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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悽然)한 시 의식 뒤 감동의 느낌표(!)
- 『서리꽃』의 환영(幻影)과 그 매혹적 형상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선문학 편집고문)
1. 경건한 창조성과 언희(言戱)의 경계
그 나름으로 ‘우리의 소중한 삶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때로는 운명적임’은 유념할 점이기에, 「선문학 권두칼럼」의 서술에 앞서 흥미로운 사실은 ‘감정의 깊이와 다양성, 명상적인 정감’을 자극하는 ‘피아노의 시인’ 쇼팽(Chopin, Fryderyk Franciszek)의 <빗방울 전주곡(prelude in Dflat Major)>의 선율에도 까닭 모를 한순간의 격정을 삼켰다. 까닭에 튀르키예의 혁명 시인 나짐 히크메트 란(Nâzım Hikmet Ran)이 <신과의 인터뷰>에서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에 관한 일깨움에 열중하고 ‘주어진 오늘이 내 인생의 최초의 날이고 최후의 날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갈 일이기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삶을 누리는 식별력은 거듭 요청된다.
특히 생명의 봄이 오는 계절의 여울목에서 부푼 설렘과 기대감으로 전북 군산태생으로『현대시선』지를 통해 등단한 최정민 시인의 그 삶의 여정은 감당키 힘겨운 가족사와 맞물린 아픔과 절박감으로 깊은 회감(懷感)의 시간대였다. 모처럼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120여 편의 시편을 묶어 간행한 시집『서리꽃』(2024)의 편집 구도는 화자(話者)가 살아온 삶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한 결(結) 고운 모직물의 직조로 치밀한 면면을 갖춘 결과물이다. 따라서 삶의 현상에서도 뼈아픈 자기성찰과 매사에 적극적이되 또렷한 기억의 잔상은 새로운 호명(呼名)일 따름이다.
차제에 일상화의 차별성에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시 쓰기의 몰입은 ‘환상의 변주곡’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이같이 현대예술 장르에서 죽음의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한 비센떼 우이도부로(Vicnete Huidobro)가 시학의 근본원리를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관심사이고 미학이며 예술이다.”라는 지적은 가늠할 바다. 까닭에 ‘인연의 매듭과 순결한 영혼’에 잇닿은 최정민 시인의 담백한 격조는 표제 시편으로 시상이 단조로운 <어머니>의 ‘못다 부른 엇노리(思母曲)’에 정한이 서려 있다. 일단 서리꽃의 형태소는 ‘서리+꽃’으로 ‘유리창 따위에 서린 수증기가 얼어서 꽃처럼 엉긴 무늬’로 그 시적 정감은 명상호흡으로 관조할 바다.
그렇다. 인간의 삶은 거친 항해를 거쳐 본향으로 귀항을 서두르는 여정이기에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 길이라도 함부로 걷지 말라. 네가 남긴 발자국은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느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踏雪)>처럼 그 자신의 시편 <어머니>에서 모든 강물이 합수하여 ‘생명의 본원(本源)’인 바다(海)에 이르러 대상 일체를 끌어안고 포용하는 수성(水性)으로 빚어진 몸의 시학이며 타오르며 작열하는 존재의 꽃이다. 비록「동종선근설(同種善根說)」을 거론치 않더라도 ‘당신과 나 그 인연은 너무 깊어’를 끊임없이 갈망하며 “삼백예순날/내 마음 그댈 비운 날 없어//오늘 하루라도 온종일/당신과 나 눈 맞추고//그저, 그만큼만/간절히 꿈꾸어 보는(어머니)”에서 따뜻한 감성의 추이(推移)는 다함 없는 감사의 눈물이다.
