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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리 물고기를 헤엄치게 하는 맑은 눈의 시인 |
「노천명의 사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눈망울이 참으로 선하면서도 그리움이 서려 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은 애잔하지가 않다. 세월을 겪은 나이 탓일 것이다. 소녀처럼 젖은 눈길이 아니라 생활을 딛고 일어서는 건강함이 보인다.」
-<지붕 밑 푸른 바다> 추천사 中, 사진가 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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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어서원의 물고기 주인, 맑은 눈을 가진 김수우 시인. |
2009. POPBUSAN |
한 때 중앙동은 부산의 예술인과 문화인이 모여 담론하던 광장이었다. <백년어서원>은 차 한잔 놓고 인문학을 논하는 광장의 재현이다. 제각기 의미 있는 이름을 가진 백마리의 목각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그윽한 커피 향과 빼곡한 책이 있는 곳. ‘카페’이지만 ‘서원’이란 이름을 단 <백년어서원>지기, 김수우 시인을 만나 보았다.
▲ 백년어서원에는 나무로 깎아 만들어 제각기 뜻있는 이름을 달고 헤엄치는 백마리의 나무물고기가 있다. 2009. POPBUSAN
-어떻게 <백년어서원>을 만들게 되었나?
커피는 나중의 생각이었고, 일단 책을 나누고 싶었다. 책을 나눈다는 것은 가치를 나누는 것이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많이들 놓치지만 살면서 자기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참 중요하다.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책 몇 권 밖에 없다. 나누지 않으면 작업실에 들어갈 책들이다. 그렇게 나눔의 공간을 열자, 생각하니까 커피를 배워야 했다. 하다못해 세라도 낼 수 있게 이왕 하는 것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야지 했다. 이런 공간이 생기니 세미나, 강연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모였다. 목각 물고기를 깎아 주신 분, 오디오 선물해 주신 분, 벽에 걸 그림을 그려 주신 분 속속들이 모였다. 이 공간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뜻이 모인 것이다. 나는 생각만 했다.
-가치를 소통하는 문화공간으로서 <백년어서원>의 역할은?
찾아 온 사람들이 누구 서재에 온 편안한 느낌이 좋다 한다. 도서관 같다는 사람도 있고, 도심 속의 절간 같다는 사람도 있다. 상업적인 느낌보다 책을 읽다 금방금방 이야기도 나누고 스스로 힘을 얻어서 가신다고 하니 가치를 나누고 싶던 본래의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 놓고, 묵묵히 대여섯 시간 동안 책을 다 읽고 가실 때 보람을 느낀다. 내가 저 사람한테 필요한 공간을 주었고, 시간을 보내고 가셔서 다행이다 생각한다.
<백년어서원>은 카페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서원이다. 인문학이 사람의 가치에 대한 공부다. 이곳에서 열리는 강의나 모임도 인문학이라는 큰 맥락에 따라 진행된다. 지식이 아닌 가치를 나눌 수 있는 강의를 준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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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를 나눔이 먼저이고 커피는 그 다음이라 겸손 하시지만 백년어서원의 커피맛은 실로 훌륭하다. |
2009. POPBUSAN |
-시집과 사진집을 출간하셨는데, 가치를 나누는 방법으로 시와 사진을 택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책을 무지막지하게 좋아했다. 시쓰기는 특정한 시작점 없이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나이 오십 줄을 넘기고 나니 시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이 더해진다.
사진 찍기는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와서 외로움에 시달리던 시기에 시작했다. 우울함을 떨치려 아무렇게나 덜컥덜컥 찍어온 사진 24장(필름 한통을 찍으면 24장의 사진이 인화되어 나왔다.)을 보고 또 보면서 일주일을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이니 사진만 두고 보기 아까워 짧게 일기를 덧붙인 것을 좋아해준 사람들 때문에 <하늘이 보이는 쪽창>이란 책이 나올 수 있었다. 맨눈으로 볼 때와 달리 사진기의 뷰파인더로 넘겨다 볼 때 가지는 사물들의 존재감이 좋다. 사진의 프레임 안에서 사물들은 말을 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활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로 귀결된다. 사람답게라 함은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행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자유롭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단 말인가. 시대가 경쟁하게 만들고 문명구조가 개인을 억압한다. 자본주의는 정신보다 돈이 우선이 되기 쉬운 소비구조를 가졌다. 아기일 때는 배만 불러도 행복한 인간 존재는 성장하며 사회화 되는 과정 중에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자유로운 사람은 남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영성의 성장에 현실적 책임감을 느낀다.
▲ 믿을 ‘信’의 이름을 가진 물고기 옆에 손글씨로 적혀진 메시지. 2009. POPBUSAN
-문인들의 활동지였던 중앙동에 <백년어서원>이 자리 잡은 것이 우연은 아닌것 같은데?
중앙동 일대를 ‘원도심’이라 하는데 이곳이 한때 부산 문화의 중심지이자 산실이었다. 부산다운 문화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 일대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특정한 지역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가치를 추구하는 내 본래의 활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百年魚’는 앞으로 백 년을 헤엄쳐갈, 백 마리의 나무물고기를 말한다. ‘百’의 우리 옛말이 ‘온’이듯 이 숫자는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물이 끓는 온도가 백이며, 한 세기가 넘어가는 단위, 만점을 일컫는 백점 등 많은 것을 은유하는 풍요의 숫자이다. 그 기대감의 숫자는 늘 근원적 소망이다. 또한 물고기는 인류문명사의 흐름을 잇는 원형적 상징이다.
<백년어서원>이 그 자체로 근원적 희망이 되길 바란다. 이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시를 논하고, 가치를 찾아 세상으로 나아가듯 부산의 지역문화도 자신만의 가치를 향해 풍성하게 자리 잡고 나누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