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순천만
-순천만에는 이제 비밀이 없다.
@순천만 와온해변
먼데서 기차가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야겠다. 기차소리에 잠이 깬 것 이 아니라 벌써 잠이 깨어서 기차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새벽마다 느을 이렇게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핑계가 필요했다. 25년의 노동, 새벽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야 하는 삶에 길들여져 새벽 4시만 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도, 일이 없어 쉬는 날에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그래서 그냥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도록 늦잠 한번 자봤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순천만 대대포구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리얼리스트카페에 들러 새로 올라온 글들과 공지사항을 확인하고 나면 아침밥을 챙겨먹어야 한다. 5시에는 집을 나서야 함께 가는 동료들을 태우고 여수 현장까지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다. 아직 어두운 6시에 일을 시작해서 정해진 량의 일을 마무리하면 그날 일이 끝나는 도급일이다. 오후 3시, 4시, 6시를 넘길 때도 많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서 갑자기 막막해질 때가 있다. 비가 와서, 또는 바람이 사나워서 일을 못하거나 현장사정으로 일이 없어 쉬는 날이다. 공치는 날이라고 하는데, 그런 날은 새벽에 일어나도 갈 곳이 없어져서 책상 앞에 앉았다가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가 하면서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다가 훌쩍 일어나 사진기를 챙겨들고 달려가는 곳이 순천만이다.
@순천만 S자 물길 만조
순천만은 크게는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있는 만을 이르는데 고흥군, 보성군, 순천시, 여수시와 만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순천만 하면 순천시 대대동의 대대포구, 순천시 별량면의 화포, 순천시 해룡면의 와온 사이에 있는 순천만의 가장 깊숙한 지점을 일컫는다. 대대포구의 갈대밭, 화포 일출, 와온 낙조를 절경으로 꼽는다. 2006년 1월 20일, 우리나라 연안습지로는 최초로 람사협약에 등록이 되었다.
@순천만 대대포구 철새
아직 먼동이 밝아오기 전의 새벽 대대포구는 칠흑의 어둠이다. 하늘과 바다, 땅과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은 어둠 속을 전조등 불빛으로 뚫고 달려온 차를 세우고 불을 끄고 시동을 끄면 나도, 낡은 내 97년식 승합차도 그냥 그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만다. 비가 오는 날은 창문을 조금 열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그냥 활짝 창문을 연다. 의자를 눕혀 등을 기대고 누워 가만히 숨죽이고 하늘과 바다가 나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땅과 바다가 나뉘는 것을 지켜본다. 세상에 새벽이 오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봄, 대대포구에서는 맨 처음 하늘이 밝아오고 뒤이어 바다가 밝아온다. 새벽빛이 뭍으로 걸어 올라오면 사람들이 오고 간 길이 밝아오고 그 길가의 나무와 풀들이 밝아온다. 그러나 늦은 가을 대대포구에서는 하늘이 밝아오고 나면 바다보다도 먼저 갈대밭이 밝아온다. 그리고 바다와 길, 나무와 풀들이 밝아오기도 전에 갈대밭에서 춥게 밤을 새운 새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새는 꼭 해소를 앓으시던 아버지의 기침소리로 잠을 깨고는 한다. 그 새 울음소리를 듣다가 가슴 속에서 바람이 일면서 나도 모르게 바튼 기침을 한다. 흙먼지 시멘트 먼지 자욱한 공사장을 떠도는 나도 공해에 찌든 하늘을 건너온 새들도 다 함께 해소를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해소를 앓던 아버지는 끝내 폐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 새들이 푸드득 날개짓으로 추운 잠을 털어내고 나면 비로소 남은 세상이 깨어나고 밝아온다. 그렇게 세상이 밝아진 뒤에라야 갈대숲에서 바람이 인다.
@순천만 대대포구 갈대
갈대숲에 바람이 분다. 벌써 어둠속에서부터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새벽이 오고 갈대숲이 밝아오고 제방을 넘어 갈대숲으로 가는 길들이 밝아오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부는 바람을 본다. 그러고도 더 오래 귀를 기울여야만 그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갈대는 속이 비어있는 가슴을 지닌 풀이다. 그 빈 가슴속에는 그만의 바람이 들어있다. 늦가을 갈대는 한숨처럼 제 몸 안의 바람을 뱉어낸다. 그러면서 푸른빛을 버리고 갈빛으로 물들어간다. 바다로부터, 산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도 늦가을 대대포구 갈대숲에는 그래서 종일 하얗게 꽃잎이 날리고 잎사귀들이 서걱대는 것이다.
@순천만 대대포구 갈대. 하얗게 날리는 꽃씨들이 보인다.
새벽바람이 열린 차창으로 스며들 무렵이면 갈대밭에서 잠이든 새들을 밤새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던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가 이 대대포구라고 하는데 포구의 안개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강과 댐 때문에 워낙 안개로 알려진 곳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보기에 대대포구의 안개는 알맞게 몰려왔다가 알맞게 물러간다. 안개 속에서 나는 비로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제방위로 올라선다. 의자가 있고 쇠기둥 위에 CCTV 카메라가 있다. 기둥에 ‘촬영중’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 농수로의 물이 수문을 통해 흘러들어가 갯벌에 깊은 물길을 내며 바다로 가고 있다. 물길 가에 옹기종기 갖가지 새들이 몰려들어 웅성댄다.