비교적 그 자신이 지나쳐온 삶의 감회(感懷)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살아 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라는 일깨움으로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별개일 수 없다. 따라서 ‘섬 사이 갈매기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섬이 있는’ 현실적 정신지리에서 여백의 틈새 좁히기에 익숙한 그 자신의 시적 형사(形似)는 이처럼 인위적인 꾸밈없이도 “절반은 습하고 절반은 건조한 부력 없이 떠 있는/무량하고도 고요한 네 깊이의 질긴 숨은 늘 깊다(닿을 수 없는 섬)”라는 예시에서 개아의 동질성에서 기인(起因)한 삶의 무게와 그 낌새는 놀랍게도 확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라는 그 존재감을 ‘소리 없는 밤비로 내려와 붉은 심장에 외로움 출렁이게 하는 파도’에 견줌도 그렇거니와 “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바람처럼 잠시 왔다가/빛 속에서 사라진 새벽처럼/넓은 바닷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바다로 갑니다)”에서 아쉬움도 참아내며 ‘노을이 물드는 바다로 가는’ 일상의 삶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때문에 ‘천상엔 별, 지상엔 꽃, 그리고 가슴엔 시라’는 관점에서 그 자신이 ‘응어리지다 설어버린 울음이 끝도 없는 물음표(?)를 던지는’ 삶의 현장에서 존재감으로 버텨내는 끈질긴 생명감은 “단단한 저 결속의 표면에/깊숙이/질긴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냉이꽃)”라는 일면에서 ‘감동의 느낌표(!)’로 고정된다.
2. 목마름의 변주(變奏)와 열린 시 의식
어디까지나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유형적 인상과 시학의 합리성을「목마름의 변주와 열린 시 의식」의 형상화에 관한 시적 행위의 극대화로 모든 감각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교란하며 그 자신의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한 ‘깨어 있는 시 의식과 상생의 비법’에 관심을 지닌 주의집중은 유의미하다. 이 같은 양상은 신비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언어를 살려놓는 수단은 시인의 심성과 그의 입술과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 존재한다...생략...그가 죽으면 언어는 뒤에 남아 그의 무덤 위에 몸을 던지고는 다른 어떤 시인이 와서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슬피 흐느껴 운다.”라는 지적과도 동일성을 지닌다.
이처럼 삶의 중량감을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며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그 자신의 충직한 시적 보행은 감동의 회복과 맞물려 소홀하게 지나칠 수 없다. “꽃잎 하나가/무채색으로 버석대며/서러운 침묵으로 고요하다/인사도 없이/훌쩍 떠나버린 님(시간의 무게)”의 보기처럼 조락(凋落)의 계절에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 허망함 뒤 그 쓸쓸함마저 ‘언어의 연금술사’인 R. M 릴케(R. M. Rilke)의 “꿈을 지니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라는 지적은 정신적인 창조가 생명력임을 일깨워준 일례다.
모름지기 그 자신의 ‘한세상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살아가네’라는 집념만큼 “내 마음 저편, 당신을 세워 두고/나의 적막을 보내/선연히 찍힌 문패 자국만 남겨두고/말없이 뒤돌아 가네(지문)”에서 존재감은 경이롭다. 따라서 그 자신이 따뜻한 감성도 천상의 층계 오르는 영성(靈性)으로 이행시켜 ‘신의 작은 대행자로서의 소임’을 충직하게 수행하는 적극적인 시적 행위야말로 이 땅의 독자를 아름다운 시 세계로 초대하는 진정한 자존감의 모형이다. 짐짓 ‘이 길 위에 위태롭게 걷는 그 누구 있어’라는 의문이 주어져도 “깃털 하나/한 세상 가슴 저미며 지우며/수억만 리 내가 걸어가네(신평에서 나운동까지)”라는 그 절박한 삶의 무게야말로 여백의 틈새를 좁힌 고뇌 뒤에 이채로운 시관의 수용 또한 ‘자연과 시인, 독자’라는 삼각대위(三角代位)가 시의 향연을 서정성 짙은 개아의 행위로 빚어낸 감정의 절제임은 분별할 바다.
