쳐 간 것이다.
지금까지는 위급한 사람을 만나면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은 일을 하고도 곤욕을 치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젠 머뭇거리게 될 런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