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아들의 비유
큰아들은 그날도 온종일 밭에 나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집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직접 묻기보다 하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하인은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루카 15,27)라고 하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어떻게 아버지는 망나니 동생이 돌아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환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큰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사실 큰아들의 이러한 태도는 아버지께 대놓고 반항하는 행위입니다. 작은아들은 집을 떠남으로써 반항했다면 큰아들의 반항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직접 밖으로 나와 큰아들을 달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봅니다. 큰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포용하는 태도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항하는 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타이르다’로 되어있지만, 그리스어 ‘파라칼레오’는 그 외에 ‘간청하다, 호소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동사는 계속적 행위를 나타내는 반과거 시제로 쓰여 아버지의 간청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곧 아버지가 큰아들의 화난 마음을 풀어주고 집에 돌아오도록 계속해서 간청하고 호소한 것입니다.
큰아들은 너무 화가 나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표현들만 골라서 씁니다. 그리스 성경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니라 ‘보십시오’라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동생을 ‘내 동생’이 아니라 ‘저 아들’이라고 합니다.(15,30) 이 말은 동생을 더 이상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조롱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큰아들은 ‘저 아들’을 수식하는 말로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창녀들에게 전 재산을 갖다 바친 당신의 그 잘난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바보처럼 살진 송아지를 잡았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또한 큰아들은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면서 가족관계를 부정해 버립니다. 그리스어로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살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을 사랑의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인 ‘명령’으로 바꿔버립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자기에게는 염소 한 마리 준 적도 없으면서, 창녀들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한 동생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었다고 항의합니다.(15,29-30 참조) 화가 나고 실망스럽다고 해서 가족관계까지 부정하고 단절하려는 큰아들의 모습은 내 안에서도, 우리 가정에서도, 이웃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는 이유
큰아들은 아버지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가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적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유산은 여전히 아버지의 통제 하에 있는데, 동생을 위해 큰 잔치를 벌여서 자신의 재산이 축나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결국은 자기 몫의 재산으로 빈털터리 동생을 먹여 살릴 것이 분명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큰아들의 불만은 동생이 돌아와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있던 불만이 이제야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불만은 자신이 동생과 달리 재산 처분권이 없다는 점입니다. 동생은 자기 몫의 재산을 처분해서 흥청망청 사는데 자기는 아버지 밑에서 죽어라 일만 하고, 친구랑 즐기려 해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염소 한 마리 잡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큰아들은 자신을 아버지의 ‘종’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말 성경의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15,29)를 직역하면,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으로서 아버지를 섬기며”입니다. 여기에서 ‘섬기다’란 말도 크게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자발적 섬김을 말하는 ‘디아코네오’와 강제적 섬김인 ‘둘레우오’인데, 큰아들은 여기서 ‘둘레우오’를 썼습니다. 그는 큰아들이라는 명예로운 신분과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집안을 이끌어 간다는 자랑스런 사명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있겠습니까.
큰아들이 품은 또 다른 불만은 그의 억압된 욕망과 관련된 동생에 대한 질시였습니다. 동생이 ‘창녀들’에게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말한 사람은 큰아들입니다.(15,30 참조) 이 비유 어디에도 창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13절에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라는 말만 나옵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방종한’이라는 뜻인 ‘아소토스’는 구원이 없는 허망한 행동을 가리키지, 꼭 집어서 문란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13절에서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무모하고 경솔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동생이 창녀들과 놀아나면서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처럼 정보망도 없던 그 옛날에, 고향을 떠나 이방인 도시로 가버린 동생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설령 소문을 들었다 해도 아주 미미할 정도였을 텐데도, 큰아들은 마치 직접 보기나 한 것처럼 동생이 창녀들과 놀아나며 돈을 탕진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맏아들인 자기는 죽어라 일만 하는 데 비해, 예쁜 여자들이랑 놀아났을 것 같은 동생에 대한 시샘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도덕적인 사람이기에 동생처럼 무질서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적도, 의무를 소홀히 한 적도 없습니다. 동생이 돌아온 그날도 그는 들에 나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그런데 도덕적 자아가 강하게 자리 잡은 곳에는 굶주린 욕망도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큰아들이 동생처럼 탈선하지 않았던 것은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 수치를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뿐, 내면에는 굶주린 욕정의 발산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반항은 자신의 억압된 욕망과 동생에 대한 질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큰아들은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지극한 사랑으로 그를 아들로 대하는데, 그는 의무적으로 아버지를 주인으로 대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늘 함께했어도 실제로는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으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을 즐길 수도 없었습니다.
나아가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뿐 아니라 아버지의 은총도 몰랐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것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 자신들의 공로 덕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한평생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을 몰랐습니다. 이런 큰아들이야말로 또 다른 탕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쉽게 큰아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나에겐 큰아들의 모습이 없을까요? 만일 나에게도 이 비유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떤 태도로 나올까요? 아버지가 재산을 허망하게 낭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도 못마땅한데, 앞으로 내 몫이 될 재산으로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 과연 나는 그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는 늘 모범적으로 살았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망나니같이 살다가 돌아온 동생을 대하는 아버지의 처사는 공평치 않은 것 아닌가요? 아빠 하느님의 사랑은 큰아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