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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전적 고향시와 에쎄이 같은 시작노트(상)
-유년을 돌아보는 시조 12편을 해설하며-계간지 『현대시조』에 실린 글
이정원 <시조시인>
나는 1939년 1월 15일(음 1938.11.25.),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149번지에서 아버지 이희복(李喜馥 89세卒)님과 어머니 채남현(蔡南賢 94세卒) 사이에서 8남매의 6째이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금년이 우리나이로 따지면 80살(무인생)이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을 돌아보는 에쎄이식 시작노트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하여 동시대를 살아온 노인세대들에게 어린 시절의 삶과 추억을 공유하는 한편,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얼마나 고생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중·장년세대들에게는 당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오늘날 가장 풍요롭게 살게 된 배경과 생생한 체험의 글을 통해, 국민소득 60-70불이었던 1950~60대 농촌의 실상과 향학열을 들려주는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이 부모님 세대들이 겪은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가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는다면 어찌 풍요로 넘쳐나는 지금의 현실을 딛고서서 더 찬란한 4G시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는가?
1950년대 도시화 비율은 18.4%였고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70%이상이었다. 농경사회는 주체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현실로 인해 대부분의 가정은 6-7명의 자손을 두었다. 머릿수가 곧 일꾼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근대화의 햇볕을 받아 보지 못한 다대수 농민들의 한결같은 바램은 ‘가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농군의 70%가 소작농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대미 종속적 기업이 소수의 자본가가 되어 오늘날의 빈부격차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승만의 독재가 극에 달해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6.25라는 민족 최대의 참사를 겪어 전사자·부상자·실종자와 포로 등을 합치면 약 300여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격동의 물결을 헤쳐 온 산 증인이 바로 우리세대다.
우리 집은 해발 479m의 천방산 밑, 3면이 산으로 둘려 쌓여 하늘만이 빠꼼이 내려다 보이는깊고 깊은 산중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 경치가 한 폭의 그림같이 산자수려하여 겨울이면 산수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심신산천이며 산간지대 오지다. 소나무가 무성하고 참나무와 도토리나무, 동백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들었고 집 앞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은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이 냇물을 그냥 길어다 먹고 살았다. 천방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은 가재가 사는 1급수다. 옛날에는 밤에 호랑이가 나타났올 정도의 두메산골이다. 이곳에서 할아버지는 논 20여마지기와 밭 2000여 평에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어 쌀과 곡식, 채소, 담배 등을 농사지어 자급자족하시면서 호두, 대추, 감나무 등 과일나무를 길러 그 열매를 팔아 살림에 보태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5남매를 키워 시집 장가를 보내셨다. 장남이신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최고의 명문이었던 선린상고를 합격하시고도 학비 때문에 입학을 못하여 차선책으로 역시 전액 국비로 수재들이 모이는 대구사범을 졸업하셨다. 일제 말 대술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교편을 잡으셨고 해방과 더불어 교장으로 승진하신 후 여러 곳을 전근 다니시자 나는 아버지를 따라 4개 초등학교를 옮겨 다니다 졸업한 후 고향 방산의 할아버지 댁에서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까지 통학하며 졸업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려서 글방에서 한문과 한글을 공부하셨고 인천과 만주까지 다니며 장사도 하신 신식노인이셨다. 유학자 가문의 할아버지는 늘 엄한 표정을 지으셨고 말씀이 적으셨지만 할머니와 단 두 분이서 말씀을 나누실 때는 곧잘 우스개소리를 나누시는 애처가셨다. 나는 여기서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와 제례 등 유교적 문화를 답습하면서 대가족 제도의 봉건사회도 경험하였다. 어른 들이 어떻게 대가족을 운영해 가며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는 지 8년을 지켜보며 자랐다.
당시 중고등학교가 있는 예산 읍내까지 집에서 왕복 20km나 되는 머나 먼 길을 6년동안 걸어서 통학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나 졸업 후 직장을 잡으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 방산리에서는 셋째형, 넷째형, 나,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하였는데 아버지가 연노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곁을 떠나실 수 없어 고향의 초등학교교장으로 다시 전근을 오셔서 우리들 4남매는 할아버지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향학열이 누구보다 높은 한산이씨 후손답게 20여가구가 모여사는 이 촌 방산리에서 읍내까지 걸어서 통학한 중고등학생이 무려 20여명이나 되었다. 그 때 농촌출신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일요이면 소를 끌고나가 풀을 뜯게 했으며 깔을 베어 외양간에 넣어 주거나 여물로 죽을 쑤어서 소를 키우기도 했다. 겨울이면 작두로 볏 짚단을 썰어 소여물을 끓이며 군불을 땠다. 봄에는 모를 심고 가을이면 벼를 베었으며 겨울 땔감을 준비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지게를 지고 눈 덮인 산에 올라 나무를 해왔다. 무쇠 낫으로 나뭇가지를 치다 집게손가락을 찍어 지금도 그 상처를 만지면 찌릿찌릿하다. 밭에서 달래·쑥·비름·돗나물을 뜯고 산에서는 고사리·취나물·도라지·더덕·원추리 등을 채취해 반찬거리에 보탰다.
