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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22일 (만 53세), 돼지띠, 처녀자리,
경기 김포시 출생
1982년 시운동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졸업
주요작품
마음의 오지 2011, 바쁜 것이 게으른 것 2009,
공간 가득 찬란하게 2007, 산책시편(민음의 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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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이 더 큰 종
종소리 그래서 더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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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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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아침
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 뜬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
빚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정오가 오기 전에 알았다
소금은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소금은 빛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가장 무거운 앙금이다
소금은 오직 해를 바라보면서
소금기 다 뺀 물의 잔등을 떠미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소금은 있는 힘을 다해 빛을 끌어안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놓친 그대여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인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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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물은 그릇을 느끼지 않는다
봄길이던가
그리움도 외로운 것도 덧없이 노곤하기만 해
길에 나를 띄우고 갈 때에
남녁이었는가 꽃을 피워내는 뿌리들이 한껏 고단할 때
쉬엄 저녁이 오고 이슥하게 달빛도 뿌려졌었다
물에서 배워 물이 되려고 무진무진
길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포구에서 끊어진 길을 싣고 푸른 다도해던가
어느 섬으로 들었었다
바다라고 해도 물을 느끼는 것은 손톱만도 못한
파도 같은 물결들일 뿐
해진 옷에선 사람의 소금이 엉기고
나는 어느덧 스물이었다
훔쳐낸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찍듯이
떨면서 어른이 되어버렸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론 눈앞이 아른거리는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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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가는 길에 은행잎 구른다
저무는 시월 소리내면 읽히지 않고
저녁에도 부는 바람 가끔씩 있어
긴 그림자 버짐 같은 먼지 일으킨다
한 입 시린 무거나 배추속 같은
그날들도 큰소리로 읽기엔 부끄럽다
가는 길 갈수록
가슴 설렐 일 드물 것인데
가는 길 어느새 가파르다
지는 노을 산 그림자
한짐씩 어둠의 푸른 데로 옮겨 앉는다
이 밤 한번 그리움에 져주자
나 아직도 나에게 들킬 일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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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버린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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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감옥
가장 큰 감옥은
내 안의 감옥
낯익은 감옥 그곳
낯익어 설레임 사라진
내 안의 감옥 그곳
눈 닫아걸고 귀 연 지 오래
아주 오래 이윽고 내 안이
끔찍한 지옥임을 알았을 때
등롱초 등롱 밝아지듯
저마다 심지가 되기 시작한
마음의 세포들 설레
설레어서
그래, 같이 살자꾸나
어서 들어오너라
마음의 오지 / 문학동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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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욕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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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비
저문 비 내리고
나는 듣는다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보다 깊게 만나는 물방울의
맨 처음을 나는 듣는다 지나가버린 잠을
밟으며 잃어버린 발자국 소리를 건지며
저문 비를 곁에 둔다
오늘이 며칠일까 궁금하지 않던 날들을
저문 비에 젖게 하며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의 흰 것보다 빛나던
그 밤의 파열을 한아름
나는 듣는다
시집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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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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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오늘 하루도 영 정갈하지 못하다
어제는 불길했고 또 그저께는 서툴렀다
가끔 계절이라는 것이 이 도시를 들렀다 간다 신기하
다 나른해 본지도 오랜만이다 피곤으로 단단해지는 퇴
적암들 나이에는 다들 금이 가 있다 비둘기 수백 마리
가 1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며 낮게 난다 새들도 도시
