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지난 3일간 518재단에서 열렸던 아시아문화심포지엄에서 어제 종합토론 때 제가 플로어 한귀퉁이에서 정말 어렵게 발언기회를 얻어 한 발언요목입니다. (컴플렉스에 찌든 이의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의 토론을 너무 유익하게 잘 봤습니다. 특히 첫째 날 사카이 교수님께서 비서구의 명징한 인식을 위해 서구를 아는 것의 중요성, 서구를 인식하는 데 꼭 따르게 되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해주신 것은 너무 큰 소득이었습니다.
이튿날 저는 세션1의 조엘 칸 교수님의 발제를 듣고, 하는 일과도 관련돼 두 번째 발표시간에는 세션4의 백원담, 허꿰이메이 교수님의 발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션4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식의 논의 진행이 굉장히 불쾌합니다.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이래 지난 2년간 광주를 문화도시로 만든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처럼 광주문화도시에는 광주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 세션4의 발표 내용, 저는 아직 상세한 내용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제목으로 볼 때, 이것은 굳이 광주에서 할 필요가 없는 내용의 논의입니다. 물론 광주 역시 한국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이 갖는 일반적인 문제들, 대중문화라든지, 영화, 문화연구의 방법에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이 다뤄져야 하긴 합니다만, 광주는 한국의 수도 서울이 갖는 보편성이라면 보편성이랄까, 그런 것에 대비되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일테면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은 1세계에 비해 3세계로서 주변이지만, 광주나 전주, 제주와 같은 도시들의 중심입니다. 이래서 이런 현상들이 발생합니다. 칸트나 헤겔, 맑스가 이곳 광주에 전해올 때는 항상 1세계에서 직접 전해지지 않고 서울이라는 중간기착지를 통해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연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지난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을 잘 살게 하기 위해 한국의 중앙에서 모든 계획을 입안해 국민을 철저히 대상화 시켰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학생이었습니다만, 그 ‘새마을’이라는 잡지의 인상이 생생합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자는 거였지요.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부정적인 모더니즘의 기획, 계몽의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나 저는 광주를 문화도시로 만든다는 지금도 그런 계몽의 의미들을 읽습니다. 이 앞전에 문화중심도시 조성 추진기획단에서 만들었던 ‘문화아시아’라는 책을 보고 저는 심한 자책감에 빠져야 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래 광주를 문화도시로 만든다고 말은 하지만, 이것도 결국 광주와 무관하게 서울 사람들, 너희들이 만들구나, 그렇게 서울에서 만들어서 광주에 배포하구나 하는 자괴감 말입니다.
세션4의 진행에 대해서도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광주는 분명 서울과 다른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에서도 가장 개발이 되지 않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전근대의 흔적들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광주는 인구 140만의 매갈로폴리스지만, 이곳은 주변의 광할한 농지와 산,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제 나이 올해 43살입니다만, 지금 광주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이런 주변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입니다. 30년 전 저는 민다나오 섬 사람들과 똑같은 원주민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깊은 산에 들어가 뗄나무를 했고, 직접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농사기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게도 만들고 짚신도 삼을 수 있습니다.) 제가 11살 때 비로소 전깃불이 처음 들어왔습니다. 박정희시대의 근대화가 시작된거죠. 그리고 저는 광주라는 대도시로 이사와 80년 518을 겼었고, 그때부터 저의(그리고 저와 동년배 친구들의) 삶은 완전히 방향을 달리 했습니다. 이른바 학생운동이 거의 저의 삶의 모든 것이 된 겁니다. 그리고 저는 10여년 전부터 광주비엔날레라는 미술/문화의 국제교류를 하는 행사일을 합니다. 주로 인터넷을 보며 살지요. 그러니까 저는 43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산골에서 소 꼴을 베다가 인터넷을 쓰며 국제화와 지역화를 이야기 하며 살아가는데, 정말 머리가 빙빙 돕니다. 삶의 형태가 너무 많이 바뀌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 많지 않은 이 나이에 제가 살았던 곳을 생각해보니 이사만 해도 20번 넘게 했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그 삶의 형태가 바뀐 것처럼 매번 하는 일에 맞추기 위해, 그에 관련된 것들을 새로 익히느라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옛 것은 버리고 그 자리에 새 것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생 때는 맑스를 외웠고, 졸업해서는 들뢰즈와 가타리를 읽었고, 앞으로 저는 뭘 또 배워야 할 줄 모르겠습니다. 광주를 문화도시로 만든다는 이런저런 전문가들, 지난 2년간 수많은 전문가들이 만들었다는 광주문화도시에 관련된 텍스트들을 익혀야 할까요? 전문가가 못되는 저 같은 사람은 그럼 뭔가요? 이것이 참여정부가 말한 참여인가요? 정말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짧은 말의 결론을 삼아 말하겠습니다. 이런 논의가 앞으로도 지속되고, 실속 있게 되기 위해서는 진행과정에 저를 포함한 많은 광주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붕어빵에 붕어를 넣어달라’는 것이지요. 이건 특히 이 일의 학술 일을 맡고 계시는 조경만 선생님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삶의 과정에 우리가, 제가 직접 개입할 수 있을 때 비서구의, 지역화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부디, 광주를 문화도시로 안만들어도 좋으니 우리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방향 짓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제 세션1의 딜립 찬드랄랄 교수님과 오끼나와 원주민이신 토우바루 카즈히꼬 선생님의 오끼나와의 현실은 정말 새로운 충격이며, 저의 몸을 달굽니다. 또 디바오대학에서 오신 알버트 알레호 선생님, (너무 미인이어서 쑥스러워 말도 못건네봤습니다만) 남반부 포커스 연구원이신 줄리 데 로스 레예스 선생님도 저에게 다른 데서 접할 수 없는 민다나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길 전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광주가 이런 우리들의 아주 가까운 토착민들, 국가나 기존의 인식체계나 최근의 활발한 정보망들로부터 차단된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만나고 대안을 함께 찾길 진심으로 바랩니다.
불만도 있지만, 또 이번 심포지엄은 저에게 유익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대만의 토착민 출신 연극인인 나의 벗 충차오씨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작년 이래 그는 이번에 세 번째로 광주를 오가며 우리와 ‘아시아마당’이라는 문화행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일을 진행하는 여건이 열악하고 주변환경이 결코 좋지 못합니다. 이런 식의 일을 두고 우리는 ‘맨 땅에 헤딩을 한다’고 말합니다만, 아마 이것은 ‘사막에서 과일나무를 키우려는 것’ 만큼이나 무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아시아의 연대를 위한 노력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