방산은 수당 고택과 수당기념관, 방산저수지, 아계 산소와 사당, 200년 전에 지어진 이광임 선생의 고택, 천방산 등과 함께 역사적인 유적을 돌아보는 관광지로 제법 알려졌다.
방산리에는 한산(韓山)이씨 들이 모여 살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충신이자 삼은의 한 분이신 목은 이색의 7대손인 아계(鵝鷄) 이산해(李山海: 이조 선조 때 영의정을 두 번 지내시고 대북파의 영수이셨음)할아버지의 산소와 영정을 모신 종가가 있다. 나에게는 15대 직계 선조시다. 그 유명한 토정비결을 지은 기인 토정 이지함(李之函)님이 아계의 숙부가 되신다. 방산 샛터에는 고종황제 때 중추원의관을 지낸 애국지사 이남규선생(1855-1907)의 고택과 수당(修堂) 4대(李南珪, 李忠求, 李昇馥, 李章遠)로 이어진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수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물론 한산이씨이시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전 중앙대 이문원(李文遠)(이남규 선생의 증손자)교수가 고택과 기념관을 지키고 있다. 방산은 충절·지조·청빈의 선비후손답게 대학교수, 교장 등 교육자와 학자,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동네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애틋한 것이지만 내 유년시절, 개구쟁이시절부터 준 어른인 고등학생시절까지 살았던 고향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가집으로 안채, 사랑채, 헛간, 외양간이 있던 전통양식의 제법 큰 초가집이었으며 호두, 대추, 감, 밤 등 과일나무가 집안을 삥 두르고 있었다. 큰 집이어서 제사 때면 대소가 어른들이 모두 제례에 참여하셨고 4대 봉사를 하는 우리 집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제사나 시제날이 돌아와 이 날은 우리들이 쌀밥과 고깃국을 먹는 로또의 날로 기억된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60여년이 되어가고 나이도 금년에 우리나이로 팔순인 80이 됐다. 모든 동물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 산세 수려하고 지세가 안온하여 명당으로 소문난 방산리 고향땅을 한번 방문해 보고 싶지만 2014년부터 시작된 원인불명의 어지럼증 때문에 여행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한다. 고향은 어머니 자궁과 같은 곳이며 할머니의 호랑이 담배 먹던 옛이야기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던 동화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내가 나고 자란 유년시절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조 몇 편을 싣고 이 시조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 에쎄이 같은 시작노트와 함께 선보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시작노트는 내 정체성을 알리는 자서전 같은 글이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시조개론을 읽어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시조작법을 지도받은 적이 없이 아내의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실력으로 무데뽀로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시조를 쓰되 서정성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글과 시조의 생명인 정격에 최대한 맞는 글을 쓰려고 노력해 왔다.
폐가(廢家)를 돌아보며
<초가지붕>
뒤란 감나무는 삼십년을 홀로 늙어
곁뿌리 또 곁뿌리로 생감을 울궈 내고
다 썩은 이엉 한 자락 한 世代를 훌쩍 넘네
<방문(房門)>
이슥토록 닳고 닳던 쇠고리 녹이 슬고
창호지 국화꽃도 제 혼자 결이 삭아
삼십년 잔 숨결소리 아득히도 귀멀어.
<장독대>
할머님 손때 묻은 항아리가 두어 개
깨진 독 틈 사이로 맨드라미 키만 벌고
아쉬워 쓸어보는 손, 손바닥이 아리네.
<사랑채>
장죽소리 호기롭게 묻어나던 큰 사랑채
평상의 호롱불도 시렁 위에 얹혀진 채
조부님 큰 기침소리 이제라도 들려올 듯.
<우물>
새 각시 시집살이 혼자 몰래 달래던 곳
보름달 달 한 덩이 물동이에 건져 놓고
유년을 길어 올리던 두레박은 이제 없네.
