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 이은봉 시인
<제5회 질마재 문학상> 심사평
인생을 배운 후에 시가 나올 때의 무르익음의 언어
본심: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예심: 미네르바 편집위원회
제 5회 <질마재 문학상> 심사에 올라온 시집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지난 한 해의 시집 출간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매우 풍성했다는 것과 다양한 개성의 스펙트럼을 지닌 시인들이 기량을 빛내며 만만찮은 성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권 남짓한 시집들을 논의했으며 우리 시단의 풍성함과 다채로움에 오롯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어떤 시집들은 전문적으로 기교를 배운다는 요즘 가수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서 기량은 우수하지만 무언가 허전하고도 화려한 공허함을 주기도 했다. 결국 좋은 문학이란 포스트모던 감각으로 명멸하는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 그 표피를 스치며 지나가는 얇은 언어들의 무도회라기보다는 깊은 삶에서 시간과 경험의 가혹함을 견디면서 오랜 숙성의 항아리를 거쳐 우러나온 무르익음의 언어가 아닐까, 라는 의견이 오갔다. 결국 시적 언어의 문제는 ‘교감과 감동’인 것이다.
결국 심사위원 전원의 일치로 이은봉 시인의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제 5회 <질마재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만만찮은 인생의 무게와 시간의 숙성을 거쳐 깊은 상상력과 따뜻한 언어로 묵직한 삶의 정경을 보여주는 이은봉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의 넓은 생명력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에 버려진 우리 이웃의 그늘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늘 비속한 세계에서 망가진 개인들의 이력이 들어있고 아픈 기억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넓은 가슴의 긍정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타이어’에서 ‘지장보살’을 보며 “지장보살이 아프다/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 그는 다시/ 거름을 만들고 있다 샐비어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을 꾸고 있다”처럼 망가진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자연과 이물질인 문명과의 불가능한 순환을 꿈꾸기도 한다. 그의 시 속에는 만물이 그물코처럼 얽혀있는 존재의 꿈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의 이물질(문명)로 인해 그 만물의 순환이 깨어진 끔찍한 현장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시인이란 바로 그 불가능한 것의 순환의 둥근 원환圓環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는 자가 아니겠는가.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삶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황폐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의 생을 관찰하는 안정된 상상력”(김남조)과 “「민들레꽃」이 보여주는 따뜻한 감수성과 자연과의 교감 뒤에 숨어있는 개인의 슬픔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 (문효치)을 통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도 무언가 망가진 부조화를 느끼는(만드는) 근대 인간의 소외와 슬픔을 웃음기 묻은 시선으로 원숙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제5회 질마재 문학상의 수상 시집으로 선정되었다. 축하를 드리며 더욱 대성을 기원한다.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수상자 대표시>
민들레꽃 외 5편
농협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
눈 내려뜨면 낮은 둔덕 아래, 계집애의 엄니를 닮은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데기들아
껍데기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집의 집
옛집, 무너진 담벼락 아래
함부로 흩어져 있는, 블록 벽돌 속
너무도 익숙한 텃새 두 마리
번갈아 드나들고 있다
날카로운 부리에는
메뚜기, 잠자리, 풀여치 따위
죽어도 좋다, 온몸 파닥거리며
꽈악, 물려 있다
거칠 것 없는 햇살들
두충나무 넓은 이파리를 뚫고
팍팍, 터져내리는 늦여름 오후,
샛노란 새끼들의 주둥이
드높은 하늘을 향해
쫙쫙, 벌리고 있다
목청을 높이고 있다
짜식들, 발가락까지 샛노랗다
옛집,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멋대로 나뒹구는 블록 벽돌 속
거기, 집의 집 있다
쪼르르, 찍찍, 짹짹
찌르르, 뽀짝뽀짝, 뽀오
어린 신의 목소리 즐겁다.