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버린 성냥불 때문에 혹은 켜놓고 나온 컴퓨터
때문에 회사가 불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
기면 잠이 안 온다
온갖 죽음의 아가리들이 도처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
는 게 보인다 퇴근길에도 한 발짝도 떼놓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박모가 살얼음처럼 깔리고 갑자기 내가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어진다
옛날에 배가 자주 고프던 시절에 온 몸을 활짝 펴고
햇빛 안으로 들어가 누운 적이 있었다 마치 내 몸에 엽
록소가 있다는 듯이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그런 여름날
오전의 야외 식탁 같은 게 차려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살이 많이 익었었다
시간에게 정갈하고 싶었다 세련되고 싶었다
내 유전자는 그리워하는 정보밖에 가진 게 없다 아
주 가끔 죽음처럼 옛날을 떠올리게 되는 아픈 날이면
유전자들은 모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먼 반딧불
이 우는 소리 말이다 그럴 때는 살아 있다는 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마음의 오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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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박물관 소식-거리에 낙엽
늦가을과 초겨울이 겹쳐지는 저녁입니다, 저녁이고 찬
비 내립니다, 사람의 불빛들이 아스팔트 위로 번지르르하
고, 나는 어둡고 추워서 알고 있던 이름들을 불러보는데,
그이들은 여기에 없습니다
없고, 농업박물관 앞, 보도 블록에 박혀 있던 가로수들이
낙엽을 떨어뜨립니다, 집광판이었던, 뿌리의 입이었던 활
엽들이 젖어서 활강하는 걸 보고, 아 저것들이 방하착(防
下着), 방하착하라, 하며 자진하는구나, 저것이 한 생애의
유언이구나, 라고 쓰려다가, 이내 치워버립니다
저 낙엽들은 뿌리로 내려가 만나지 못하고 매립지로 실
려가겠지요, 그런데 어디 낙엽만 그런 것일까요, 이번 가
을만 그런 걸까요, 뿌리로,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무
의 전생, 혹은 후생들이 찬비 내리는 보도 블록에 착, 달라
붙어 있습니다
농업박물관 앞, 깨진 보도 블록 한 장을 들어내고 젖은
낙엽 한 장을 집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데,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르겠습
니다, 모르겠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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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견
마음은 늘 먹이 쪽에 가 있다
먹고 나서도 매양 먹이 타령이다
마음에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마음은 또다른 마음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음이 사회간접자본이었으면 좋겠다
공기나 별빛 또는 공룡시대처럼
거기에서 마주친 두살배기 아이의 웃음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처럼
개인이 가질 수 없었으면 좋겠다
배타적 소유권이나 저작권을 너나없이
포기했으면 하는 것이다
왼종일 먹이를 잔뜩 먹고 돌아온
마음들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
텔레비전이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마음들의 잔등이 왼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음들은 새우잠을 자면서도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온 온라인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뭔가 물컹했다
국가였다 가슴에 늘 국가가 들어있는데도
매일 아침 깜빡깜빡 한다
내 속엔 마음이 너무도 많아
내 마음 쉴 곳이 없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낯선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창작과비평 / 2006.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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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던 옛집 지붕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
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붙여 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정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올릴는지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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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와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는 브람스가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붙인 악상기호다.
2007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 중앙일보.중앙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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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문학청춘 / 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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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고인다
봄이 고이더라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 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에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이고여서
