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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3>
매혹적 형상과 직절(直切)의 시학
- 김장순 시인의 시적 차별성과 생명의 언어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 고문)
1. 자의적 차별화와 빛의 언어
보편적으로 서정적 미감이 확립된 시편은 감동을 회복시켜 지극히 창조적이고 감미로운 것을 재현(再現)하는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결과물을 손금을 보듯 꼼꼼히 챙기고 끝내 통합하는 행위는 불꽃의 섬광(閃光)에 맞물린 깊은 사유와의 합일이다. 까닭에 열정을 태우는 주체와 그 대상의 차별성을 무화(武火)시키며 융합하고 상승하는 역동성을 지닌 감성의 시집『어머니의 山房』(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 수록된 정신적 생산물을「매혹적 형상과 직절(直切)의 시학 - 『어머니의 山房』그 차별성과 생명의 언어」라는 전제는 ‘망각한 불의 꿈을 다시 지피는 정신작업’의 잇닿음이다.
그렇다. 인연(因緣)의 소중한 연계 층위에서 평자와도 맞물린 경현수 시인과의 관계성에서 우연히 강릉고등학교 각별한 후배인 최선교 변호사의 부인인 김장순 시인의 시적 상상력에 있어 놀랍게도 의미 처소를 ‘이 지상의 가장 빛나는 이름 어머니의 山房’으로 설정하여 혼돈과 막연함을 털어버리기 위한 감성의 시학은 더없이 뜻깊다. 모처럼 신선한 감동을 회복시켜줄 지극선(至極善)의 기대감은 ‘푸른 생명 기호에 의한 가슴의 눈금 읽기’로 비장감이 묻어있을뿐더러 절제된 언어기표로 자의적 의식을 아득한 정신풍경화로 그려내는 그 자신의 합리적 당위성은 서정성의 미감이 응축되어 못내 이채롭다.
모름지기 시적 행위는 개인적인 창조 활동이지만 ‘특정한 자아가 직면한 현상에 대응하며 어떻게 생존하는가?’의 문제의식은 다각적인 시각의 조응함에 그 명료성이 입증된다. 비록 그 자신을 ‘극소수의 창조자’로 일컫지 않더라도 생존하는 시간대와 처소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지녀야 한다. 일단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구조주의 관점에서 김장순 시인의 시집 『어머니의 山房』에 수록된 시편 중에서 <어머니의 山房>을 포함한 14편을 중점적으로 선별하여 시 의미를 탐색할 것이나 여기서 ‘산방’의 개념은 ‘산중의 거처’가 아닌 관조의 직물 대상임을 전제한다. 비교적 호흡이 짧은 시편 중에서 자연 회귀성의 본원인 ‘적조(寂照)’로 그 틀을 지켜내면서 2연 5행 형식으로 구도 처리된 아득한 산사(山寺)의 정신풍경화에 의한 담백한 시편은 차별화된 시적 의미의 변형·확장으로 지극히 서정적 미감이 ‘풍경, 독경, 목탁의 선율’에 잇닿아 그 수용성은 빛남이다.
풍경소리 들리는 조용한 山房에 홀로/독경하는 어머니/俗家의 인연을 모두 내려놓은 채//
절간 능선 위에 흰 구름/목탁 소리에 멈칫 머무적거리고 있다//
-<어머니의 山房> 전문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어머니(母性)’을 골격으로 ‘풍경소리→산방→독경→흰 구름→목탁’의 배치와 조화는 끝내 ‘조용한→홀로→ 멈칫’의 진행으로 인위적인 제도의 구속과는 상이하게도 선적(禪的)인 느낌과 미감을 켜켜이 지켜내고 있다. 이 같은 양상에서 반복되는 ‘애증과 갈등, 그리고 화해와 맞물린 현상’은 예술적 직관으로 망설임과 고뇌 뒤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이 같은 시편에서 ‘절간 능선 위의 흰 구름’의 의미망(網)은 ‘인류의 정신적 스승’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가 ‘머리 위엔 단지 흰 구름뿐이라도 살아 있음에 기뻐해야 한다.’라는 시적 이끌림은 끝내 ‘살아 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라는 동질성을 지닌다. 비록 그 자신의 육체는 현재 매연과 공해가 심각한 사각의 빌딩 숲인 도시 공간에 거처할지라도 맑은 영혼이 지향하는 꿈의 본향인 ‘山房’의 현주소는 무위자연이다.
또 한편 각별한 연계 층위에서 순수서정성을 매개로 눈부신 생명 기표의 통신은 그 자신에게 있어 불가분 지대한 관심사다. 까닭에 한 사람 비공인의 입법자로서 ‘가을비가 북소리를 적실지라도’ “웅장한 북소리와 작은 피리 소리/음과 양의 울음(북소리)”의 보기에서 화자 자신이 보살로 의식하고 있는 ‘엄마는 “목탁 소리에 금강경을 외는 소리//구름이 높이 걸린 날, 엄마는/풍경소리 들으며 入滅에 들었다(백련)”에서 지극히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색조의 조화로움이랄까? 그 자신의 시적 변별성은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 길이라도 함부로 걷지 말아라. 네가 남긴 발자국은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느니라.’라는 서산대사의 <踏雪>처럼 ‘우주의 신비 캐내기’의 자리매김에 해당한다.