-아내 홍오선의 제3시조집 ‘하늘바라 서리라’ 중에서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해서 올린 농촌풍경임. 내 고향은 이리 가구수가 많지 안했음>
*감상 노트: 1990년대 초 시조를 쓰는 아내를 데리고 승용차로 서울을 출발, 꼬불꼬불한 흙길을 달려 고향을 방문하였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양온천으로 이사를 가셨기 때문에 고향집은 텅 비어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나고 자란 고향을 방문하여 낡고 헌 초가나마 직접 보고 싶다고 하여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고향 길을 나들이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두메산골 출신인 남편의 고향을 찾는 서울 태생의 아내는 몹시 가슴이 설레는 듯 보였다.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6년과 6.25때 2년 등 도합 8년을 산 나로서는 아내와 함께 추억어린 옛 고향을 찾는다는 기쁨은 나 또한 아내 못지않았다. 오랫동안 비워 논 폐가가 된 집 뒤란은 잡초만 무성한 채 김장을 담가 놓았던 거대한 김칫독이 깨진 채로 그대로 묻혀 있고 장독을 받치고 있는 장독대에는 어머니께서 그 옛날 6.25때 행방불명되신 큰 형님의 무사를 칠성님께 빌던 귀 빠진 대접이 빗물을 담은 채 쓸쓸히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막내인 나만 봉숭아꽃이 예쁘게 핀 뒤란으로 불러 몰래 주시던 쫄깃쫄깃하던 콩누룽지 냄새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14살 때 큰 집 맏며느리로 시집오신 어머니는 지금은 말라 없어진 우물에서 겨울이면 손을 호호 불며 똬리로 받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오셨다. 층층시하에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보살펴야 했던 어머니는 이 우물가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달 한 덩이를 건져 올려 고향 가는 길을 호롱불로 밝혀들고 친정어머니 품으로 달려가셨을 게다. 한 편으로는 유학 간 낭군이 보고 싶어 하늘에 떠 있는 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드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14살 먹은 새댁이 있다면 이런 고초를 겪으며 시집살리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 우리보다 한 세대 위이신 어머니께서는 그런 시절을 몸소 겪으셨다.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90세에 돌아가신 할아버님, 그리고 92세에 돌아가신 할머님 내외분이 말년에 아버지를 따라온양온천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거처하시던 사랑채에는 소여물을 가득 넣고 참나무 군불을 때던 아궁이가 빈 입을 벌리고 어렸을 적의 나를 반긴다. 사랑채 안방은 할아버지 내외분이 쓰셨고 윗방은 우리 3형제가 공부하고 자던 방이다. 2평 남짓한 좁은 방에 등잔불을 밝혀 놓고 3형제가 공부했다. 여기서 그 먼 길을 통학하며 고려대 경제과에 합격했다는 남편의 말이 부잣집 맏딸이었던 아내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아내는 귀경하여 위의 시조를 써서 발표하였다. 대청마루에 올라가 봤다. 우리집 대청마루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하였는데 약 여섯평쯤되는 이 마루에는 네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반집 전통에 따라 4대봉사를 하기 때문에 일년에 여러번 제사를 지낸다. 입구에는 제상이 있어 제사를 지내는 데 주로 사용하였지만 어른이 돌아가시면 고연을 치고 3년동안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어머니께서 아껴둔 쌀로 짐메를 짓고 아버지께서 사오신 소고기로 국을 끓이거나 기르던 닭을 잡아 국을 끓여 제사상에 올렸는데 제사날은 모처럼 소고기국이나 닭고기국을 먹어 철부지 우리에게는 제사날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제사날은 지금으로 치면 우리 형제들에게 고기국을 먹는 로또의 날이었다.
단지증골*
산 너머 또 산 너머 단지 하나 웅크린 곳
바위틈 참샘물 솟아 약사발을 쏟아 내고
빠끔히 뚫린 하늘을 집 한 채가 이고 있다.
그 고향 하루해는 설핏하게 넘어가서
바람도 단지에 갇혀 목만 길게 늘이는데
어린 날 꿈을 심었던 다랑이 논 몇 마지기.
휘영청 달 밝은 밤엔 여우소리 소름 돋고
할머니 옛 얘기에 문풍지도 떨던 꿈길
동구 밖 마실가는 길엔 늘 똑같은 발자국 뿐.
*단지증골 : 단지처럼 하늘만 보인다 해서 부쳐진 방산리 이름.
-이정원의 제1시조집 ‘현기증을 앓는 가을’ 중에서
*시작 노트: 다랑이 논으로 층층이 둘려 있는 외딴 초가인 우리 집에서 한 500미터쯤 개울 따라 올라가면 여름이면 차고 겨울이면 따뜻한 참샘물이 흘렀다. 누군가 약수라고 새겨 논 흔적이 아직까지 보인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니 산의 유기질과 미네랄이 많이 포함되었고 깊은 산속의 지하수를 따라 산삼과 각종 약초성분이 스며나온다는 소문이 나서 멀리서 이 약수를 길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집은 안채에는 화장실이 집안에 있지만 사랑채의 화장실은 방 밖 20여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괴괴한 달밤이면 산등성이를 타고 짐승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환히 보였다. 머리가 쭈삣쭈삣하였다. 어찌나 엉성한지 땅에다 독 하나 묻어놓고 지붕도 없이 앞에만 싸리로 만든 발을 쳐놓았을 뿐이었다. 비가 오면 이 뒷간에 빗물이 가득 고여 볼일을 보면 더러운 물이 엉덩이에 튀어 오르고 했다. 그래도 이 오물은 똥장군에 퍼 담아 여름에 보리밭이나 배추밭의 거름으로 뿌리면 훌륭한 비료가 되었다. 우리 4남매는 여름에는 찢어진 우산을 받아도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학교에 도착했으며 겨울이면 쌩쌩 몰아치는 눈보라에 살이 에워도 코트도 없이 교복만으로 버텼다.
머루
알알이 박힌 꿈을 입안 가득 터뜨리면
허리춤에 매어달린 허기졌던 내 어린 날
목울음 왈칵 쏟으며 불러오는 고향 하늘.
