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날들
이필영
사위가 조용한 밤입니다. 노인은 좀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옆에서 곤히 자는 딸을 깨울까 말까 백 번쯤 망설이다가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중얼거립니다.
몇 시쯤 됐는공, 아이고 마, 오늘 밤은 와 이래 지업노.
노인은 손을 뻗어 딸의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손도 만져보고 이불깃도 여며줍니다. 거칠었던 손마디가 희고 얇게 변한 당신의 손을 들여다보다가 머리 위로 올려 호랑나비 날갯짓처럼 너풀너풀 흔들어도 봅니다.
날 샐라카머 안즉 멀었능강.
딸은 설핏 잠이 깼지만 불효막심하게 못 들은 척합니다.
야야, 니 참말로 자나.
엄마 아직 한밤중이다. 지금 일어나면 출근해서 근무하기 힘듭니다.
고마 일나거라. 잠 쫌 몬 자면 어떻노, 에미캉 살날도 멀잖다.
‘어미와 살날도 멀잖다’는 그 한마디는 언제부턴가 노인의 최강 무기가 되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추적이는 가을비 속 저문 날입니다. 딸은 활짝 잠을 깹니다. 모녀는 백 번쯤은 했을 문답을 처음인 양 시작합니다.
처자는 본관이 어딥니까요.
내사 본관이 뭣인지 모릅니다요.
아이고 본관을 모르먼 근본 없는 집이라 카는데. 니 참말로 모리나.
딸을 낯선 처자로 가정해 놓고 묻다가 딸이 모른다고 어깃장을 놓자 화들짝 놀라는 노인의 목소리에 딸의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성인聖자, 길道자 울엄마는 본관이 어디시온지요. 딸은 월성 이가올시다만.
나는 밀양 박가올시다.
밀양 박씨와 월성 이가는 누가 더 양반입니까요.
그야 밀양 박가가 음침 양반이지요. 월성 이씨는 마이 처집니다. 안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행신머리로는 양반 축에 몬낍니다.
딸은 불같은 아버지의 성품으로 평생을 안절부절 사셨던 어머니가 그 시절의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을 익히 알지만 또 어깃장을 놓습니다.
성도 엄마 딸도 월성이가인데요.
내 딸이사 양반이지요.
그라머 마, 월성 이가도 양반이올씨다.
심심하면 주고받는 실없는 농담이지만 모녀는 일전일퇴를 끝내고는 손뼉을 치며 웃습니다. 시간은 그사이 새벽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딸이 커피를 태워 노인의 머리맡에 앉습니다. 모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 향에 젖어 듭니다.
예전에는 저런 소지랑물 같은 게 무슨 맛인공 싶더니, 이게 요래 혀끝에 달착하니 땡기는 것인 줄 우예 알았겠노. 느거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대이.
아흔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딸의 출근길을 환하게 배웅해주셨습니다. 생사를 넘나든 담석증 수술을 받은 후 간신히 소생하셨지만, 기력이 쇠잔해져 혼자서는 돌아눕지도 못합니다. 늘 누워만 있으니 밤낮이 바뀌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밤새도록 전등을 켜놓기로 하자, 당신은 좋지만 딸이 선잠을 잘까, 전기세 많이 나올까, 걱정을 하십니다. 얼핏 잠을 깨고 어머니가 혼자 팔을 흔들며 지루함을 견디는 장면을 목격하면 딸은 동요를 개작해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엄마는 착해서 딸 말도 잘 듣고요.
우리 엄마는 착해서 잠도 쿨쿨 잘 잡니다.
하이고, 야가 에미를 얼라처럼 놀린대이. 걱정 말고 니는 인자 자거라. 푹 자야 새 힘이 솟는 기라.
엄마 자자, 엄마가 주무셔야 딸도 편히 잠들지요. 엄마가 밤중에 혼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거를 상상하면 내가 괴롭고 슬픕니다.
니가 괴롭다 카머 에미가 미안치. 나는 원래 생각이 많은 심사라서 이런저런 세상살이 생각하다보머 니가 걱정하는 거만치 지업지는 안타.
세상에나, 아흔셋 울엄마 철학가시네. 그라머 딸은 잠듭니데이. 생각 마이 하시고 아침에 인생살이 한 수 갈채 주이소.
딸이 휴일을 알리는 하루 전날이면 어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습니다. 거실에 누워서 딸이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도마질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안을 오가는 모양을 바라만 봐도 흐뭇하다고 합니다.
내 딸이 노는 날은 만사가 형통이라. 세상만고 부자가 눈 아래로 비는구나. 잡채를 해묵으면 입맛이 생길라나. 콩나물밥도 맛있고 손국시도 그만이제. 보자보자 가실이머 무시국도 맛날 때고 내 딸만 옆에 있으머 안 묵어도 배부르지.
어머니의 가사체 운율에 딸은 둥 디딩 둥 가락고의 음률을 얹습니다.
야야, 나를 한번 일바쳐바라. 아이고, 지 몸도 지 맘대로 몬하머 죽을 때가 벌써 지났구만은.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말똥에 구불러도 이승이 좋다고. 오늘 같은 날은 안즉도 죽기는 싫다. 야야 박달재 노래 한번 불러라.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한 소절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어머니는 박수를 짝짝 치며 뒤따르는 가사를 빠르게 알려 줍니다.
물항라 저고리가 굳은 비에 젖는구나.
어머니 먼 길 떠나시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딸은 사라진 날들을 소환하여 긴 밤을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