너럭바위에도 잔뿌리를 내리더라
낮게 갠 하늘 한 걸음 더 내려와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봄이 고이고
곷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졸탁 졸탁이러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서정시학 /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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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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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꽃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저기 뜨락에 핀 꽃
여름꽃을 보고 있다
어둠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워서 여름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곷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제국호텔 /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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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
따뜻하게 헤어지는 일이 큰일이다
그리움이 적막함으로 옮겨간다
여름은 숨가쁜데, 그래
그리워하지 말자, 다만 한두 번쯤
미워할 힘만 남겨두자
저 고요하지만 강렬한 반란
덥지만 검은 땅속 뿌리에 대한
가장 붉은 배반, 칸나
가볍게 헤어지는 일은 큰일이다
미워할 힘으로 남겨둔
그날 너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내 혀, 나의 손가락들 언제
나를 거역할 것인지
내 이 몸 구석구석 붉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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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리라
가지 않은 곳은 모두 미래다
그날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도
읽지 않은 그 책의 몇 페이지도
옛날이 아니다
산정에서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얼음 속에서 얼음 속으로
샹그리라, 라고 발음하는 것 같다
샹그리라, 오래된 투명한 단단함이
내장하고 있는 깊고 멀고 높은 소리
만년설 맨 아래를 지탱하는 소리
샹그리라
화살기도하듯이 외운다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시샤퍙마 초오유
희박한 산소를 모아 중얼거린다
저기, 히말라야 하이웨이
내 전생들이 새카맣게 올라오고 있다
제국호텔 / 문학동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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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 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으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햋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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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기다림에 진 것, 져 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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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
마음은 저만치 흘러 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속으로 밤이 들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 내질 못하는 것이다
신발 끈 느슨하게 풀고
저녁 어귀를 푸르게 돌아오던 그날들
노을빛으로 흘러내리던 기쁜 눈물들
그리움으로 힘차하던 그 여름 들길들
그때 나에게는 천천히 걸어가 녹아들
저녁의 풍경이 몇 장씩 있었으나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은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몸 바깥 창궐하는 도시 밖으로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텅 빈 항아리에 금이 간다
어둠이 더 큰 어둠 속으로 터져 나간다
산책시편 민음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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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 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 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 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 나무들
마음의 오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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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나가다
- 손 이야기 1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현대문학 / 2006년 7월호
도보 순례자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여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제17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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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獨居)
강 건너가 건너온다
누가 끌배를 끌고 있다
물안개의 끝이 물을 떠난다
봄이 봄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나무 타는 단내가 봄빛 속으로 스며든다