풍요로 잊은 가난 오늘 문득 떠 올리며
투명한 네 몸 열고 돌아보는 동구 밖 길
또다시 가슴 허무는 잠 못 드는 가을이어.
-이정원의 제1시조집 ‘현기증을 앓는 가을’ 중에서
*시작 노트: 뒷산 천방산은 숲이 무성하다. 숲이 어찌나 우거졌는지 낫으로 잡초나 칡덩쿨을 쳐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정글지대였다. 가을에 험한 숲속을 뒤지다 보면 야생과일인 산밤, 머루와 산포도, 그리고 으름과 다래가 싱싱하고 탐스런 열매를 자랑한다. 산머루는 산포도와 비슷하나 열매가 작고 단 맛이 더 난다. 요즘은 마트에 가면 탐스런 검은 포도가 알알이 제 몸을 열고 입맛을 자극하지만 허기질 때 먹던 그 때 그 시절의 머루나 포도 맛 만 하려면 어림없다. 더욱이 ‘조선 바나나’로 불리던 으름은 어찌나 달았던지 지금의 바나나는 저리 가라다. 가을 벼가 노랗게 익은 동구 밖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던 유년을 떠 올리며 그 옛날 동심의 세계로 가 네온이 반짝이는 잠 못 이루는 도시의 가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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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각
-다듬이
빛바랜 하루 끝을 호롱불로 밝혀 놓고
느슨한 허리춤에 매달리는 고단함을
다독여 마름질하듯 또닥또닥 두드린다.
죄 없이 엎드린 가난 한을 풀듯 두드려도
목울대에 차오르는 앙금으로 쌓인 설음
아직은 그칠 수 없네 중중모리 회심가여.
십리 밖 먼 길까지 장단 맞춰 뽑아내면
명치끝에 맺힌 멍울 온 밤 내 삭으련만
꿈길에 어머니 만나 그 가락을 맞춰볼까.
-이정원의 제2시조집 ‘39도 5부’중에서
*시작 노트: 어머니는 매일 4남매 아침밥을 먹여 학교에 보낸 후에는 삼복더위에도 머리에 하얀 수건만 두른 채 호미자루를 들고 콩밭, 고추밭, 메밀밭, 배추밭, 무밭, 감자밭의 김을 매셨다. 참깨며 파, 마늘, 호박, 쌈 등을 직접 심고 길러 반찬거리와 양념을 자급자족하셨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이라는 신분은 간 곳이 없고 4남매의 빨래는 물론 시부모님 시중도 들고 삼시 세끼 밥도 지어야 하는 가정부이자 농군이셨다. 당시의 교장선생님 월급은 쥐꼬리만 해서 늘 쪼들리는 살림에 보태고자 돼지를 키우셨으며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러 읍내 시장까지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녀오셨다. 소여물을 쑤고 우리들이 입을 옷을 무명으로 직접 만드시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무명옷을 펴려고 다듬이질도 하셨다. 잠시도 등을 댈 여유가 없으셨다. 할머니와 두 분이서 장단을 맞추어 또닥또닥 두드리는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밤늦게 귀가하는 길의 동구락배미까지 들렸다. 그 때는 그 다듬이 소리가 음악에 맞추듯 경쾌하게 들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 가슴에 맺힌 한을 두드리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뻐근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93세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곶감
뒤란 감나무는 늙을수록 힘이 부쳐
가을 등짐 하나씩을 장대로 덜어 낸다
고단한 햇살의 무게도 망태기에 담으면서.
탐스런 분신 몇개 공양으로 남겨 놓아
무서리 지난 후엔 속살까지 물들이고
까치밥 환한 하늘 길 보시하듯 달려 있다.
탐욕에 지친 세월 한 꺼풀 벗겨내어
올망졸망 세상사를 싸릿대에 달아 놓고
맛깔이 멈춰야 할 자리 눈썰미로 배운다 .
몸안 가득 사려넣은 해와 달, 파란 하늘
할아버지 기침 소리 그 안에 배었는지
하얗게 분이 난 몸에 고향집이 앉는다.
-이정원 제2시조집 ‘39도 5부‘ 중에서
*시작 노트: 고향집 뒤란에는 수십 년 된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하여 봄날에는 감꽃을 주워 먹었고 가을이면 땡감은 소금물에 우려서 떫은맛을 빼고 먹는다. 홍시는 그 자리에서 먹거나 망태기에 담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갖다 드렸다. 또 늦가을 된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되면 땡감은 껍질을 깎아 싸릿대에 꽂아서 그늘에서 말려 곶감을 만들었다. 감을 일정한 간격으로 깎는 기술은 할아버지의 장끼시다. 적당히 마른 곶감을 왕골로 10개씩 묶어 그릇에 넣어두면 하얗게 분이 난다. 그러면 제사상에 올리거나 장에 가지고 가서 돈을 산다. 우리 집에는 과일나무가 많아서 곶감·호두·대추를 판 돈으로 살림살이나 생필품 등을 샀다. 껍질을 깐 감을 싸릿대에 꿰어 열 개씩 발에 꽂아 매달아 놓으면 물러서 잘 떨어진다. 그 때 맛이 어떻게나 달던지 일부러 건드려 떨어뜨렸다가 할아버지한테 호되게 걱정듣기도 했다. 어머니는 땡감을 옹기에 담아 벽장에 숨겨 놨다가 말랑말랑한 홍시가 되면 방학 때 내려간 우리들에게 간식으로 내어 놓으셨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먹은 과일은 모두 진짜 신토불이로 공해가 없는 글자 그대로 자연산이었다. 맛은 지금의 곶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설탕덩어리였다.
