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밭 주인이 약속한 정당한 삯
포보밭 주인은 새벽 6시에 불린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에 고용된 일꾼들에게는 그저 ‘정당한 삯’을 주겠다고만 했습니다. ‘정당한 삯’은 그리스어로 ‘의로운 것(디카이오스)’입니다. 그러니 오전 9시 이후에 고용된 일꾼들은 자기들이 일한 시간만큼만 돈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다시 오후 5시에 장터로 나갔습니다. 이 시간은 한 시간 정도만 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늦게까지 장터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장터에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빈손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없어 한 시간이라도 일해 단 몇 푼이라도 벌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은 모두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오후 5시가 되기까지 일자리를 못 얻었다는 것은 아마도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약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0,7)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이 그들의 처지를 좀 더 헤아릴 수 있도록, 포도밭 주인의 입을 통해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20,6)
포도밭 주인은 다른 일꾼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노동을 할 수 없어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들의 참담한 처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부른 이들에게는 얼마를 주겠다는 말은 없이 그냥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만 합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공쳤다’고 생각하던 그들은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라는 말에 몇 푼이라도 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마음을 놓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루 일이 끝나자 주인은 관리인을 불러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게 합니다. 이때 포도밭 주인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뀝니다. 그전까지는 한 집안의 가장을 가리키는 ‘오이코데스포테스’였는데, 8절부터는 ‘퀴리오스’입니다. ‘퀴리오스’는 ‘주인’, 또는 ‘주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이 주님, 하느님이심을 암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일당을 줄 때 가장 먼저 온 일꾼들에게 맨 나중에 온 사람들 순으로 지불을 하겠지만, 이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임금을 줍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열두 시간 노동에서 한 시간만 일했기에 보잘것없는 품삯을 받을 것이라 예측했을 텐데, 놀랍게도 주인은 한 데나리온은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침 6시부터 일을 한 일꾼들은 오후 5시부터 일한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들은 열두 시간 꼬박 일했으니 그보다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부터 일을 한 사람도, 낮 12시부터 일을 한 사람도, 아침 9시부터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온종일 일한 자기들만큼은 다르겠지 하는 기대를 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가 깨지자 그들은 항의하며 불만을 터뜨립니다. 여기서 그리스어 동사 ‘투덜거리다’는 계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반과거 시제로 쓰였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온종일 일한 자기들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은 우리를 저들과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라고 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저들을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같은 말 같아도 곱씹어 보면 뉘앙스는 많이 다릅니다.
힘이 없어서 제 몫을 못하는, 그래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저들’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일을 잘해 아침 일찍부터 선택되어 열두 시간이나 일한 ‘우리’라는 말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는 그들의 불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불만은 한 시간만 일한 이들과 자기들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이라기보다 무능한 이들과 자기들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은 우리를 변변히 못한 저들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땡볕 아래서 하루 종일 일했고, 저들은 서늘한 시간에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이들의 태도는 ‘되찾은 아들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큰아들은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동생이 아버지의 환대를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만일 주인이 가장 먼저 일한 사람들부터 임금을 지불하게 했다면, 이야기는 평범하게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들은 나중에 온 일꾼들도 자기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돌아갔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식으로 비유를 마무리했을까요? 그것은 하루 종일 일한 유능한 사람들이든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무능한 사람들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은총을 베푸시는 아빠 하느님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전 미국 서부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존 웨인은 세 번 결혼했는데, 우연찮게 매번 가톨릭 신앙을 가진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덕분에 일곱 명의 자녀들은 모두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존 웨인 자신은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죽기 꼭 일주일 전 죽음의 침상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심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고, 죽기 이틀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장례는 가톨릭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때 일부 신자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양심 있는 사제라면 어떻게 그런 인간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신자들은 그런 존 웨인을 부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저 카우보이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한평생 자기 좋을 대로 살다가 죽기 48시간 전에 세례를 받다니!”
사실 존 웨인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일꾼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일하고 싶어 했지만, 존 웨인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존 웨인의 마지막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시기심을 느낀 이들은 새벽부터 일한 불만 가득한 일꾼들을 생각하게 합닏. 혹시 누군가 ‘나도 젊은 날에는 내 하고픈 대로 하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로마 6,15)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로마 6,15)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