내륙이 온통 환해지고 있다
황급히 속옷을 챙겨 입던
간밤 꿈이 생생하다
내가 홀로 서지 못해
내가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이다
냉이 씻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물길 따라 달려가던 능선들이
문득 눈을 맞추며 멈춰선 곳
바람결에 아라리를 배우는 곳이다
끌배가 끊어진 길을 싣고 있다
강의 이쪽을 끌며 건너오고 있다
외로울 때면 양치질을 했다는
젊은 스님이 생각났다
금
그 시절의 슬픔들이 모래와 함께 강으로
내려가 물의 힘으로 증발하고 어떤 것은
물 아래로 앙금이 되어 짓눌리고 하여
금이 된다면, 세월이 흐른 만큼 또 어디에서 흘러와
내가 나의 뒤에 나타날 어떤
슬픔의 문 앞에서 빛날 수 있다면,
나는 풀밭에 두발을 담그고
풀밭의 뿌리에서 몸 바꾸는 나의 무수한
아버지들과 나의 아이들이 이루는 음악을
듣곤 한다. 태양은 정오에도 멈추지 않고
쉬임없이 그의 두 팔을 움직여 지나간
겨울을 아주 오랜 시간의 어느 자리에
앉게 한다. 나는 그 시절의 슬픔의 이름들을
노트에 적는다
~~~~~~~~~~~
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
나팔꽃처럼 나는 아침에
피어나지 못한다
엊저녁 젖은 길 바지에 매달려
흔들린다 아침에게 늘
미안하다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
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
아침 지하철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과……
점심에 먹을 개소주가 흘러나온다
두 눈 부릅뜨면 해를 볼 수 없다
병이 날 만큼 게을러 보고 싶다
시청역에 붙은 위장약 광고
꾸역꾸역 개찰하며 약봉지를 버린다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
게으르면 거짓말을 못한다
서머타임 시계바늘을 돌려놓으며
사람들이 욕을 한다
피로회복제를 먹는 점심
게으른 사람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아플 만큼 한번 게을러야 한다
해바라기처럼 나는 노을을
놓아주지 못한다 늘 저녁에게
잘못한다
게으른 사람만이 볼 수 있다
~~~~~~~~~~~~~~~~~
마흔 살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민들레 압정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다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빛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이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였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다 물기가 남아 있는 씨앗은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다 바람에 불려가는 씨앗은 물기의 끝, 무게의 끝이었다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이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는다 만나는 순간, 이미 이별도 출발한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올리며 지극한 결별을 준비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속력은 같다
씨앗 다 날려보낸 가을 민들레가 압정처럼 박혀 있다
시집 / 제국호텔
~~~~~~~~~~~~~~~~~
그렇다고 기린이 왜가리를 좋아할 리 없다
俗離山에 친구 만나러 간다
나는 俗里에 있고
친구는 俗離에 있다
속리산 가는 길에 나는
아직 뿌리 튼실하지 못한 논에서
아직 농약에 죽지 않은 우렁이며
미꾸리를 쪼아대는 왜가리를 보았다
기린은 고개 숙이지 않기 위해
모가지가 길어졌지만
왜가리는 더 깊이 쑤셔박기 위해
모가지가 길어졌다
밤에 왜가리는 소나무 위에서
자지만 기린은 땅에서 꿈꾼다
속리산에서 내려온 친구
잿빛 왜가리에게 손을 내민다
~~~~~~~~~~~~~~~~~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계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 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 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 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 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 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 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흘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시집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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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燈明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
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
심지의 힘으로 맑아져
작은 등명이고 싶었다
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
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
등명리에 밤이 오고
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
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그늘이어도 좋았다
질문을 만들지 못해 다 미쳐가는
어떤 간절함이 찾아왔다가
등명을 핑계대며 발길질을 해도 좋았다
심지 하나로 꼿꼿해지면서
알았다 불이 붙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좋았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라는 어떤 그리움이 찾아와
오래 된 심지에 불을 당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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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동백의 꽃말은 투신
죽을 날을 알아버린 이모처럼
눈 소복하게 내린 날을 골라
떨어진다 멀리로도 아니고
바람 없는 날, 툭
뿌리께로 곤두박질한다
이모부 발치에 쓰러지신
이모 때문에 당신은 발등이
아프셨고 동백꽃 철마다 밟혀서
