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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조 단수 편 (3)
석야 신웅순
만추의 볕은 짧다. 우리에게는 행복한 시간들이 무한정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지명이다. 그가 남긴 묘비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강의가 있을 때는 그래도 필자에게 부쳐온 시집, 잡지들을 뒤적거렸는데 퇴임하고 부터는 이상하게도 시를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졸글을 쓰는 덕분에 좋은 시조를 읽는 호강을 누리게 되니 그래도 필자는 행복한 편이다.
시는 사람들이 읽어주지만 시조는 시조 시인 외에는 별로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시조시인 자기들끼리들만의 잔치가 되고 있다. 이는 지나친 말일까. 좋은 시조가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조의 외연을 넓힐 수는 없을까. 필자는 오래 전부터 서예인들에게 우리 시인 현대 시조를 소개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예인들은 정작 좋은 시나 시조를 붓글씨로 쓰려면 달리 쓸 거리가 마땅치 않아 망설이기가 일쑤다. 이를 우리의 한글 궁체나 한글 현대체로 격조 있는 현대 시조를 빚어 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것이 필자가 필을 드는 이유이다.
일에 각박해서는 안되겠지만 시를 읽는데는 각박해야한다.
이레를
울고 말걸
더 푸르게
울어야지
작은
그 몸매야
울음 소리에
닳겠구나
한더위
능선을 가르는
눈부신
저 소나기
- 박옥위
이 시를 혼자 읽을 수는 없다. 운치 있는 사람과 함께 해야할까. 고상한 사람과 함께 읽어야할까.
이레를 울고 말 것을 더 푸르게 울어야지 매미야, 이보다 더 정겨운 말은 없으리라. 시조가 아니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울음 소리에 그 작은 몸매가 닳겠구나. 이보다 더 이상 푸르게 울 수는 없으리라.
“한더위 능선을 가르는 눈부신 저 소나기”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시구이다. 이 대구 때문에 이 시는 최고의 명품이 되었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에 다름 아니다. 절구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시조의 진수란 바로 이런 것이다.
1983년『시조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조집 『그리운 우물』외 10여권이 있다. 김상옥 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울지 않아도 젖어있는 낙타의 눈썹
온 몸이 타들어가도 눈빛만은 젖어있는
묵묵히
그대를 향해
사막 속을 걷고 있다
- 이철우의 「사모」
시는 모든 사물을 짧게 만들기도 하고 길게 만들기도 한다. 우주를 만들기도 하지만 일속같은 점을 찍기도 한다.
운다고 해서 눈썹이 젖는 것도 아니요, 울지 않는다고 해서 눈썹이 젖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온 몸이 타들어간다고 해서 눈빛이 타는 것도 아니요, 온 몸이 타지 않는다고 해서 눈빛이 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모는 묵묵히 그대를 향해 사막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애초부터 정처할 곳이 없다. 사막처럼 쉴 곳도 머물 곳도 없다. 묵묵히 님을 향해 그저 사막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애초부터 님이란 타들어 가는 사막 속인지도 모르겠다. 젖은 눈썹, 젖은 눈빛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쯤에 이르면 가슴이 짠해진다. 시는 이렇게 사람의 착한 본성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시인은 2006년 『나래시조』로 등단했다.
그대에
이르는 길 어제인 듯 아득한데
한 가닥 외길이라 뒤돌아 갈 수 없는
노을진
마음 하나가
뒤안길을 서성인다
-정연복의 「인연」
인연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좋은 인연 호연, 보통 인연 범연, 나쁜 인연 악연이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대에 이르는 길이 어제인 듯 아득하다면 호연이건 악연이건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외길 밖에 달리 없어 뒤돌아 갈 수는 없다. 미련을 두지 말면 될 일이지 노을진 마음 하나가 미련으로 남아 왜 뒤안길을 서성거리는가. 노을진 마음인데도 외로움은 갈수록 더하는가 보다.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뒷산도 인연이 아니면 갈 수가 없고 이웃집도 인연이 아니면 갈 수 없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해도 가 볼 여유가 없다. 어찌 보면 인연도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오롯이 시인의 인생이 단수 속에 통째 들어가 있다. 시조 한 수에 천·지·인이 다 들어가 있고 계절이, 일년 12달이 다 들어가 있다하지 않던가.
