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색내다 / 류창희
“함 사세요.”
신랑 친구들이 왁자지껄 외치는 소리가 어둠을 타고 올라왔다. 앞집 꽃잎이네가 함 받는 날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의 혼사이니 함을 팔러 오는 거리가 지척이다. 대서양을 건너오는 것도, 예전의 나처럼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함진아비와 신랑 친구들이 신부집으로 빨리 들어오도록 하는 가상한 소임을 자처했다. 아들 뻘이 되는 젊은 친구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애교 실랑이를 펼쳤다. 뺑덕어멈이 따로 없다. 이웃의 소음신고를 받지 않으려면 남정네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 한 계단 한 계단씩 22층까지 돈 봉투를 즈려밟고 밀고 당기는 촌극 없이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올라왔다.
누가 나에게 부탁이나 했나. 괜히 혼자 들떠 바쁘다. 그뿐인가. 신부집 부엌으로 들어가 혹시 빠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는데 횟거리에 고추냉이는 있으나 간장이 모자란다. 초고추장과 쌈장이 있으니 간장소스는 꼭 없어도 된다. 그러나 나는 이왕이면 잘 갖추는 걸 보고 싶었다. 얼른 집으로 와 보니 우리 집에도 간장이 떨어졌다.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걸, 아랫집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간장을 건네주며 “나는 초대 안 하고…”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나도 초대받지 않았다. 그냥 쳐들어간 것이다. 요즘, 누가 함 받는 것을 반상회에 공지하겠는가.
공자, 가라사대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 했는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얻으러 가니 그 이웃에게 빌어다가 주었다.”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 乞醯焉 乞諸其隣而予之 -공야장편
미생고는 노(魯)나라 사람으로 평소에 정직하다는 이름이 있는 자다. 그는 어느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오지 아니하고, 때마침 강물이 불어나자 나무다리 들보를 껴안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고지식하게 죽은 사람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직인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 왔을 때 자기 집에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빌어다가 준다. 공자께서 이를 보고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생색을 낸 것을 기롱하신 것이다. 식초가 비록 작은 물건이기는 하나 솔직하지 못함은 크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있으면 있다고 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나는 날마다 손발이 바쁘다. 왜 그런가. 남의 일로 곳곳을 넘나들며 어진 사람의 인(仁)을 빌리러 다닌다. 내가 꽃잎이네를 특별히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 붙여도, 결국은 남의 집 간장을 빌려다 혼자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은 들은 셈이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요즘 세태에 어쩌면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德目)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는 것 또한 명예욕의 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