(계속)
2. 자전적 고향시와 에쎄이 같은 시작노트(下)
-유년을 돌아보는 시조 12편을 해설하며-
이정원 <시조시인>
할아버지의 고드랫돌
경계를 넘어야만 성(城) 한 줄이 쌓인다
나는 네 땅으로 너는 내 땅으로
고단한 가리장목*을 사이좋게 넘나든다
엇갈려야 성장판이 3미리쯤 크는 사이
한 땀 한 땀 손놀림에 삭풍마저 부복하고
문풍지 자지러져도 칼칼하신 기침소리
그 겨울 동구밖에 높새바람 진을 쳐도
달그락 고드랫돌 온기 가득 쏟아 내면
내년의 풍년가 소리가 타래처럼 토실했다.
*자리를 짜는 틀
-가람시조 2015년 11집
*시작 노트: 옛날에 마루나 방에 까는 돗자리나 자리를 만드는 재료는 왕골과 노끈이다. 왕골은 연못 같은 습지에서 자라며 노끈은 산에서 흔히 보는 칡넝쿨을 가마솥에 쪄서 껍질을 벗겨 만든 섬유질을 손으로 꼬아서 실처럼 만든 끈이다. 노끈은 할아버지가 겨울이 오기 전에 손으로 일일이 꼬아서 타래로 만들어 준비하셨다. 왕골은 갯벌처럼 발목이 쑥쑥 들어가는 늪속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바깥 마당 바로 옆 논 일부를 막아 만든 늪에 할아버지께서 직접 왕골을 기르시고 추수하셨다. 여기서 자란 2-3미터 되는 왕골을 가늘게 잘라 껍질을 벗겨 말린 4-5mm 폭으로 만든 날실을 가리장목에 올려놓고 노끈을 감은 고드랫돌을 양방향으로 엇갈리게 매면 자리가 만들어 진다. 곱돌로 허리를 잘록하게 만든 고드랫돌을 엇갈리게 넘기면 부딪치며 나는 달그락 소리가 나는데 듣기가 음악처럼 경쾌했다. 돗자리는 날실을 돗틀에 미리 걸어두고 2mm 정도로 쪼개어 말린 왕골을 바늘대에 걸어 지르며 바디질을 하여 짠다. 우리 형제들이 돌아가며 일요일이면 바늘대에 골을 걸어 반대 방향으로 지르면 할아버지는 힘있게 바디를 내리쳐 돗자리를 완성하셨다. 할아버지는 겨울만 되면 낮에는 돗자리를, 밤에는 자리를 만들어 집안의 대청이나 방에 깔기도 했고 대부분은 장에 들고 나가 팔았다. 자리를 짠 다는 것은 인생을 짜는 것이다. 한 땀이라도 거르면 자리가 안 된다. 할아버지는 농사철이 끝난 기나긴 겨울밤을 자리를 만들며 소일하셨고 우리 삼형제는 웃방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공부하다가 잠들었다.
아버지의 생존법
9,28 수복 지나 천방산 밑 방산 골에
소릿절* 고개 넘어 후퇴하는 인민군들
나 하고 똑같은 얼굴로 타박타박 내려온다
전쟁이 무어 길래 몰골 저리 야위었나
실개천에 목축이던 열여섯 쯤 되는 소년
찢어진 무르팍 사이로 고개 내민 고향산천
아버지 엉거주춤 소쿠리 내미시며
"동무~ 잠시 쉬어 대추 좀 자셔보시구려"
커서야 아버지 말씀이 생존인 걸 알았다.