@순천만 큰고니
큰고니를 볼 수 있고 기러기며 온갖 오리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새들이 노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자연생태관으로 전송하여 영상으로 볼 수 있게 갖춰놓았다. 제방아래 누군가가 널판과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메어두었다. 아마 짱뚱어 낚시를 하는 사람의 도구인 모양이다. 농어목 망둑어과의 바닷물고기인 짱뚱어는 물이 빠진 갯벌 위를 마치 메뚜기처럼 뛰어다닌다. 널판을 타고 갯벌 깊숙이 들어가 뻘 위를 뛰어다니는 짱뚱어를 채낚기로 낚아내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나절 내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낸 적도 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제방 아래 세워두고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들고 널판을 밀며 갯벌로 들어가곤 했다. 고급 낚싯대보다 대나무를 베어 직접 손질해서 만든 낚싯대가 더 낫다고 자랑을 하면서 1마리에 몇 백 원 씩 하는데 제법 벌이가 된다고 했다. 벌이가 된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래, 나도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낚싯대로 보성강 여울물에서 피라미 낚시를 했다고 들려줬다. 댐 막고 나서는 꿈도 못 꿀 일이 되었지만… 짱뚱어 낚시꾼은 대대포구나 와온 갯벌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다. 순천만 근처에는 짱뚱어탕이니 전골이니 하는 요리를 하는 식당이 여럿이다.
@순천만 철새
그대 드넓은 뻘밭
하염없는 몸짓
그대가 품어온 낱낱의 둥지에는
비밀의 노래로 가득찼네
황혼 깊은 시각에 들려오는
새새거리는 소리
키득이며 키득이며 서로를 부르는 소리
백로일까
흑두루밀까
긴부리도요샐까
-이민숙의 ‘비밀의 순천만’ 중
@순천만 흑두루미
포구에는 무진교라 이름 붙여진 다리가 새로 놓여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갈대숲을 몇 조각으로 토막 내면서 방부목으로 만든 데크가 놓여있다. 데크는 건너 편 와온 쪽의 용산까지 이어진다. 처음 순천만을 찾았을 때, 지금 데크가 토막을 낸 갈대숲은 끝이 보이지 않게 출렁이고 있었다.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 건너편에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갈 수도 들여다볼 수도 없는 비밀스런 곳이었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새들이 내려앉는 그 갈대숲을 바라보면서 그 숲이 지닌 비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였던가?
@순천만 대대포구 갈대밭 데크 산책로
데크를 따라 걸어 들어간 그 갈대숲에는 이제 비밀이 없다. 백로도, 흑두루미도, 긴부리도요새도 깃들지 않는다. 또각또각 발걸음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이 몰려가고 몰려온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달려가고 오면서 갈대가 가슴을 쥐어짜 내뱉는 한숨소리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 한숨이 바람이 되고 하얗게 꽃잎이 날리고 잎사귀들이 갈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눈여겨보지도 않는다. 데크 위를 불어가는 바람이 차다.
@순천만 대대포구 갈대
가파른 계단을 올라 용산전망대를 향한다. 처음으로 걸어보는 길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뽑은 한국 10대 낙조사진에 순천만의 S자 물길이 들어있다. 대대포구의 반대쪽인 해룡면을 통해 돌고 돌아 찾아가야 하는 용산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비밀스런 곳이었다. 용산을 찾지 못해 헛걸음질을 한 사진작가나 동호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대포구에서 용산의 전망대까지 바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사진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쉽게 전망대에 올라 환상적인 S자 물길의 낙조를 만날 수 있다. 순천만 S자 물길 낙조 사진은 이제 사진작가가 아니라도 사진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수로를 따라 탐사선이 빠르게 달리고 있다. 수로 가까운 곳에서 먹이를 찾던 새들이 탐사선이 다가오자 재처럼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곤 한다. 갈대숲에도, 수로에도, 칠면초 자생지에도, S자 물길에도, 이제 순천만에는 비밀이 없다.
@순천만 와온해변 칠면초 군락지
@순천만 와온해변 칠면초 군락지
@순천만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S자 물길
첫댓글 비밀! 아마 비밀은 영원히 비밀일 것을... 순천만 갈대숲이 있고 그 깊은 뻘밭의 칠면초 색갈이 그렇게 변하고 있는 한은.아무도 그 생명의 비밀을 파헤칠 수는 없을 것을 믿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신거죠?
아름답다. 아니 황홀하다. 그리고 해화의 글을 읽으며 괜스리 슬프다.
글을 쓴다는 것, 혹은 문학을 한다는 것, 이런 것이 없으면 삶에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 싶은 그런 글이네요. 오랜만에 해화씨의 호흡 긴 글을 읽고 갑니다.
고향가는 길에 잠깐 들른 순천만, 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왔는데 이럴수가 ! 아름다움은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나 봅니다.
순천만, 알파와 오메가가 다 드러나니 그야말로 황홀경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읽어 주시다니...돌아서질 못하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