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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제와 상상력의 문제
체험 혹은 경험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에는 언제나 상상력이 결합하여 그 경험의 시공간은 시인만의 창조적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인간만이 지닌 독특한 힘이다. 꿀벌이 아무리 정교하게 집을 짓더라도 가장 서투른 목수에게 미치지 못한다. 목수는 집의 용도에 맞는 설계도를 작성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연애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 사람과 어떻게 어떻게 교제하고, 결국 교제에 성공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아들딸은 몇을 낳고, 집은 언제쯤 사고, 또 이 사람과의 행복을 위해 나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는 상상력이 없다면 그 연애가 어찌 되겠는가.
상상력에 관하여 우선 다음 시 한 편을 보자.
<인식의 힘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흔히 ‘날개 돋친’이라는 자리에 괄호를 치고 그 말을 비운 뒤 채워보라고 하면 별별 소리가 다 나온다. ‘긴 다리의’ ‘뛰는’ ‘달리는’ ‘꼬리를 끊는’ ‘독을 가진’ 등등 짧은 다리의 한계를 극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현실적 대안만을 찾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주제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제목을 보아야 한다. 그건 ‘인식의 힘’이다. 그 다음 왜 주제에 니체의 철학적 경구가 붙어 있고 그것은 무엇이지 살펴야 한다. 그건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이다. 다시 말해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것이 인식의 힘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 대안보다는 좀더 고차원의 직관력을 통해 세계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인식의 힘이 결국 ‘날개 돋친’이라는 비약적 표현을 낳은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걸 인식의 힘이라고 했는데 결국 이건 상상력의 힘일 수밖에 없다.
두 개의 하얀 유방이 그녀의 블라우스 속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단조로운 설명적 묘사다. 흠잡을 데는 없지만 우리 눈을 환히 열리게 하거나 우리의 인식에 별다른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없는 경험 그 자체의 표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누트 함순이란 사람은 이 문장에서 ‘유방’을 ‘신비로움’으로 바꾸었다.
두 개의 하얀 신비로움이 그녀의 블라우스 속에서 나왔다
유방과 신비로움은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 사실 팽팽한 젊은 아가씨의 젖가슴은 누가 뭐라 해도 신비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잘 직관한 크누트 함순의 상상력은 그 단어 하나를 바꿈으로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한다.
일상적 삶은 지독히 평범하고 진부하다. 바람 빠진 풍선 같고, 찐 달걀 같은 삶의 이 비극적 단조로움과 폭폭함을 어린애 같은 경이의 눈길로 낯설게 보는 것이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자 삶의 허무를 넘어서는 확실한 대안이기도 하다.
<동백이 활짝> -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이 비범한 재능을 보라. 상상력의 놀라운 힘을 보라. 사자가 솟구쳐오르듯 꽃이 활짝 피다니, 허공으로 네 발 치켜올리며 허공에서 갈기 날리며 사자가 솟구쳐오르듯 꽃이 활짝 피다니! 여기까지도 비상한데 또 다음은 어떤가.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란다. ‘나는 어서 시를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에 동백꽃이 다 지기 전에’ 라는 정도의 말인데 이를 뒤집는 상상력의 힘을 보아라. 그러니 숫제 이 시에선 뛰어난 상상력이 동백을 활짝 피우고 있는 형국이다. 이게 귀신의 소리가 아니라면 누가 이보다 더 은유를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주제의식과 연관되지 않으면 한낱 마술지팡이 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내용과 형식으로 시작품의 형상화를 이루어낼 경험 소재들은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시적 세계를 창조해내는데, 여기에서 상상력이란 시적 주체의 인생관, 세계관, 혹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태도가 정립되어야 힘차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특수한 경험을 다수의 보편적 경험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이 주제의식은 시를 이끌어 가는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다. 흔히 상상력 하면 형식과 표현의 새로움에 관계하는 무슨 마술지팡이 같은 걸로 알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그 시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철학적․사상적 배경을 상상력과 연관시킨다.
가령 존재론적 상상력이니 사회정치학적 상상력이니 혹은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주제의식에 의한 상상력의 활용을 위한 말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얼마 전 한계전 교수가『한계전의 명시 읽기』에서 갈래 지은 전통․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에 천착한 시,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지향한 시, 현실인식과 역사를 껴안은 시, 사물의 비밀과 존재의 탐구에 주력한 시 한두 편씩을 살펴보며 상상력과 주제의식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살펴보겠다.