그 집에서 오래
홀로 늙으셨다
산책시편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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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수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 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 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도 흔들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시집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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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거룩하다
오늘도 지구를 일용했다
아침에 지구를 먹고
낮에 지구를 많이 사용하고
새벽까지 지구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버린 것들은 모두
지구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도 지구에게 미안했다
나는 이 지구 위에서
자력 신앙이 아니다
자력은 나의 힘이 아니다
현대시학 / 2004, 7월호
좋은시 2005 / 삶과꿈.
~~~~~~~~~~~~~~
길 밖에서
네가 길이라면 나는 길
밖이다 헝겊 같은 바람 치렁거리고
마음은 한켠으로 불려다닌다
부드럽다고 중얼대며
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푸른 잎새들이 있다 햇살이
비치는 헝겊에 붙어, 말라가는
기억들 가벼워라
너는 한때 날 가로수라고
말했었다, 길가 가로수
그래, 그리하여 전군가도의 벚꽃쯤은
됐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봄날의
한나절 꽃들의 투신 앞에서
소스라치는 절망과 절망의 그 다음만 같은
화사함을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길의 밖일 때
너는 길이었다
내가 꽃을 퍼부어대는 가로수일 때
너는 내달려가는 길, 아니
그 위의 바퀴 같은 것이었으니
오히려 길 밖이 넓다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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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맨 앞
그대는 이제 마음의 극지까지
몸의 맨 앞에까지 나서려 하지 않는다
무심함이 가장 큰 힘인 줄을 깨달았는지
온통 무심함으로 가득 완강해져
노을 속에서 노을빛으로 붉어지고
어둠 아래에선 어둠으로 어두워진다
이제 나의 발음은 의미를 불러오지 못한다
초승달이 무슨 잘못처럼 떠 있다
이내 사라지고 밤하늘 온통
두두러기처럼 별들 도진다 잔뜩 화난 듯
열꽃처럼 피어난 별들
초승달 있던 자리를 지나
전속력으로 뛰어내린다
새벽 하늘을 할퀸다
마음의 오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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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랑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리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 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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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매질
돌팔매질처럼 달려가고 싶어라
가장 높이 날아야
가장 아프게 떨어질 수 있는 그 힘으로
너에게 닿고 싶어라 떨어지면서
한꺼번에 너의 땅에 뿌리내리는
풀잎의 속사정도 알고 싶어라
돌팔매질처럼 너의 벌판에 힘껏 버려지고 싶어라
나 한순간 단단한 바람의 빗질에 온몸을 씻고
너의 땅 바람 숭숭 드는 흙의 성긴 곳을
한 번으로라도 다져주고 싶구나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문학동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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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이 탈 터
나의 그 많던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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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하르르 하르르 하류로 흐르는
꽃잎 꽃 이파리 이런 날
기온이나 풍속 혹은 물 흐름처럼
내 마음도 어떻게 평균 같은 것을
좀 낼 수 없을까 싶어
죄스러움에서 벅차오름까지
마음의 근황을
죄다 내려놓아 보는 것인데
어? 어디에도 내 마음
줄곧 내 마음인 것 없네
상류에서 하류까지 수평선에서
구름 물방울에까지 이르는
둥그런 항심이 없네
끈 묶어둘 중심이 없네
제45회 2000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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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꽃
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제국호텔 / 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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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 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찻잔이나 옷걸이에는 일부러 먼지를 묻혀 놓고
상류의 폭우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그는
그림 속에서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가방 속에서 오래된 무관심을 꺼내 놓는다
여름 휴가
여름의 휴가
나는 그를 아직 알 수 없다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 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 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
물 위의 집
한때, 나무들의 그림자가 나무를 놓고 서둘러
동편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곤 하였다