*소릿절 고개: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서 천방산을
넘어 공주군 유구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
-계간 현대시조 2015년 가을호 게재
*시작 노트: 나는 초등학교 6학년생으로 14살이던 때 충남 아산의 선장초등 학교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거기서 아침이면 학교에 나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그 때 배운 노래중에서 제일 신나게 부른 노래가 빨치산의 노래다. "테벡산맥에 눈내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마음속은 피끓는다...." 이 노래는 후에 커서 조정래가 쓴 '태백산맥'이라는 장편소설이 영화화되면서 거기에 빨치산들이 이 노래를 부를 때 속으로 따라 부른 기억이 새롭다. 북한군이 군가 하나만은 참 듣기에 씩씩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 고향은 워낙 심심산중이어서 전쟁이 났는데도 군인은 물론 총 한 자루도 구경 못했다. 다만 서울의 작은집, 고모네, 두 삼촌네 식구 등이 모두 피난을 와서 약 30여명의 식구가 북적거리던 기억만 남아 있다. 거짓말 보태 포개서 잠을 자야했다. 9.28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후퇴한다는 소식과 함께 어느 날 다 저녁 때 천방산을 넘어 온 남루한 군복의 인민군 패잔병 약 1개 분대가 우리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빨갱이 군인을 처음 보니 왠지 무서웠다. 당시는 북한 하면 빨갱이를 연상하여 이북 사람들은 몸이 빨갛거나 뿔이 났다고 들었는데 우리와 얼굴이 똑 같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마당에서 빨갛게 익은 대추를 따시던 아버지께서 무슨 위기감 같은 것을 느끼셨는지 “동무, 이리 오셔서 대추 좀 잡숫고 가시지요“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중 계급이 제일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군인 하나가 ”고맙습네다만 빨리 읍까지 가야합네다“ 하고 이상한 사투리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들으니 그 인민군들은 바로 아래 중뜸에 머물면서 저녁을 시켜 먹고 닭 3마리까지 잡아먹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고 한다. 커서야 아버지의 행동이 살기 위한 생존법인 걸 깨달았다. 89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우리는 삶을 배웠고 인격을 형성했다.
고향집 생각
산들이 내려와서 울타리로 둘러앉아
모락모락 연기 나는 하늘 아래 집이 한 채
어머니 부지깽이 소리에 귀를 여는 동구 밖
날마다 부산하게 별을 보고 집 나서고
여명 속에 밝아오는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괴춤을 추켜올리던 등하굣길 오 십리
여섯 해를 하루같이 푸른 꿈을 꿰어 차고
뉘라 먼저 할 것 없이 걷고 뛰던 우리 남매들
어머니, 환히 부르며 다시 갈 수 있다면….
-이정원의 제3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중에서
*시작 노트: 6.25전쟁이 나고 21살의 예쁜 서울 막내 작은어머니가 피난 오셔서 함께 사실 때 어느 날 14살인 나에게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나는 거침없이 ”배우요“ 하고 대답했다. ”배우?“ 하시며 의아해 하는 눈치시다. 그 꿈 때문인지 고등학교 때 몰래 본 당시 최고 배우인 이민과 염매리가 주연한 ‘출격 명령’을 보고 영화배우는 내 로망, 이민은 롤모델이 되었다. 실제로 대학 1학년 때 모영화사에서 모집하는 주연배우 역을 맡아보고 싶어 없는 돈에 사진관에서 독사진을 찍어 응모한 적이 있다. 소식은 없었다. 대학 다닐 때 과 친구인 K군이 나만 보면 이민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만나면 ”어이~ 이민“하고 부른다. 초등학교시절 기억에 또 남는 것은 해방직후 송남초등학교 1학년 때 글씨를 쓸 종이가 없어서 일본 애들이 버리고 간 다 쓴 공책의 글자를, 검정고무신 조각을 석유에 담가서 만든 지우개로 지워서 쓰던 생각이다. 또 4학년 때 때 ‘왕자와 꽃팔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인 왕자역을 맡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두 주인공을 소설화하여 ‘11세 소년의 첫사랑 일기’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인터넷 카페에 올리기도 했다.
6.25전쟁 때 겪었던 궁핍생활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셨지만 6.25 직후라 월급은 형편없었고 아예 나오지 않는 달도 있었으며 월급 대신 딱딱한 분말우유를 배급하였는데 이 우유를 쪄서 식량의 일부를 보충하는 형편이니 5남매가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둘째 형님(작고)만 고모댁에서 대전사범학교에 다녔고 우리 삼형제는 부득이 몇 년씩 고향집에서 놀다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6.25후 아버지를 따라 아산군 인주초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6학년을 두 번 재수 후 1953년 제1회 중학입시국가고시가 있었는데 이 때 나는 500점 만점에 412점을 맞았다. 당시 경기중학교 입학 커트라인이 407점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경기중학교를 입학했다면 내 운명이 어찌되었을까? 돈 때문에 국내 최고 명문인 경기중학에 입학을 못한 것이 너무 서러웠다. 