(1) 전통, 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
<수정가>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의 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 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을 산신 령은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서정주가 유일하게 자기 제자로 인정한 박재삼은「울음이 타는 가을 강」「추억에서」등의 명편으로 이미 전통, 자연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의 일가을 이루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수정가」또한 춘향이의 마음을 자연에 비유해 읊은 수일한 시다.
먼저 1연에서 춘향과 이도령을 자연적 존재인 집과 바람으로 비유한다. 즉 춘향을 집으로 친다면 정결한 물냄새가 풍기는 집, 곧 물로 만들어진 집이었을 것이고 이도령은 바람 같지만 그렇다 해도 바람은 물에 녹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연에서는 이도령을 향한 춘향이의 마음과 존재의 면모가 형상화되고 있다. 이도령을 향한 춘향의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춘향은 바람을 머금은 수정빛 물이 된다. 춘향의 푸른 그리움은 그 흐느낌 때문에 물살을 일으키지만 결국 춘향은 그 바람에 어울리는 수정빛 물이 되는 것이다.
이 계열의 시들이 대개는 눈물과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주제로 취하고 있는데 이 시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춘향이의 그리움이 물이라는 질료로 형상화된 점, 그리고 결국 이 물이 수정빛을 띰으로서 한의 정서가 승화된다는 점은 새롭다. 그리고 춘향을 집에 비유하고 이도령을 바람에 등치시켜 춘향은 정착적인 존재요 이도령은 부유하는 존재로 형상화한 점도 신선하고, 특히 집을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집” 등으로 묘사하여 비유와 상상력의 기발함과 함께 이미지의 깊이를 얻은 점도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산문시임에도 ‘-이었을레’ ‘-을까나’라는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춘향과 이도령이라는 허구적 인물과 그를 감싸는 신화적인 공간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이런 전통, 자연을 통해 사랑의 노래를 읊는 젊은 시인 중에 장석남이 있다. 물론 장석남은 여기에 모더니즘까지 가미하고 있으나 역시 그의 정서는 세상에 온 모든 생들을 측은히 여기는 전통적 서정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라.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득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드는 배여
남녀 관계엔 항상 사랑과 이별의 변주가 있다. 김소월의「진달래꽃」, 한용운의「임의 침묵」이 그렇고 서정주의「歸蜀道」와 박목월의「하단에서」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장석남의 이 시에도 사랑과 이별의 변주가 공식처럼 자리하고 있다. 지금 시적 화자는 사랑을 하다가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그는 어느 가을날 바닷가에서 배를 밀어보는 아주 독특한 경험 혹은 상상력을 통해서 비유해낸다. 먼저 이별을 모양새 있게 하는 것은 사실 배를 밀어보는 것만큼이나 아주 드문 경험일 게다. 대개는 이별의 순간에 울고불고 하거나, 원망의 비수를 들이대거나, 아니면 철저히 계산적이어서 위자료부터 챙기는 오늘의 세태에 되레 떠나겠다고 하는 상대의 등을 희번득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듯이 한껏 더해 밀어주는 시적 화자를 보라. 아마 꿋꿋하게 잘 살으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밀어주었을 것이다.
한데 너무 많이 밀다간 자기의 온몸이 배 쪽으로 추락해버릴 수도 있으므로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 그 순간에 아슬아슬히 배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한껏 더해 밀어주다가 그만 이별의 격정에 겨워 상대 쪽으로 다시 쏠리거나 안겨버리면 참으로 대장부답지 못할 것 같아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허공에서 손을 거두는 사내의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도 선연히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사랑은 참 부드럽게 잘도 떠난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 잘도 나간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배를 한껏 세게 밀어냈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떠나보내고 슬픔을 밀어낸다고 해서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처럼 잠시 머물다 가라앉을 마음이겠는가. 오히려 나의 내부로 밀려드는, 아무 소리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랑과 슬픔의 배에 다시 잠식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애처로움이여. 아니 사랑은 오고 가고 또 가고 오는 것일진대, 오는 사랑 막지 말고 가는 사랑 잡지 말진저!