시인은 2000년 창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해가 뜬 시간은 다섯 시 십일 분
해가 진 시간은 일곱 시 오십육 분
오늘은 더 오래 동안 당신을 생각했다
- 홍사성의「하지편지」
쉽게 읽혀지되 천천히 다가와 오래오래 머무는 시가 있다. 이것이 그런 시 같다. 하지는 일년 중 낮이 제일 긴, 할 일 없는 사람에게 하지는 그야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여기에 산 너머 뻐꾹새까지 길게 울어보라. 시인은 이 긴 지루한 시간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이 시간을 누군가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큼 따뜻한 시간은 없다. 일년 중 제일 긴 하루, 하지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고치고 고치며 긴긴 편지를 썼으리라. 편지는 낮에 쓰는 것보다는 밤에 쓰는 것이 더 좋다. 주위가 조용해서 그 사람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긴긴 낮시간에 썼다. 왜 그런 편지를 썼을까. 지루한 긴 시간을 편지를 쓰면서 행복한 시간으로 만들었다. 행복하면 시간이 짧아지게 마련이다. 물리적인 시간을 심리적인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간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닌가.
홍사성은 2007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내년에 사는 법』이 있다.
봄은 어디 있당
또 다시 찾아오는지
봉오리 몽실몽실
젖내 나는 목련 좀 봐
젖내음 풀풀 풍기는
선잠 깬 애기처럼
- 강애심의 「목련」
뭐니뭐니해도 목련이 찾아와야 봄이다. 봄은 어디 있어 또 다시 찾아오는가. 몽실몽실 젖내 나는 봉오리 좀 보아. 젖내음 풀풀 풍기는 선잠 깬 애기 같은 목련 좀 보아. 은유나 상징이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막막하고 건조했을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은유란 통사 규칙에서 어긋나도 한참이나 어긋나 있다. 목련이 어떻게 젖내나는 애기란 말인가. 거짓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들을 감쪽 같이 눈물날 정도로 속여야 시라는 진실에 이를 수 있다. 고등 사기, 이것이 시이다.
세상엔 날줄과 씨줄이 있다. 날줄이 시간이고 씨줄이 공간이라면 우리들의 삶이란 씨줄과 날줄로 짜낸 한 필의 아름다운 필륙이 아닌가. 삶 같지 않은 진짜 같은 삶, 시란 이런 시간화 공간화된 입체적인 사물, 바로 은유의 세계이다. 어쩌면 은유는 언어의 최대공약수인지 모르겠다. 은유가 있었기에 독자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고 어루만져 치료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04년 『시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다시 뜨는 수평선』이 있다.
컵 라면 한 개를
먹는 데 걸리는 시간
그 몇 분이 모자라서
배곯고 떠난 젊음
어떻게
그 스크린도어에
시를 새길 것인가!
- 박시교의 「우리 모두 죄인이다」
2016년 5월 28일 19세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모군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다 전동차에 부딪혀 사망했다. 그의 공구가방에는 시간에 쫓겨 먹지 못한 컵라면 한 개와 스테인리스 수저가 들어있었다. 이 컵라면과 스테인리스 수저 하나가 우리 나라 전체를 슬프게 만들었다.
컵 라면 한 개를 먹는데 걸리는 시간, 그 몇 분이 모자라서 배곯고 떠난 젊음이라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 스크린 도어에 이를 시로 새길 것인가. 스크린 도어에 새길 수도 없다. 새겨서 어쩌자는 것이냐.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는 나다.’ 여기에 시인은 하나 더 덧붙였다. ‘우리 모두 죄인’이다. 이러니 시인은 더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흰 것은 검은 것을 이길 수 없고 향기는 냄새를 이길 수 없다. 대인은 소인을 이길 수 없고 양화는 악화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시인은 1970년「온돌방」으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아나키스트에게』등이 있다.
실크로드 박물관에 강보에 쌓인 아기 미라
유리관에 누운 모습 요람인 듯 평온하다
엄마는 비단길 가셨나 혼자서 잠들었네
- 김영재의 「아기미라」
죽은 아기를 산 아기로 둔갑시켰다. 시야 죽은 사람도 살려내고 산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유리관에 요람인 듯 평온하게 누워있는 아기 미라. 물론 엄마는 비단길 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엄마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영원히 잠들었으리라.
학은 사람을 해맑게 하고 난은 사람을 그윽하게 한다. 시인은 그런 해맑고 그윽한 사람 같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얼마나 평화로운가. 이보다 평화로운 것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시인의 마음은 더디 뜨는 달처럼 이렇게 안쓰러운 것이다.
시인은 1974년『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히말리아 짐꾼』등이 있으며 중앙시조대상 등을 수상했다.
어제도 눈이 내리더니 오늘도 눈이 내린다. 첫눈이다. 춥고 더운 것은 언제나 세월을 앞질러 온다. 눈길을 걸어본 적이 언제였나. 이제는 내리는 눈을 멀리서 보는 것이 아련해서 더 좋다. 멀리서 보아야 하얀 산도 볼 수 있고 하얀 들도 볼 수 있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골고루 산천을 둘러 볼 수는 있지 않은가.
창가에 난분하나 머리맡에 옮겨놓아야겠다. 난인들 눈 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
서예문인화, 2017, 12월호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