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안삼환 선생님과 독일문학을 읽는 시간.
첫 시간은 <토마스 만 단편 전집1/부북스>에 수록된 단편 '타락'을 읽고 만났습니다.
이 시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지는 않았고 편하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되겠다는 안삼환 선생님 덕분에 자유롭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토마스 만의 '타락'이라는 작품을 가운데 두고 독일문학과 삶에 대한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일단 번역에 대한 여러가지 정리부터.
- 번역은 밥을 씹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다.
(영양은 있으나 다소 역겨울 수 있다는 의미)
- 번역은 여자와 같다. 아름다우면 충실(treu)하지 않고, 충실하면 아름답지 않다.
(요즘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으니 전하는 말이니...)
- 번역이란 무당의 접신과도 같다.
(신이 들리면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만 신이 끊기면 아무 것도 안 된다)
- 번역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을 살펴보는 이유는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죠. 그리고 읽다 번역이 좀 껄끄럽다 싶은 부분은 언제든 얘기해달라는 당부이기도 하고요.
- 오늘 읽고 이야기 나눈 작품 '타락'은 안삼환 선생님이 1977년에 처음 번역하신 작품이래요. 아이구... 그때면 내가 중학생이었나봐요. 설명을 듣고보니 풋풋한 안삼환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 더 반가웠습니다.
'타락'이 괴테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도입부와 거의 비슷한 설정과 전개인데 왜 그런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어요.
- '타락'은 토마스 만이 1894년 19살 때 쓴 습작품입니다. 처음에 발행한 토마스 만 산문선에는 안 들어갔는데 토마스 만 사후에 그의 전집을 발행하며 후학들이 넣었다 합니다.
- 1749년 생인 괴테가 <젊은 베르터의 괴로움>을 쓴 것은 1774년 그가 25살 때였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시민 계급이 전권을 잡지 못하고 핍박받던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하네요.
괴테 이후 100여 년 동안 독일의 모든 소설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절>의 변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합니다. 젊은 청년 토마스 만도 그 영향권 안에 있었을 테고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는 원래 '수업시절'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굳이 수업시대라 번역한 것은 좀 더 중요하고 대표성을 띠는 제목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이 작품도 안삼환 선생님이 번역하셨어요.
시민 계급이 어떻게 교양을 쌓아 성장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면 후속작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는 그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알게되고 원숙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Bildungsroman이라 합니다. 흔히 교양소설이라 얘기하곤하지요. 형성소설, 성장소설이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 어떤 것도 딱 떨어지는 번역이라 할 수가 없겠네요.
성장소설이라는 단어에는 성장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 이상의 목표가 없어 완성의 의미가 없습니다.
교양소설(주로 번역되는 단어를 사용하자면)은 성장을 넘어 인간의 교양과 원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만은 어떤 성장 배경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 토마스 만의 성장지인 뤼벡은 한자동맹의 맹주였습니다. 함부르크나 브레멘보다 더 부강한 도시였지요.
뤼벡특별시 자유시에는 돈이 있고 그에 따라 시민계급이 발호했고 귀족을 추방하거나 무력화하고 황제 직속 도시로 운영했지요. 시장을 선출하고 시장을 선출하는 권리를 가진 참사(참정관, 참정권이 있는 10여명)가 있었지요.
- 독일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인 뤼벡에서 토마스 만의 아버지는 재무장관이었습니다.
세습은 못하지만 도시귀족인 이 신분은 자신의 도시 안에서는 귀족 대접을 받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시민일 뿐이었습니다.
포르투갈계였던 토마스 만의 어머니는 도시귀족이었던 아버지 사후 뮌헨으로 이주해서 살롱 등을 누리는 자유로운 삶을 즐깁니다.
괴테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도덕률을 어머니로부터 이야기하는 기질을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토마스 만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 토마스 만은 아버지와 어머니, 북부 독일의 성실한 삶과 남부 독일의 부박한 삶, 근엄한 북독사람 기질과 사치스러운 예술과 기질,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술과 기질과 시민 기질(속물 근성/시민과 속물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이지요)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던 토마스 만의 젊은 시절 작품에는 'Ironie'가 담겨 있습니다.
- 독일어 단어 Ironie는 반어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와 달리 추상성을 갖고 있습니다. 반어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 반어성, 두 세계에 다 비판적인 근성, 이런 것을 말하지요.
65살쯤 된 토마스 만은 Ironie를 넘어 'Humor'에 이르게 됩니다. Humor 역시 독일어에서는 추상성을 내포한 단어인데 두 세계를 삐딱하게 보는 경지에서 업그레이드 해서 두 세계를 내려다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토마스 만의 Humor를 느끼고 싶다면 <요셉과 그 형제들/살림>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주문 환영!
단편 '타락'을 읽으며 눈여겨 볼 것은...
1. 괴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뢸링은 메피스토펠리스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2. 라일락 모티프도 주목해서 보자. 초대한 친구집, 벨트너의 집앞 등에 라일락꽃과 향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젤텐 박사의 순진했던 시절에 대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3. 액자소설이다. 액자 안 이야기는 여배우 벨트너를 사랑한 젊은 젤텐 박사 이야기, 액자 밖 이야기는 네 명의 친구 이야기이다.
액자소설은 왜 어떤 때 사용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 라우베는 여성해방론자이며 여성에 대한 환경과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순수하며 사회적 약자라는 라우베의 주장을 듣고 젤텐 박사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 제목으로 사용한 Gefallen를 사전에서 찾으면 호의, 친절 이런 뜻이 있지만 떨어지다, 낙하, 타락, 윤락... 이런 뜻이 있다. 원래 윤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한데 책을 읽지도 않은 혹자들이 '호의'로 번역하기도 한다.
- 누구의 타락인가?
액자 안 이야기에서는 베르너 양의 타락으로 볼 수 있으나 액자 밖 이야기에서는 순수함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젤텐의 타락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 액자소설 안의 이야기는 바깥 이야기에 대해 영향을 준다. 이 이야기의 경우도 라우베의 주장에 타격을 주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절대적인 진리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화자는 안과 밖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 토마스 만은 라우베가 주장하는 여성 해방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세기말 비엔나의 현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고 자연주의(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참여적인 입장을 취하는) 주장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액자소설을 사용하는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액자소설 형식을 갖고있는 이청준의 '소문의 벽' '매잡이'를 읽어보세요.
마음에 남는 부분은...
- 그는 먼저 그녀의 얼굴에 반했고, 그다음에는 그녀의 손에 반했으며, 그다음에는 그녀의 팔에 반했다. 이따금씩 그녀가 고대극의 어떤 배역을 맡아 맨살을 드러내 보이던 그 팔 말이다. -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그녀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아직 전혀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영혼까지도 말이다.(23쪽/알모)
- 사실이었다 - 이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며, 침통하고도 서글픈 잔인함으로 라일락을 움켜잡는 그의 모습이며 모두 바로 그때 그대로였다. - 그런데, 그에게서 그 '선량한 녀석'의 흔적이라고는 더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77쪽/엉성이)

첫댓글 후기만으로도 귀한 수업을 들은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알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