초등학교 때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공부는 못하지만 집이 부자인 동급생과 싸우면서 심한 쌍욕을 해 댔는데 학교 우물로 물 길러 오신 어머니가 이 말을 들으시고 내 손목을 잡고 집으로 끌고 가 부엌칼을 꺼내들고 “엄마 죽는 꼴 볼래” 하며 혼을 내셔서 두 손을 싹싹 빌던 생각이 난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셋째 형(83)은 2년, 넷째 형(82)은 3년 나(80)는 2년씩 놀고 예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셋째형(서산·서천군수 역임)이 고2일 때 넷째 형(중대 법과)과 나는 같은 고1이었고 여동생은 중1이었다. 그 때는 모두가 어려웠기 때문에 2-3년 놀다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아예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이 허다했다.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가자면 집에서 새벽 7시쯤 출발한다. 30분 쯤 걸어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삼거리를 지나면 ‘돌고개’라고 하는 험준한 고개가 있다. 그 가파른 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녔는데 그 고개가 어찌나 험하던지 경사가 한 40˚쯤 된다.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어 한길까지 까지 30분 정도, 거기서 학교까지 또 30분쯤 걸어가야 한다. 대략 학교까지 10km 거리를 1시간 30분에 걸어 다닌 셈이다. 여동생은 거기서 또 30분을 걸어 예산여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겨울이면 눈 덮인 고갯길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보통 몇 번은 굴러 떨어지곤 했다. 한번은 어느 일요일 셋째형과 함께 조홍 한 접을 바지게에 얹고 시장에 내다 팔려고 이 고개를 넘다가 미끄러져서 으깨진 홍시를 몽땅 협곡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당시는 옷감이 귀해 미군이 입던 사지 쓰봉을 물들여 입는 것이 최대의 멋쟁이였으며, 밤에 요 밑에 책을 얹어 깔고 자 칼날 같은 줄을 세웠다. 그 때는 또 나팔바지에 모자챙을 구부려 쓴 것이 유행이었다. 운동화 안쪽 천이 너덜대어 무명조각을 밥풀로 붙이고 눈을 헤치고 곰실고개를 넘어 큰 형수 친정에 놀러 갔다가 눈에 젖어 너덜대던 천이 들어나 창피했던 일도 떠오른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처음 나온 나이론 양말이 신고 싶어 집을 나올 때 쓰레ㄱ 옆에 버려진 양말을 몰래 가지고 나와 집에 와서 펑크난 앞과 뒤쪽에 천을 대고 기워서 신던 에피소드도 있다. 어머니는 우리가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꼭두새벽에 일어나셔서 밥을 짓고 살림살이를 하면서 농사일을 거들었으니 그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고등교육을 다 받았고 대학은 가정 형편상 바로 위형과 나만 진학하였다. 큰 형님(살아 계시다면 88세, 공주고보 졸)은 6.25때 홍익대 국문과 2학년 재학 중 행방불명 되셨는데 후에 남북이산가족 찾기에서 금강산에서 만나 뵈웠고, 누님과 막내아들은 일찍 세상을 뜸). 부모님의 향학열이 아니었으면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나는 한 여름에 어머니께서 싸주신 꽁보리밥 도시락이 고추장과 범벅이 되어 창피해서 점심은 굶고 하교 길에 셋째 형과 함께 냇가에서 둘이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별식은 꿈도 못 꾸던 때라 중학교 졸업식 때 셋째형이 사준 짜장면을 생전 처음 먹어봤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바닥까지 핥아먹던 기억이 새롭다.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음악과 문학에 소질이 있어 중학교 때 학교에서 학예회를 했는데 피아노 치는 학생이 나 하나 뿐 이어서 반주를 내가 했다. 그 학예회 때 황길수 전 법제처장(현 변호사)이 내 반주에 맞춰 독창을 불렀고 연극에서 주연 남장여자 역을 맡아 예산여고생들의 인기를 끈 학생이 인보길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현 뉴데일리그룹회장)이다. 중학교 3반 동창이며 장군출신으로 풍산금속 사장을 지낸 이규홍과 압구정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창신과 함께 다섯이서 지금도 가끔 만나 식사를 한다. 그 외 박보희(현 통일그룹재단이사장), 이재학(전 여의도성모병원외과과장), 박영호(전 국민은행지점장), 박선교(가수)등이 기억에 남는 같은 반 동창이다. 나는 군내 중고등학교 웅변대회에 자주 나갔다. 그러나 솔직히 내가 웅변대회에 출전한 것은 부상인 상품에 눈이 멀어서(?)였다. 기억으로는 언젠가 2등(1등은 같은 과 한귀선)을 해서 겨울 내복을 상품으로 받았는데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는 귀중한 방한복이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교지 편집위원을 한 경험이 도움이 되어 대학 재학 중 학보사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3년간 반장을 했고, 3년간 토목과 수석을 하여 장학금을 받는 등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을 갈 형편이 못되어 2차 지원 대학으로 장학금과 기숙사비가 무료이고 생활비까지 준다는 건국대와 조선대 를 가려고 알아보고 있었다. 헌데 돌아가신 둘째 형님이 머리가 아까우니 어렵더라도 고려대학에 보내자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원서 마감 전날 부랴부랴 한 밤중에 마침 숙직당번이신 이해원 생물선생님께 입시원서 작성을 부탁, 다음날 상경계획이 있으시던 선생님이 직접 안암동까지 가셔서 고려대 경제과에 응시원서를 제출하여 합격하였다. 담임인 최원식 선생님께 한 밤중에 입시원서를 써달라고 찾아갔는데도 주무신다고 거절하신 일이 지금도 서운하다. 은인이신 이해원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이 늘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다. 같은 해 넷째 형이 중앙대 법과에 합격하여 자식 둘의 등록금을 대시느라 부모님께서 고생이 많으셨다.