이처럼 ‘시 속에 은유가 춤을 추었음’을 수사적 기교(craft)로 적확하게 풀어내며 “시를 쓰는 일은 울음//맑은 유리알의 언어들이 줄줄이 엮어/책 속에 박아 두었다(시인)”를 통해 나직한 통곡과 고뇌 끝에 푸른 생명의 언어로 이미지를 형사(形似) 시킨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그 존재감은 의미심장하다. 가뜩이나 그 자신의 시편에서 신념과 주의집중은 사물을 새롭게 응시하고 초점을 맞추는 시적 변용의 조응이다.
2. 의미 공간과 혼돈 털어내기
각론하고 고뇌와 갈등, 그리고 견고한 고정체를 언어로 빚어내는 시 쓰기의 작업은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이다. 모처럼 언어공해가 심각한 시간대에서 피폐한 영혼의 정화를 위한 깊은 영혼의 상처 치유를 위해 고뇌의 밤을 지새우는 시인과의 해후(邂逅)는 생명감을 안겨주는 계기다. 까닭에「의미 공간과 혼돈 털어내기」는 누구보다 백석(白石)이 사랑한 튀르키예의 혁명시인 나짐 히크메트 란(Nâzım Hikmet Ran)의 시편 <진정한 여행>에서 “가장 우수한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은 노래...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다.”라는 동일화에 의한 투명한 의식의 발상이다.
하얀 춤사위/봄 햇살 위로/날아올랐다//
-<목련>에서
맵찬 겨울을 건너온/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설중매>에서
인용한 시편 일련의 시편을 통해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수행자’로 여성상징인 ‘꽃(나무)’을 통해 지극히 자연의 삶을 즐기는 화자가 ‘참선하는 마음과 그 청정함’으로 군자(君子)의 상징인 백련은 ‘선비의 기상을 뜻’하며 세태의 가치에 눈을 돌리지 않고 눈 속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설중매의 격조야말로 ‘꽃나무와 사유’를 미래가 불투명한 현상에서 일상의 평정심을 회복시켜주는 매개물의 생명감은 눈부심이다.
모처럼 신선한 시적 분위기나 또 하나의 질서와 조화의 변주(變奏)는 설령 아니더라도 가끔 ‘혹한의 겨울밤 따뜻한 포장마차’를 연상하면서 “나도 그녀의 노래에 취해/막걸리 한잔하며//바람을 보내고 있다(어느 포장마차)”에서 그 감회(感懷)를 무수히 부서지는 밤별이나 바람결처럼 일상의 직물 대상을 보편적 정서로 형상화한 담백함은 그 자신의 시적 매혹(魅惑)이다. 따라서 삶의 덧없음을 논의치 않더라도 그 자신이 때로는 과거에 집착하여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정신세계를 존재와 빛나는 감성의 융합으로 펼쳐내려는 바람결의 고뇌는 짐짓 상이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어스름이 묻어나는 적막한 시간에 타자의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돌아서는 미끄러짐의 일상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랄까? 마침내 그 자신이 슬라브족의 민담에서 전해지는 ‘불새(Firebird)’를 시적 질료로 선택하여 그 이미지를 형상화한 “스러지는 여운/불새는 바닷속에 깊이 빠져 버렸다(불새가)”에서 확증되는 동기부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발현에서 비롯된 또 하나 놀라운 충동이다.
일반적으로 현대문학 이론의 혁명적 선언을 주도한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가『비평의 해부』에서 문학 장르를 사계(四季)로 구별 지어 ‘봄(희극), 여름(로망스), 가을(비극), 겨울(아이러니·풍자)’로 도식화하였듯, 그 자신의 시편에서 특이한 상관물로 다루어진 “치매 걸린 아버지/요양병원 보내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함께 있고 싶다 고집을 부리시던 어머니(틀니)”의 일면에 있어, 인생의 황혼 녘에 치매 걸린 부친을 보살피는 모친의 지극정성은 운명적인 삶이지만 눈물겨운 정신풍경화다.
얼고 말려 하나도 버릴 것 없이/추운 겨울 따뜻한 저녁밥 상에//
-<북어>에서
꽃 속의 젊은 여인의 모습 바라보고/해맑게 웃던 그 날을 생각하며/시를 읽는다//
-<추억 다방>에서
위에서 인용한 시편 <북어>나 <추억 다방>을 통한 동일화의 충격은 ‘저녁 밥상’이나 또는 ‘창밖에 봄비가 내리는 시간대’에 타자의 응시로 공감의 영역을 확장 시키는 시적 가능성이 유추될 일이기에 서정의 양면성은 확증된다. 이처럼 카페 아닌 다방 또한 ‘김춘수 시인의 꽃’에 관한 해묵은 낭만에 만감이 주어지는 시적 담론이다.