또 한편 견고한 고정체도 언어로 빚어내는 시 쓰기의 작업은 행복한 집짓기에 비견되기에, ‘창조와 모방’은 상오연계성을 지닌다. 바로 그 점에 비춰 인간의 내면 심리는 자연을 거부하거나 자연과 대립하는 창조의 정신과 동시에 자연을 모방하고 순응하는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대립 구도는 합리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공존의 양상이기에 삶의 일상에서 명상호흡을 하여 한순간 ‘해묵은 마른 들깻단에 불을 지피다 문득 내 품속에 남겨진 엄니 향기 같아서 그만 눈물입니다’라는 그 자신의 한결같은 시적 변명처럼 아득한 정신풍경화의 화폭은 온통 ‘엄니 향기’로 채색되고 차올라 눈시울 붉히는 헤어짐 뒤의 안부는 못내 눈물겹다.
까닭에 심리학에서 ‘빈둥지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은 비교적 대다수 중년 여성이 ‘슬픔과 상실감, 외로움과 고립, 정체성의 위기와 목적의 상실, 불안과 걱정, 관계 변화’를 겪으며 비교적 체득하는 증상으로 그 자신의 가족사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기에, 온전한 용서의 믿음으로 ‘격정이나 증오심’을 삼켜내며 칙칙한 어둠과 절망감의 그늘을 깔끔하게 걷어내는 시적 작위(作爲)는 경건하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짙은 먹구름만 한가득/그 사람 그리다 눈시울 뜨거워지는 이야기가 그립습니다(빈둥지증후군)”라는 그 양상에서 못내 목표설정에 다가서서 주의 집중하는 그 자신의 시적 행위는 지극선(至極善)에 의한 화해의 서정성은 못내 감동이다.
무엇보다 리듬과 형태를 갖추어 피아노의 건반을 튕겨 오르며 지상에 갈 앉는 환상의 변주곡을 통해 영혼의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소외된 자를 시와 음악으로 치유하는 끈질긴 그 자신의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은 견고한 고독 앞에서 ‘기쁨과 괴로움이 번민으로 찾아올 때면 건반을 어루만졌고’라는 합리적 해법으로 “피아노의 발자국/아, 지금/네 소리와 나는 오늘 비밀 같은 울림의 역사를 걷고 있다(곡선의 여백)”에서 ‘질량이 다른 절망’을 통한 삶의 역경이 ‘슬픔 그 너머’로 이행되기에 온몸으로 부딪치며 병상에서 삼켜온 인고의 그 날은 더없이 다감하다.
특히 시의 골격과 맞물린 그 자신의 시편은 온전한 집념을 지니고 확신을 자처한 결과로 ‘찰랑대는 햇살이 그림 같다’라는 개아적 동질감에 “물 위 네가 되고 싶은 나/계절의 시간을 밀고 조용히 붉게 허물 벗는/푸른 당신의 섬(장자도)”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이처럼 고통과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의 체득에서 비롯된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그 자체가 발상의 동기부여다. 차제에 현실적으로 창조주가 이 땅에 빚어놓은 가장 소중한 생명체는 바로 ‘서로에게 빛을 나눠주어야 하는 인간’이기에 꿈을 상실한 소외된 타자 간에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시상을 응축시켜 놓은 그 존재감은 깊은 절망의 투병에서도 시련을 극복하는 절박한 소망의 빛남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한때 한 지붕 아래 목련꽃이 환했던 시절 살붙이들 속에 우리는 세상에 길들고 한 날씩 산 그림자처럼 어느 계절로 가고 있는’ 정황에서 “죄 하나 없이 살다/초승달 부풀기 전에 청솔 되어 떠났다(한랭전선)”의 보기처럼 ‘한랭 기단이 온난한 기단을 밀어 올리면서 이동할 때 생기는 전선 확증인 한랭전선’ 또한 소외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깨움이다. 까닭에 비정한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현상에서 ‘길 잃은 울음 하나 별빛이 떠내려가다가 서럽게 울지라도’ 시적 형상화는 “슬픔과 그리움을/하얀 물거품 속에 비벼봐도/흐느끼는 바람 소리뿐이다(슬픔이 그리움 될 때 그곳 바다로 간다)”에서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에 맞물려있기에, 흐느끼는 바람 소리뿐이어도 그 자신의 슬픔이 그리움으로 이행될 될 때 바다로 지향하는 것은 운명의 편린(片鱗)이다.