예산농고는 학생 수가 7개 반 약 450명 정도 되는 실업고교다. 그 중 내가 다닌 토목과는 진학반이라고 해서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3학년 때 매월 모의고사를 보면 늘 내가 전 학년 1등이고 또 2등은 늘 아남전자 대표이사를 지낸 이기행(연세대공대)이었다. 3년간 1등과 2등으로 선의의 라이벌로 경쟁을 벌였다. 또한 같은 토목과에서 공부하다 온양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신억현(서울법대)은 서울은행 행장대리까지 지냈으며 이희용(서울 문리대)은 진일특수 대표이사 사장으로 준 재벌에 올랐다. 성균관대 양재혁(독일 철학박사)교수, 동아대 이송구(동국대)교수, 공주대 박건병(경희대)교수, 충북대 이성(서울문리대), 대법원 인사과장을 지낸 서승길(작고), ㈜동방아그로 대표이사를 지낸 우상호(서울농대), 김주철(중앙대)㈜서경석유 상무, 이창호(외국어대)㈜국전 상무 등이 당시 쟁쟁했던 친구들이다. 각반 1등으로 구성된 7명의 기수단은 3학년 전체 1등이 기수단장을 하는 관례에 따라 내가 맡았고 단원인 이진기(농과A)는 부이사관으로 헌법재판소 국장을, 이희천(농과B)은 경일고등학교 교장을, 이장복(축산과A)은 인쇄업 사장을, 윤용길(작고·축산과B)은 오파상 사장을, 이재훈(임과)은 포스코 계열사 사장을 지냈고, 함기선(원예과)은 고려대 의대를 나와 현재까지 한서대 총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처럼 금수저와 흙수저로 확실히 2분법으로 재단되던 시대를 산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던 시대이다.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하늘과 땅차이만큼 심하지는 아니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도 했다. 예농 선배 중에 김진우 대법관은 대술면 이티리에서 태어나 서을법대에 입학, 고등고시 공부를 하면서 턱밑에 바늘을 꽂고 졸음을 쫓았다는 대술면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버지의 초등학교 제자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발인 날 아침 일찍 찾아온 총애하는 제자다. 많은 중고등학생들은 대부분 향천사 골목에서 자취를 하며 졸업했다. 빈대에 물리는 방에서 화덕에 밥을 해 먹던 학생시절을 지금은 추억어린 얘깃거리로 술상에 올리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해 고등학교 때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으며 그 외 삼국지, 전쟁과 평화, 쉐익스피어 전집,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리바바와 40명의 도둑, 무쇠 탈, 삼총사, 대지, 해저 2만리, 애인, 흙, 상록수, 렌의 애가, 단종애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허지만 체력이 약해 체육시간에 친구들이 벗어 논 옷을 지키는 학생은 늘 나였다. 9살 때 홍역으로 죽었다고 윗목에 홋 이불을 덮어 밀어놨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그런지 평생을 건강 때문에 고생한다. 지금도 대학병원 5개 과의 약을 하루에 20알은 먹으며 지내는 신세다.
같은 반 이송구가 학교교지에 예산여고 ‘H양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염문에 열을 받아 고3일 때 예산여고생인 K양에게 데이트신청을 하여 향천사 냇가에서 만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녀는 후에 반 동기인 조재길의 빈소에서 50여년 만에 다시 만났다.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의 빈소이니 반드시 나오리라 믿고 나를 만나러 자리로 찾아온 것이다. 인사만 주고받았지만 얼굴이 화끈대고 쑥스러웠다. 그녀의 느낌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지금은 그 벽촌인 방산까지 새마을 도로라는 이름으로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읍에서 15분이면 승용차로 내가 살던 집 앞까지 도착한다고 한다.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아들 내외와 딸 내외 그리고 손주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서 내가 자랄 때 겪었던 추억들을 설명해 주고 싶지만 건강이 안 좋아 그 꿈을 이루기가 불가능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머니 생각
-저 달
보리방아 찧던 초저녁 총총히도 별은 뜨고
이즈러진 제 몸 밝혀 저 달은 환히 운다
못박힌
어머니 손에
안타까운 항아님.
어릴 때 보던 달이 오늘 다시 떠 있는데
어머니 냉가슴은 그믐으로 기울어져
까맣게
타들어 갔던
보릿고개 그 긴 고개.
계간 시조세계 2009년 여름호 게재
여기에 실린 시조들은 내가 2005년에 『현대시조』로 등단해서 재작년까지 발간한 3권의 시조집과 계간집 등에 발표한 고향에 관한 글만 추려 학창시절을 추억한 글이다. 총 11편의 자작시조와 아내의 시조 한편 등 도합 12편을 엮어 고등학교 3학년으로 졸업한 20살까지의 학창시절을 풀어 보았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처럼 맑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커왔던 초·중·고 시절을 여든 살의 주름살 위에 한 폭의 그림으로 앉혀본다. 그리고 많이 늙었다는 현실이 슬프다.(2017.1)<끝>
첫댓글 울 시인님의 자서전적 시작 노트
조국의 시작 노트 보다 정원 시인님 글이 아주 좋아욤^-^
ㅋ ㅋ
진심이시면 나는 행복한 촌놈!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