어디까지나 객관화된 고정체를 소통의 도구인 기능주의의 매체로 자유롭게 교신하는 시적 형상화는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다. 또 한편 21세기의 화두인 ‘공동체 인식(inter-being)’에서 지극히 건강한 생명 외경심에 인식의 전환이 새삼 요청되기에 ‘존재의 정체성과 서정시학의 특이성’에 관한 논의는 최소한 생명 기표인 언어에 응당 분별력이 요청된다. 까닭에 그 자신의 시편에서 총체적으로 일관성을 지켜내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귀향자로서 불안한 삶에 충격을 안겨주는 시적 행위’는 가장 행복한 심성의 황홀함을 눈부신 언어로 표출한 실제적 양상이다.
3. 합일의 공간과 눈부신 단독자의 길
각론하고 ‘표면장력의 강한 이미지는 풍부한 서정성과 시적 인식의 치밀한 탐색으로 외부세계를 응시하는 시선이 따뜻한 감성과 지극선에 의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따뜻한 감성이 “자유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는 햇살//지나온 길은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길을 찾아)”에서 확증되는 일상의 감동은 황홀한 전율을 충격적으로 안겨주는 것이리라. 까닭에 한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심을 안겨주고 심적 현상을 지탱시켜주는 역동성은 낮은 산자락이 영혼의 표징인 흰 눈에 의한 적조(寂照)를 응축시켜줄 일이기에 느꺼운 시적 분위기는 행복한 시 읽기의 모티프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에밀 슈타이거(E.Steiger)가 서정의 본질을 회감으로 정의하며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제시하였듯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절박감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에 의한 욕망의 결과이다.’ 그 같은 점에서 융프라우(Jungfrau)는 스위스 베른 알프스의 주요 고봉으로 해발 4,158m 높이의 봉우리임에 비춰 그 자신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종교성의 단계를 뛰어넘는 감동의 느낌표(!)는 ‘산정에 깃발을 꽂는’ 충격적인 황홀감이다.
만년설 덮인 융프라우//
10년 암 투병/아직 내 안에 숨은 휴화산//
4000미터 웅장한 융푸라우에 작은/푸른 점 하나, 나는 눈을 밟으며 소리쳤다(하나
님 감사합니다)//
융프라우의 산정에 나의 깃발을 꽂고//
-<융프라우에 올라> 전문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새삼 확증되는 시적 분위기는 ‘10년 암 투병’의 그 긴 병상의 암울한 현상도 그렇거니와 ‘하나님 감사합니다’와 같이 창조주께 드려지는 감사와 영광의 찬양인 기탄잘리(Gitanjali)는 이채롭게도 ‘융프라우의 산정에 나의 깃발을 꽂고’라는 행위와 불가분의 연계성은 맞물려 있다. 이처럼 그의 시편에서 ‘서술 시점의 주관성과 관찰 대상의 객관성을 함께 유지하는 종합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시적 행위는 감응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 지극히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대에서 ‘지금 내 시선의 끝은 하나의 소실점을 찍는’ 시 심리의 양상은 “아침은 오후에 자리를 비워주고//내 삶은 구름 따라가고 있는(당신은 어떤가요)” 물음 앞에서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끄집어내어 창조적 언어로 변형시킨 시작 행위는 “꽃은 작고, 들여다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라는 ‘꽃과 사막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역설처럼 삶에서도 ‘잠시 멈춰 섬이 지극히 좋은 일임’을 자각한 행위는 뚜렷한 시의 틀을 확장한다. 따라서 그 자신의 시적 발상은 생명의 엄숙성을 자각한 일상의 감동으로 방황을 끝내려는 역주(力走) 뒤의 평온함이기에 그 존재감은 한층 역동적이다. 차제에 엘리엇의 ‘신비스러운 동반자’로서의 시 쓰기는 동시대의 그 어느 시인보다 각별한 고뇌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현란하게 조성하는 언희(言戱)도 거부한 ‘자기만의 육성, 느낌’은 절감되는 느꺼움에 가슴 저밀 일이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의 시편에서 시어의 상징성은 존재의 처소로 제기되어 그 정체성을 확장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 외경심과 감사에서 생성된 감성의 시학은 김장순 시인의 시적 양상에서 그 삶의 차별성은 빛난다. 까닭에 일관되게 타자 간의 인간소외를 경계하여 모든 인위적 제도마저 순수한 서정성으로 변형시키는 자기성찰은 더없이 이채롭다. 모쪼록 시적 상상력의 자리매김에 있어 푸른 생명의 언어를 연금술사처럼 능란하게 다루는 엄격한 시대적 소임의 역할을 못내 기대할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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