저 석양
만추의 들판, 가득 채우며 쏟아져내리는
저 석양, 탱자빛 노을만으로도
마을 뒤편 대나무 숲은 자란다
우물가 텃밭 고추들은 익는다
대지의 마음, 촉촉이 적시며 퍼져내리는
저 석양, 삼베빛 노을만으로도
고향집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온종일 재재대던 참새들 귀가를 서둔다
울바자 아래로 뛰어내리는 단풍잎처럼
함부로 나뒹굴고 있는 석양이여
뼈만 남은 앞다리 푹푹 꺾어가며
논두렁 터벅거리고 있는 노을이여
부지깽이로 문지방 두드리며 밀려오는
저 석양, 볏짚빛 노을만으로도
벌떡 일어서는 당신, 먼먼 사막 길 걷고 있다
곳간마다 볏가마니, 차곡차곡 쌓고 있다.
발목 잡힌 봄
무엇이 봄의 발목을 잡고 있을까
산 고개 넘어오다 노루 올무에라도 걸린 걸까
겁에 질린 청매화 꽃망울들
피다가 만 낯빛 하얗게 질린다
지구 저쪽에서는 지진 해일로
해변가 마을 폭삭 무너지고 있다
지구 이쪽에서는 겨울이 가지 않고
눈보라로 나뒹굴며 뻗대고 있다
식장산 꼭대기의 휘황한 안테나 접시들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걸까
사람들의 마음 속 벽시계까지
빈대떡처럼 찌그러진 지 오래다
발목 잡힌 봄, 어디 산마루를 넘어오다
뽕이라도 처먹고 벌러덩 나자빠져버린 걸까.
오늘치의 죽음
손톱을 깎는다 내 안에서
자라는 죽음을 깎는다
수염을 깎는다 내 속에서
자라는 어제를 깎는다
뾰쪽뾰쪽 밀어올리는
오늘치의 죽음
오늘도 나는 오늘치의
어제를 키운다 내일도 나는
내일치의 죽음을 키운다
덥수룩이 자라오르는
내일치의 머리카락
내 안에는 뭇 죽음을 먹고
뭇 생명이 크고 있다
내 속에는 뭇 생명을 먹고
뭇 죽음이 자라고 있다.
[제5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소감]
‘질마재신화’ 혹은 ‘질마재문학상’에 대한 몇 가지 상념
이 은 봉
졸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으로 ‘질마재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질마재문학상은 우선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일지사, 1975)를 떠올리게 한다. 『질마재신화』는 이내 미당의 고향마을로 달려가게 한다. 미당의 생가와 문학관을 방문했던 적이 모두 몇 번인가. 10여 차례가 넘으리라. 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적만 해도 여러 차례이다.
‘질마재문학상’은 미당의 시업을 기리는 데 의미가 있다. 우리 세대의 시인 중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시를 공부한 사람은 없다. 나도 역시 미당의 시를 읽으며 시를 공부해왔다. 미당 전집을 읽다가 쓴 논문만도 2편이나 된다.
한국현대시사에서 미당만큼 좋은 시를 쓴 시인은 많지 않다. 미당의 시집 가운데에서는 『질마재신화』보다 『떠돌이의 시』(민음사, 1976)나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 1997)를 좀 더 좋아한다. 물론 미당의 시집 중에는 늙은 떠돌이의 詩(민음사, 1993)도 ‘떠돌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다. 내가 미당의 시집 가운데 『떠돌이의 시』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이들 시집에는 미당 나름으로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좀 더 잘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집 『떠돌이의 시』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질마재신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이 시집 『질마재신화』 역시 미당이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런 이유만으로도 나는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는 첫째 백석의 시집 『사슴』에 대한 대타적 자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시집에는 새마을운동, 산업화, 개발과 건설 등 이른바 근대화에 대한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이 작동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집과 함께 하는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 중에는 1960년대 이래 우리 시단을 풍미해오던 모더니즘시에 대한 반감도 들어 있다고 이해된다.
미당의 고향 질마재는 아직 그런 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고향 ‘막은골’은 흔적도 사라져버려 자꾸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세종시가 건설되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나는 내 고향의 모습을 시로라도 남기고 싶어 「막은골 이야기」 연작시에 매달리고 있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나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가 없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질마재문학상’을 받은 만큼 더욱 분발해 졸시집 『막은골 이야기』를 잘 완성해볼 생각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세 분의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특별한 연고가 없는 데도 받는 상,고맙고, 송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