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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계급
빅토리아 여왕 (재위: 1837-1901)
1. 작위와 영지를 소유한 귀족계급 Peerage (상층 계급 Upper Class)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 계급입니다.
중세 봉건 영주 계급에 뿌리가 있습니다. 극소수의 가문들로 구성되며, 세습되는 작위와 대규모 영지를 소유하고 있
습니다. 작위의 이름은 상하 위계 질서에 따라 공작 (duke), 후작 (marquis), 백작 (earl), 자작 (viscount), 남작
(baron)이 있습니다. 참고로, 공후백자남의 한국어 번역은 본래 고대 중국의 귀족 작위를 의미합니다.
귀족계급의 경제적 기반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입니다. 본래는 자신의 영지에 속하는 농민을 준노
예로 소유했지만, 14세기 이후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영주에서 대지주로 성격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땅
을 소유함으로써 권세를 유지했습니다. 18세기 이후 귀족들은 해외 식민지 개척과 산업혁명에 투자를 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귀족은 노동계급 (working class), 즉 '일하는 계급'이 아니었고, 이러한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귀족은
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세습했기 때문에 정치가가 되거나 군인, 또는 학자와 성직자를 '취미' 겸 직업으로 가
졌습니다. 직업 없이 놀고 먹는 귀족도 물론, 많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은 귀족의 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겨
졌습니다.
귀족계급은 대대로 세습한 시골 저택에 거주했는데 이를 컨트리 하우스 (country house)라고 합니다. 귀족은 전국
곳곳에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 중 가문의 역사와 가장 유서 깊은 저택을 특별히 패밀리 시트
(family seat) 또는 컨트리 시트 (country seat) 라고 부릅니다. 한편 사교 시즌을 위해 대도시에 따로 집을 마련
하기도 했는데 이를 컨트리 하우스와 구분하여 타운 하우스 (town house)라고 합니다.
귀족계급의 영향력은 산업혁명 이후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지만 19세기 내내 막강한 권세와 부를 누렸습니다. 젠트
리와 중간계급은 귀족계급을 선망했기 때문에 때때로 남작 같은 하위 귀족 작위가 부유한 이들에게 높은 가격에 팔
려 국가 재정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바스 후작 가문의 컨트리 하우스country house로 16세기에 건설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스카스데일 자작 가문의 패밀리 시트 (family seat)
13세기부터 귀족 가문에 세습되었고,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7세기에 새로 지어진 것입니다.
말보로 공작의 피를 물려 받은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경
그의 모친은 미국 자본가의 딸이었는데 19세기에는 경제 위기에 처한
영국 귀족과 미국 상공업자 간의 혼인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2. 작위는 없지만 토지를 소유한 젠트리계급 Gentry (상층계급 Upper Class)
젠트리 계급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6세기 이후 입니다. 젠트리 계급은 봉건시대 무사 계급, 즉 봉건시대 가장 하
층에 속한 지배 계급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무사들의 후손만이 아니라 부유한 상인과 귀족의 먼 방계들도 포함
되었습니다. 젠트리는 공작이나 백작 같은 귀족 타이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귀족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굳이
의역하자면 '시골 양반' 정도 됩니다. 귀족 타이틀은 아니지만, 명예 작위로서 준남작 (baronet), 기사 (knight) 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젠트리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땅과 저택을 대대로 세습했습니다. 소유한 땅에서 거두어 들인 임대료가 젠트리의 경
제적 기반이었습니다. 젠트리는 귀족 만큼 권세를 누리진 못했지만, 나름의 전통과 영향력을 자랑한 계급으로 영국
농업의 자본주의적 변화를 주도했고, 17세기 시민 혁명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자급자족적인
영주의 장원이 붕괴되면서, 영국과 서유럽 전체에 유통망이 갖추어졌고, 분업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
에 맞추어 수출용 대단위 농장과 목장이 발전했습니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이 바로 중소 지주인 젠트리였던 거죠.
귀족과 마찬가지로 젠트리 계급도 직접 농사를 짓는 않았고, 따로 생업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한다는 관념을 경멸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부유한 평민이 젠트리 사회에 편입되려면 시골에 땅과 저택
을 구입하는 것 외에도 원래 갖고 있었던 직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귀족과 젠트리를 합쳐서 영국의 '상층계급'을 구성했습니다. 이들 상층 계급은 레져 (leisure), 즉 여가 생활을 중시
했습니다. 음악회, 뱃놀이, 야유회 등은 중요한 사교적 기능을 담당했고, 도보여행, 승마, 사냥, 테니스 등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19세기 이후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었고, 농업의 중요성이 감소하자, 젠트리와 귀족은 점차 산업 자본가에 밀려 사회
적 영향력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도 귀족과 젠트리는 여러 방면에서 영국 사회의 리더 격이었고
수많은 정치, 문화 엘리트들을 배출했습니다. 상층계급의 몰락은 알게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었고, 양차세계대전
과 그를 전후한 식민지 독립에서 결정타를 입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땅과 저택을 팔아 도시에 정착했고, 점차 계급
적 색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귀족, 젠트리, 고위 성직자로 구성되는 상층계급 (upper class)은 19세기 중반 무렵 영국 인구의 상위 2%를 차지
했습니다.
런던 벨그레이브 광장의 테라스 하우스 (terraced house)
젠트리 계급이 사교 시즌을 위해 도심에 마련한 타운 하우스(town house)였습니다.