어쩌면, 태양은 그가 만드는 그림자를 매우 싫어하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니면, 그림자들이 너무나 태양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탓으로 태양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다
물 위에는 그림자가 살지 않는다
구름 없는 날 나는 작은 배에
땅의 끝에서 잘려나간 길을 싣고 바다로 나온다
바다와 햇빛 그리고, 유일한 그림자인 나는
진공관의 내부처럼 고요하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나는 내가 만들고 있는 물 위의 길을
기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순간의 길인 것임을 내가
알 수 없는 물의 움직임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임을
나는 바다 위에서
유일한 그림자인 나의 그림자를 내려다 본다 나의 작은 배를
벗어나는 그림자는 물에 빠져 죽고 나의 작은
그림자는 나의 작은 배 위에만 남아 있다 왜 나는
태양과 그림자의 사이에 있어야 하는가
물은 잔잔해져야
햇빛을 반사한다 물은 고요해져서야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여름의 저녁답
작은 배에서 나는
물의 끝에서 부러진 물의 길을 들고
땅의 끝으로 올라선다
땅의 끝에서 올라온다
탈지면 같은 시간
나는 조용하다
한없이 투명한 진공에 가까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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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길이 무어라 하더냐
이미 여름인 것이어서, 이미
저녁인 것이어서, 길은 등짐 가득 마른 어둠만 실어나르고 어둠
안 깃에서는 낡은 뼈 몇 무더기 허물어지는 소리로
적막할 뿐, 가끔 그래, 아주 가끔
뻐꾸기가 울었다 저 물에서 무덤 몇 개 건져올려 이 산으로
올라올 때 뻐꾸기는 울었었다 그리고 또, 이런 산안개는
무시로 피어오르고 내려가고, 무엇과 부딪쳐 소리나는 것들은
억새풀 높이로 쌓이는 것이었다 아직, 인광을 품고 있어서
인광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인가로 내려가는 길을 소리없이
드러내었다가, 어디 설운 집 지붕에 박꽃으로
피었다가, 그 집 구렁이가 내는 소리로 그 집 안택의
살 속에 자리잡고, 자리잡았다가
한여름밤에도 먼지가 일었다,캑캑거리며 나는 오래된 포도원으로나
숨어들어가 시린 이가 파랗게 물들도록, 포도송이 속으로는
그 많은 날의 눈물들을 가득 가득 쑤셔넣어 씨앗으로 뱉아내는, 이런 작은
죄를 나는 즐기고도 있었다 나의 죄가 포도빛깔로 짙게 물들면
이제, 낡은 뼈 마른 냄새는 지워지고 또, 나는 캑캑거리며
새벽길로 나서야 할 판이었다 가까운 데, 어디 우물이라도 숨겨져 있으면
아직 사람이 빠져 죽지 않은 우물이라면, 단지
너그러운 바위들이 너그럽게 나누어준, 풀잎들이 모아놓은 물이라면
내 피를 다 밖으로만 뽑아내고 뽑아내, 새로 채워넣을 것인데,
이미, 새벽인 것이어서 이렇게, 뒤헝클어진 혼들을 어디에 다 숨기고
숨겨놓고, 나는 길 위로 둥실 뛰어올라
이 길 위로 지나갔던 모든 이들처럼, 지나갈 모든 이들처럼
여름 한낮 고스란히, 그림자를 땡볕에 빼앗겨야 하는 것이었다
~~~~~~~~~~~~~~~~~~~
눈 냄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 내린다
복숭아 같이 생긴 여자 아이가 걸어간 곳
아주 희박하게 눈발이 흩날리고
머릿발 서 있는
강원도의 힘센 산들이 집중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쾅 하고 문 열고 나온 휴가병이
곡괭이를 들고 내려가
꽝꽝 언 계곡물을 내리친다
넓은 이마에서 푸른 김이 피어오른다
강원도의 골짜기 골짜기들이
딴딴한 가슴팍으로 메아리를 받아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발 굵어지고
복숭아 같이 생긴 여자 아이
또박또박 강원도 속으로 떠나고
강원도의 계곡물 겨우내
시퍼렇게 깊어진다
점점
점점 눈발은 굵어지고
하얀 눈 때문에 앞은 캄캄해지고
강원도는 주먹밥 같은 눈물을
마구 집어 던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시와사람 / 200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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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볼트의 성용
나달나달 옷은 얇아지고
훠어이 훠어이 몸은 헐렁해져 있다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생각과 생각 사이 아득히 멀어져 있고
몸 속으로 들어와 있던 길을 여기 내려놓는다
나는 단순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저기 내려놓은 길이 따라오지 않는다
먹장구름들이 견디지 못하고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축축한 공기 속을 할퀴고 내려가는 빗방울들
빗방울들은 하염없이 중력에 지고 있는 것이다
성난 듯한 침엽수 지대가 뿌연 비안개 뒤로 물러난다
비 그치자 약간의 허기
그 곁에 몇 그램의 피로
그 곁에 또 한 줌 가량의 외로움
눈부신 초록의 몸을 활짝 열어놓고
나무들이 마음껏 흰 꽃을 피우고 있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나는 오직 걷는다는 것만으로
이 단순함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이 성욕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은
몇 볼트쯤일 것인가
이제 이 맑고 깨끗한 성욕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한다
지구의 가을 / 문학사상사
제17회 2003年도 소월시 문학상 대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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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10
덕수궁 은행나무 아직 퍼런데 떨어지는 것들
태풍 한가운데서 남녘 상갓집 다녀오는 길, 조금은
쓸쓸해져서 자꾸 눈 들어 하늘 본다, 거기 빠르게
북북동진하는 구름들
키 큰 수녀 둘이서 추어탕 골목에서 나오고
길바닥에 짓이겨진 나뭇잎들이 아주 말간
냄새를 피운다, 죽는 것들의 흩뿌려지는냄새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들의 내음새, 언제
가벼웁다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까
덕수궁 잔등, 재개발 지구, 내부 수리한 식당에서
혼자 먹는다, 가정식 백반, 가정식?