(2)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에 천착한 시
<부억의 불빛> -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이 시는 순수 서정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부엌의 불빛을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고 보며 부엌의 온기와 어머니의 사랑을 동일화한 수법은 세계를 자아화하여 정서를 주관적으로 드러내는 서정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실주의적 시각에 치우친 사람은 이 시가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시골도 이젠 도시화되어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던 부엌이 사라진지 오래며 고양이와 개가, 또 어머니와 아이가 하나의 공간 속에 화합을 이루는 장면도 이제는 보기 힘들다고 말할지 모른다. 차라리 도시문명의 침윤에 의해 파편화 되어가는 농촌의 삶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든가 인간의 본원적인 모습을 상실해가는 인간부재의 정황을 고발하는 것이 시인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꼭 그렇게 당위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라져가기 때문에 아름답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런 장면을 복원하는 데 시인의 상상력이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상상력은 과학자의 정밀한 분석력이나 집중적 탐구력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시의 상상력은 소설이나 희곡 등 다른 문학갈래에서 볼 수 없는 본질에의 육박성을 갖는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로 회감하고 자아와 세계가 융합하는 신화시대의 본원적 체험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근대 이후 신화적 세계관은 무너지고 우리의 의식에는 과학적 세계관이 터를 잡았다. 생의 모든 국면에 있어서 우리는 계량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사물과 세계를 대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에서 신화적 상상력이 작용하여 사물이 재구성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부엌의 불빛과 어머니의 무릎은 다른데 시에서는 그것을 동일화한 것이나, 저녁이 팥죽처럼 끓고 고양이가 접시의 불빛을 핥는다거나, 수돗물에도 불빛이 쏟아지고 어머니의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계속 밝힌다거나, 마지막으로 부엌의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으면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별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인간의 자애로움 속에 부엌의 모든 사물이 온화한 불빛을 나누어 갖는다. 고양이가 핥는 작은 접시에서부터 하늘의 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두루 퍼진다고 생각하는 경지는 인간과 인간의 갈등, 인간과 세계의 갈등을 모두 무화시키는 경지다. 모든 갈등이 합일의 공간에서 해소되어야 한다는 염원을 형상화하는 경지다. 그 염원은 갈등에 시달리는 현재의 곤고한 삶에 위안을 준다.
이제 순수 서정이 내면의 울림과 조우한 시를 한 편 보자.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 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꽃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김용택은『섬진강』연작을 통해 순수서정과 사회 역사적 분노를 결합할 수 있는 시를 수일하게 보여준 시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바로 그 순수서정과 내면의 울림이 행복하게 조우한 모습을 보여주며 아울러 그의 많은 시에서 드러나는 시의 평면성을 극복해낸다.
지금 시인은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있는 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는 아마 이별의 서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 그 앞에는 풀잎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서 햇살 속에 빛난다. 그럼에도 사람마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고, 그 까닭에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의 흰 이마도 서럽다. 하지만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그 꽃은 겨울의 삭풍한설에 찢긴 자리에서 피어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고통 속에서 피어나고 그 고통은 또 꽃처럼 천천히 피어난다. 비록 오늘 고통스럽지만 몽땅 산 뒤에 있는 그리운 것들을 다시 그리워하다 보면 뒤로 오는 다정한 여인처럼 손에 닿지 못하는 것들이 꽃들이 되어서 돌아오리라. 그렇게 한 사람을 위로하지만 사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은 그런 내면의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시인 자신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 사람을 거기에 세웠을 뿐이지 실상은 시인 자신의 내면이 형상을 입은 경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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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벼랑 끝 / 조정권
벼랑 끝
조정권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조정권 시집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 중에서
조정권 연보
1949년 서울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
양정고와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양정고 3학년 때 교지에 투고한 산문을 보고 지도교사(김상억)의 권유로 시 공부.
1970년 시 <흑판>이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시학> 창간 신인 시인으로 등단.
1975년 <신감각> 동인으로 활동.
1977년 첫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조광출판사) 출간
1982년 제2시집 <시편>(문학예술사) 출간
1985년 제3시집 <허심송(虛心頌)>(영인문화사) 출간. 제5회 녹원문학상 수상.
시선집 <백지 위에 별빛을〉출간. 제5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7년 제4시집 <하늘이불>(나남) 출간.
1987~1991년에 <산정묘지> 30편의 연작시 창작.
1988년 시선집 <바람과 파도> 출간. 제20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91년 제5시집 <산정묘지>(민음사) 출간. 제1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2년 제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4년 제6시집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출간. 제39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0년 시집 <산정묘지>(시르세출판사)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
2002년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문학동네) 재출간.
2005년 제7시집 <떠도는 몸들>(창비) 출간. 2005년 제18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2010년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1년 시집 <고요로의 초대>(민음사),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서정시학) 출간.
제2회 질마재문학상, 제4회 목월문학상 수상
2012년 육필시집 <산정묘지>(지식을만드는지식)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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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돌 / 조정권
돌
조정권
그는 여기 있으나
그의 얼굴은 먼 바람 소리 속으로
여행을 떠나갔다
그리고 더 먼 곳에 가서
그의 마음을 만났다
조정권 시집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