테라스 하우스는 단독 주택들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도시형 연립 주택입니다.
18~19세기에 대량 건설되었습니다.
16세기에 건설된 컨트리 하우스로 젠트리 출신인 에드워드 펠립스가 지었습니다.
그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거주하다가 20세기 초에 미국인 사업가에게 팔렸습니다.
지금은 영국 국가 소유입니다.
17세기에 건설된 저택으로 원소유주의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현재까지 후손들에게 세습된 저택은 소수이며,
대부분은 20세기 이후 부유한 사업가와 국가에 팔렸습니다.
젠트리 출신으로 영국의 초대 총리인 로버트 월폴 경
세습적인 특권과 식민지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은 귀족과 젠트리의 주요 수입원이었습니다.
3. 전문직 혹은 상공업에 종사한 중간계급 (Middle Class)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중간계급은 현대의 중산층과 의미가 다릅니다. 다른 말로 '시민 계급' 또는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계급은 중세 도시 시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래는 농민이었지만 도시에 이주한 것이죠. 중간계급은 주
로 의학, 법학 같은 전문직과 상공업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땅의 소유 여부가 상
층계급의 주요한 자격 요건이었기 때문에, 땅을 소유하지 못한 중간계급은 귀족과 젠트리보다 사회적으로 열등하다
고 여겨졌습니다. 땅의 소유 여부뿐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계급은 상층계급과는
달랐습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자본가가 성장하고, 법률, 교육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간계급의 힘은 크게 성장
했습니다. 중간계급은 19세기 끝트머리에 이르면, 사실상 영국을 다방면에서 주도하는 계급으로 성장했습니다. 중
간계급은 상층계급의 레져 (leisure) 중심 문화보다는 성실함과 검소함, 종교적 신앙심 등을 중시했고, 빅토리아 시
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중간계급의 부모들은 스포츠의 교육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아 테니스, 크리켓, 럭비 같은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자녀
들에게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이전까지 자녀 교육 방식으로 귀족과 젠트리가 개인 교습을 선호했던 것과 달
리 중간계급은 엄격한 규율과 단체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사립 기숙학교를 선호했습니다. 따라서 빅토리아 시대에
는 중간계급의 교육열에 힘입어 각종 사립 기숙학교들이 성행했고 ,상층계급에서도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관습
이 유행했습니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산업체를 경영하거나 법률, 의학 같은 전문직 서비스 제공을 통해 생활했습니다. 또한 영국이 해
외로 팽창하면서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중간계급은 주로 사교 시즌에 도시에 거주했던 귀족, 젠
트리와 달리 일상적으로 대도시에 거주했습니다. 런던의 메이페어, 나이츠브리지, 첼시 지역이 대표적인 중간계급
거주지였습니다.
중간계급 중 교수, 학자, 법률가, 의사 같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상층계급 (upper-middle class)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재미있는 점은 산업 자본가는 아무리 부유해도 어디까지나 중간계급 (middle class)으로 여겨
졌다는 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경제적 척도보다도 가문, 신분,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을 계층 구분의 중
요 요소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중간계급은 소규모 자영업자, 학교 교사에서부터 대재벌에 이르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계급 내부의
경제적 격차가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봉건적 상층계급(귀족, 젠트리)이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던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이들 중간계급은 어느 정도 계급적 동질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영국 인구의 15%
~20% 가량을 차지했습니다.
18세기 말에 건설된 타운 하우스로 중간계급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런던 메이페어의 테라스 하우스
메이페어는 빅토리아 시대 부촌의 대명사였습니다.
중간계급 성장에 큰 원동력이 된 북부 잉글랜드의 공장 지대
빅토리아 시대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던 잉글랜드 은행
상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글래드스턴 전 영국 총리
크리켓 같은 단체 운동은 사립학교, 나아가 빅토리아 영국의 가치를 대표한다고 믿어졌습니다.
19세기 중반 무렵 어느 한 중간계급의 가정을 그린 그림
중간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개인주의와 가정생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4. 빅토리아 시대 영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노동계급 (Working Class)
노동계급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중간계급 (middle class)과는 경제적 측면에서 상
당한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노동계급의 상층부는 상점 고용인, 사무 직원, 메이드, 소작농, 숙련 노동자 등으로 이
루어졌고, 하층부는 비숙련 노동자, 광산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하층부에 속한 사
람들은 빅토리아 19세기 내내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영제국의 수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
던 런던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라고 불린 것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영국의 자본주의를 관찰하며 자본주의를 미래를 고민했고, 19세기 말부터 사회주
의 사상의 확산과 노동 운동과 파업의 결과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힘이 조금씩 신장되었고, 국가는 복지 정책에 보다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영국 뿐만 아니라 독일 및 북유럽 국가에도 퍼져,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
는 20세기 초에 이미 복지 국가로 진입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는 육체 노동에 관계된 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서비스 노동자, 즉 화이트칼러 노동자
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노동계급은 19세기 중반 영국 인구의 70~80%를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축구가 영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오른 것은 순전히 노동계급 덕분입니다.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귀족, 젠트
리, 부르주아의 스포츠였던 크리켓과 럭비가 '국민적' 스포츠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런던 이스트엔드에 있는 노동자 주택
어린이들의 노동은 중요 사회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공장의 매연으로 도시에서의 삶은 열악했습니다.
영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노동당은 빅토리아 시대 노동 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입니다.
위 인물은 블레어 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