비가정식 백반도 있을까, 식당에만 남아 있는 가정식으로
혼자 점심 먹는 중년 사내는 서글프다, 이 지방에서
혼자는 자주 죄악이다
깨끗한 옷, 아니 옷 깨끗하게 입고 수염도 좀 깎고
늘 오른 쪽으로 기우는 고개도 반듯하게 하고, 목 뒷덜미 자욱한
비듬도 털고, 이 가을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설익은
중년이 꿈꾼 것은 별게 아니었다, 동사무소와
은행을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었다
옛날은 가지 않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몸은 또 가벼운 알콜을 부르고 내 두 발은 버짐 같은
발자국을 남기며 어두운 실내, 지하를 향한다, 마흔에 가까운
한살이가 털부덕, 주저앉는다
몸아, 그래, 너 먼저 가, 있거라
~~~~~~~~~~~~~~~~~
9인제 배구
다들 모였구나 깜상 미친년 째보 똥싸개
추석 전날 동창들이 모여 9인제 배구를 한다
잡초가 듬성듬성 손바닥만한 폐교 운동장
교단 옆에는 가마솥 교단 위에는 노래방 기계
교단 앞에서 9인제 배구를 한다
깜상은 포클레인 째보는 덤프 트럭 똥싸개는 부동산
주정뱅이 홀아비 월급쟁이 공무원 절뚝발이 배불뚝이
대머리 안경잽이 쌍둥이 엄마 이혼녀 보험아줌마
그리고 옛날부터 늙어 있던 선생님이 배구공을 따라다닌다
밤무대 뛴다는 무당집 딸이 마이크를 쥐고 있다
텅 빈 산골 속으로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가 울려퍼지고
분교 된 지 10년 만에 폐교
벌써 세상 뜬 친구들이 대여섯
과수원 하던 고슴도치는 도망간 연변 색시 잡겠다고
트럭 운전수가 되었다 한다
누구 아들인가 불알 떨어져 나간 학교 종을 친다
우리는 오래된 폐교 출신
몇 년 만에 모여 9인제 배구를 한다
제17회 2003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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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강산
그리움은 이렇게 고이면 독이 된다
네가 떠나면서
나는 흉가로 남아
황사의 날들을 지나며 한 방울
독의 힘으로 눈 뜨고 있었다
첫 아이를 위한 태교처럼
그리움을 다스렸다 이슬을 보면
아지랑이를 떠올렸다 바람에 날리는
풀씨를 보며 산맥의 뿌리를 생각했었다
일어나는 먼지를 들판의 기침으로
여기기도 했었고
그러나 흉가에서 내 몸 속에 고이는
물은 피가 되지 못하고
독으로 변하고 있었다 불똥만 닿아도
폭발하고 만다는 그 푸른 독으로
눈물만큼 고이고 있었다
봄날은 고단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독은 아직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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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바깥
수덕사로 글쓰러 간 친구 연락 없다
속리산에서 소 키운다는 후배
강화도에서 자연농법한다는 사람
히말라야 하이웨이에서 엽서를 뜨운 옛 애인
다들 본 지 오래
눈꺼풀 들어올리는 일도
다 중력을 이기는 일
내가 저 검은 바위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것도
인력에 지지 않는 것
저기 저 멀고 높은 산정
만년설에 파이프를 대고
한 모금 시린 마음을 그리워하는데
지금 무거운 중력
여기 이 팽팽한 인력
초저녁 초사흘달
태양을 건너다보기 위해
한껏 고개를 늘여빼고 있다
마음의 한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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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가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마음의 오지 / 문학동네.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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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날개 안쪽
날개 안쪽은 희지만
바깥쪽은 검은 새들이 있다
눈 밝은 적들이
새의 상공에 있다는 증거다
약한 새들이
검은 땅 위에서 산다는 증거다
아주 오래된 슬픈 보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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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푸른 새벽 잃은 지 하 오래
길은 문밖에서 잘려 있다
뱀의 무리와 지낸 간밤 꿈
잘못 맨 넥타이처럼 풀리지 않고
허겁
저만치 앞서 가는 길 따라잡으며
새벽을 잃어버린 지 너무 오래여서
쓰러진 모래시계처럼
침묵하고 있는데
아침마다 그 숲길 걸으면
사념이 말끔히 가신다는 인도의 성자
합창은 너무 멀리서 들려온다
지나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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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손을 찾는다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해서
온종일 누워 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 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 마시며 알았다
모든 진정 고마움에는
독약 같은 미량의 미안함이 묻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따로 혼자 있지 못한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엊저녁 너는 고마움이었고
오늘 아침 나는 미안함이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노작문학상 제 7회 수상작품집 / 동학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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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땅 끝
-부사성 3
무섭다
땅끝으로 가는 길
먼지도 나지 않는다
보리밭 붉은 흙
아지랑이 햇빛의 맨 아래서
더워지지만
땅끝에서 나 추워져
부를 노래 없다
땅끝이 무작정
바다의 시작이려니
했는데 내 안에 벌써
땅끝 땅의 끝이 있었다
바다의 시작 아니
바다의 맨 끝에서
뒤돌아다 본다
무섭다
이 끝의 질김
끄뜨머리의 아슬아슬함이여
온 길이 우지끈 갈라진다
산책시편 / 민음사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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