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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하느님
이제 나는 하느님이 나의 아빠이심을 안다.
날마다 매 시간마다 나는 자신감과 담대함으로
아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간다.
아빠 하느님은 나를 심판하는 분이 아니시다.
아빠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더 이상 없다.
나는 이 세상 다른 누구보다
아빠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참으로 편안하다.
- 윌리엄 바클레이
***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기도문이나 공동체 전례에서 하느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 불렀을 때, 그 호칭이 2,000년 전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급진적이고 충격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은 물론이고 유다교 문헌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가 6,828번 나오지만,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입으로 발음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꼭 소리를 내어 읽었는데, 이 이름이 나오면 “음, 음, 음” 하고 지나가거나 ‘나의 위대하신 주님’이라는 뜻인 ‘아도나이’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 까닭은 허물 많고 죄스런 인간의 입술로 지극히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더없이 불경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구약성경에서 15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모두 은유적인 표현이거나(당신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직유적인 표현일 뿐(당신은 우리를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십니다), 직접 호칭을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하느님께서는 아도나이보다 아버지로 불리기를 원하신다. 안, 아버지보다는 아빠로 불리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밀함과 애정을 가득 담아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깊은 신뢰와 온전한 의탁이 동반된 친밀한 관계에서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의 경직된 관계는 애정 깊은 인격적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게 하신 것은 물론, 가르치실 때에도 자주 하느님을 가리켜 제자들의 아빠, 곧 ‘너희의 아빠’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열두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1세대 제자들은 하느님을 아빠Αββα라고 불렀습니다.(마태 6,9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복음이 팔레스티나 밖으로 전해지면서 헬라 문화권(그리스 문화권)에서 살던 2세대 신자들은 그리스어로 하느님을 ‘아빠 호 파테르’라 불렀습니다. 2세대 신자들이 하느님을 이렇게 불렀다는 증거는 바오로가 50년경 헬라계 신자들에게 써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아빠 호 파테르)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그리스어를 쓰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아람어 아빠 뒤에 그리스어 파테르를 붙인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있지만 아빠란 뉘앙스를 갖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빠를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할 때, 아버지라는 의미의 파테르를 덧붙인 것입니다.
50년대 중반 바오로 서간이 쓰인 후 약 15년 뒤에 나온 마르코복음서를 보면 바오로 서간과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파테르’라고 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아빠는 떨어져 나가고 파테르로만 불리게 됩니다. 80년 이후에 쓰인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을 파테르라고만 합니다. 복음서에는 170번 정도 파테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모든 파테르에 아빠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아빠는 아람어 아빠와 발음도 같고 뜻도 같습니다. 다만 악센트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아람어의 아빠는 악센트가 뒤에 있어서 아빠의 ‘빠’가 조금 올라간다면, 우리말 아빠는 ‘아’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말이 참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란 속담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와 의미가 같고,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도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5,43)는 구약의 계명과 의미가 같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갈라 6,7)와, ‘웃으면 복이 온다’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16)와 의미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멘’도 그러한데, 우리는 누가 맞는 말을 하면 무릎을 탁 치면서 “암! 암!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이때 감탄사 ‘암’은 성경에 나오는 ‘아멘’과 발음이 비슷할 뿐 아니라 의미도 같습니다. 둘 다 전폭적인 동의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어를 통해 존재의 의미가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 맺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하느님 말씀 곧 성경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언급한 세 언어, 곧 아람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의 원천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히브리어는 성경에 쓰인 언어이고,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 유다인이 사용한 언어이며, 그리스어는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이 세 언어의 뿌리는 페니키아입니다. 인류 최초로 알파벳을 만든 페니키아 사람들은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에 근거를 둔 해상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발전된 조선술(造船術)로 지중해 전역, 곧 이집트 북부지역부터 이탈리아 남부와 스페인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교역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이들이 세운 도시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엘리야 예언자와 사렙타 과부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렙타입니다. 사렙타는 티로와 시돈 사이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교역 식민지를 통해 페니키아 알파벳이 전해지면서 두 개의 새로운 언어가 생겨납니다. 팔레스티나가 속해 있던 시리아 지역에서는 아람어가 생겨나고, 아람어는 다시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파생됩니다. 한편 그리스 사람들은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자신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만듭니다. 유다인들은 언젠가부터 아람어에서 파생한 히브리어를 거룩한 문서 곧 성경에만 사용하고, 일상에서는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빠’란 말에는 복음 전체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14세기 신비신학자이며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아빠 하느님을 ‘우리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아빠 하느님께서 얼마나 섬세하신지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29-30)
우리 중에 누가 자기 머리카락 숫자를 알고 있을까요? 머리카락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사람도 자기 머리카락의 숫자는 알지 못합니다. 빗질을 잘해서 단정하게는 할지언정 한 올 한 올 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셨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빠 하느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있음을 뜻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닥터 지바고>를 보면, 지바고의 이복동생인 예프그라프 장군과 타냐의 대화가 나옵니다. 타냐는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장군이 타냐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니?” 타냐는 멈칫거리다가, 혁명 중에 건물은 불타서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아수라장에서 아버지랑 헤어지게 되었다고 대답합니다. 장군이 다시 묻습니다. “정말로 아버지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니?” 타냐가 비로소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내 손을 놓고 도망치는 바람에 아버지랑 헤어지게 되었어요.” 장군이 진실을 말해줍니다. “친아버지는 자식의 손을 결코 놓지 않는단다. 코마로프스키가 너의 친아버지였다면, 그는 결코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서야 타냐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닥터 지바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이라도 자식을 내동댕이치지 않습니다. 자식을 꼭 끌어안고 운명을 같이 하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손을 꼭 쥐고 계십니다. 그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서 우리 손을 빼내면 빼냈지 그분께서 먼저 우리 손을 놓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복잡한 거리에서 어린아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어린아이는 호기심이 커서 뭔가 신기한 것이 보이면 언제든지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안전하려면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눈을 팔아도 언제나 우리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십니다. 이런 아빠가 있기에,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자주 하느님을 “아빠!” 하고 부르며 힘과 용기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긴장과 버거움으로 낙심하거나 두려움에 빠질 때 “아빠!” 하고 하느님을 부른다면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 있을 때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있듯이, 우리도 그분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으며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풍파는 우리를 힘겹게 하지만 자주 아빠를 부르며 힘과 용기를 되찾는 것입니다.
울새가 참새에게 말했네.
“난 정말 알고 싶어.
인간들은 왜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그토록 서둘면서 염려하지?”
참새가 울새에게 말했네.
“친구야, 내 생각에
그들에겐 하늘에 계신 아빠가 없어서인 것 같아.
너와 나를 돌보아 주시는 그 아빠 말이야.”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풍파는 우리를 힘겹게 하지만
자주 아빠를 부르며 힘과 용기를 되찾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