3. 삶의 잠언과 그 인연(因緣)의 그물망
일단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도 오랜 투병 생활로 진통을 겪는 모친에 대한 지극함을 푸른 식물성 언어로 생명의 충만감에 견주어 그 자신에게 미와 선의 추구를 위해 허비한 그 시간의 실상은 아름다움과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확장하기 위한 투자의 시간대다. 또 한편 행복한 꽃나무 가꾸기와 영혼의 잠식으로 해명되는 그 자신의 격조 높은 정신은, 푸른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며, 동시에 신선한 충동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실체는 생명에의 변주라는 틀 위에서 새로운 공간 만들기를 통한 내적 충만에서 비롯된 모성의 평온함과 미감은 끝내 풀꽃 향에 견주어지고 우울한 대상도 맑게 정화 시키는 생명력을 지녔음은 유념할 바다.
이 같은 일면에서 ‘지상의 꽃은 울음을 동반하고 승화하여 천상의 별이 됨’도 그렇지만 다양한 시적 형식을 걸쳐 자연 친화적인 바탕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은 노래라.’라는 기대감에 혼돈의 세월을 ‘제 가슴 끓어오르는 열정, 감내하는 그 꼭짓점에’ 매달려 목숨을 걸었지만, 가혹하게도 운명의 신은 “초점 잃은 피아노 소리가/블랙홀 속으로 사라진다/흰 선율의 고뇌(때론 아픔도 악보가 되는 것)”라는 시적 발상으로 그 존재감은 황홀경이다.
그렇다. ‘아 노을마저 서럽게 풀어지는 무녀, 무녀도여’라는 끝내 피를 토하는 격한 감정을 수사적 기법(craft)으로 처리하며 “이따금/칭얼대는 파도가 아픔을 참는 듯/저 혼자/속살이 푹 젖는다(무녀도)”로 확증한 그 일면은 ‘바람의 초상(肖像)이랄까?’ 푸념의 한 자락을 통해 유추되듯이,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평생을 남편을 위한 지극정성과 자녀를 향한 모친의 헌신적 보살핌에도 그 자신이 작은 보은(報恩)도 표하지 못한 죄책감은 울컥 억장이 내려앉는 한 맺힌 느꺼움이다.
모처럼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로 오랜 세월에서도 지극히 자애로운 모친의 품성을 줄곧 헤아리며, 젊은 날 부친과의 사별로 깊은 밤 홀로 지새우며 눈물겹게 살아온 모친의 처연한 삶을 지켜보면서도 그 자신의 시편 중 백미(白眉)인 <서리꽃>에서 다시금 확증되듯 천륜을 지나치고 저버린 그 죄책감에 ‘한 맺힌 인생 홀로 떠날 때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처절한 그 흐느낌은 눈물겹다. 따라서 “제 몸 종잇장처럼 꾸겨져도/부모 형제를 위해 한목숨 다 받치다/끝내, 쓰러지고 말았네(서리꽃)”라며 ‘차디찬 내 어머니 붙들고 통곡했네’라는 시적 행위는 처연(悽然)함이다.
결론적으로 최정민 시인이 ‘밤하늘의 별, 그 모성에 관한 회한은 맑은 영성의 확장이기’에 서리꽃을 화폭에 수(繡)놓는 치밀한 구속의 행위야말로 ‘작은 신의 대행자’로서 파격적이고 경건한 생명의 외경심이다. 마치 빈자의 성녀 테레사(Mother Teresa of Calcutta)처럼 소외된 이웃 섬기며 오랜 병상에서도 일절 신음을 내뱉지 않고 미소로 일관한 뒤 천상에 오른 모친께 드리는 용서와 화평을 간구하며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혼으로 드려지는 ‘사모곡’은 지극히 인간적인 뉘우침의 자괴감에 억장이 내려앉는 나직한 통곡(痛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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