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줍는 시간 / 박용수
“투툭 툭!”
고요한 산속에 죽비소리 같은 청량한 소리, 졸고 있는 산들을 깨우는 밤 떨어지는 소리다. 밤나무 해산(解産)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으면 내 주린 배낭은 나를 뒷산으로 떠민다.
산에 도착하니 나무 주변에 있는 커다란 배낭마다 밤들이 가득하다. 촌로의 바구니는 크지도 않으려니와 가득 채우는 법도 없다. 무리를 지은 것이 초행은 아닐 성 싶다. 인근 도회지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간식거리와 물병이 그들의 작심(作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느긋한 사람도 밤나무 아래 오면 급해지기 마련이고, 제아무리 목 뻣뻣한 사람도 여기서는 절로 숙일 수밖에 없다.
“토독 톡!”
밤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낮춘다. 풀숲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한 내 눈 속의 총구는 혹여 공비(共匪)라도 나타나면 즉각 사살이라도 할 기세이다. 내 눈은 밤톨 떨어진 곳으로 박히고, 밤톨들은 재빠른 공비처럼 몸을 숨겼는지 흔적도 없다. 녀석은 우거진 풀 속이나 돌 틈에 몸을 숨기거나 가시나무 속에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딴청을 부리고 있을 게다.
산을 한 자락 돌고났는데도 내 가방은 여전히 텅 비었다. 보물찾기에서 매번 공탕을 쳤던 내 탐색은 오늘도 헛수고다. 이쯤 되면 맞춤한 나무 하나를 택해 그늘을 찾는다. 그리고 빈 가방을 벗 삼아 군밤장수의 군밤타령을 흥얼거리며 땀을 식힌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평 바다에 어허어 얼싸 돈바람 분다. 얼싸 좋네. 아 좋네. 군밤이요……”
솔바람에 마음을 식히고, 멋진 원경으로부터 시선을 지척으로 되돌리니, 밤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황금을 줍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에게 등 너머 멋들어진 소나무가 밤 한 톨보다 소중할 리 만무하고, 한 폭 그림 같은 비단구름인들 어찌 포만보다 긴요하겠는가. 군밤타령 가사처럼 밤이 곧 돈이라고 인식한 바로 직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낯이 절로 붉어진다. 아마 지금 가시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처럼 밤나무들도 밤 가시를 치세우고 나를 주시했을 것이다.
사실 밤을 주워본 사람은 안다. 커다란 밤알을 줍는 흥분 말이다. 구릿빛 토실한 진주가 풀 섶에서 수줍게 숨어 있는 모습은 앞섶을 가리고 앙탈을 부리는 여인네 같아 가슴이 찌릿찌릿해진다. 그 기쁨 또한 값비싼 보석이 부럽지 않다.
알밤뿐이랴. 그들이 밟고 지나간 작은 쥐밤이나 오송송 털이 붙은 밤도 맛에서는 알밤에 뒤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 크기나 모양이 다르지만 특유의 맛을 가진 밤처럼 실상 우리의 삶 또한 귀천이나 빈부가 차이가 날지언정 제 각기 오묘한 맛이 있을 것이다. 다만 커다란 알밤에만 집착한 너머지 다른 밤이 갖는 각자 고유한 향기와 재미를 밟고 지나치는 지도 모른다.
밤은 삶거나 구워먹어야 제 맛이 나는 독특한 열매이면서 천상의 새들이게 허용되지 않는 금단의 과일이다. 또한 밤은 산짐승들에게 건빵처럼 비축할 수 있는 겨울 대비용 특별 비상식량이기도 하다. 밤은 날카로운 가시로 외성을 쌓고 단단한 껍질로 내성까지 보호막을 치고 있는데다가 떫은 외피까지 둘러서 지상(地上)의 날것 삶을 사는 생명에게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어쩌면 밤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사는 벌레나 설치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성찬이자 뭍 생명들에게도 지성을 들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제 아무리 지고한 이라도 몸을 낮추지 않으면 밤나무는 밤나무 아래서 한 톨의 밤도 그의 손에 허락하지 않는다. 밤이야말로 겸손한 자에게 주는 밤나무의 선물, 소중한 중량인 것이다.
입추 무렵, 밤나무는 투툭 툭! 땅을 흔든다. 밤이 익었으니 어서 오라는 망자(亡者)의 호명 같다. 밤나무는 거개가 인가 주변의 가족묘나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밤을 줍다보면 그 나무뿌리라 봉분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본다. 밤은 사자(死者)가 분해되면서 이승의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윤회의 정점인 것이다.
이쯤 되면 슬슬 하산준비를 해야 한다. 밤나무가 내 어깨를 향해 커다란 가지를 드리우고 내 엉덩이를 향해 어느새 뿌리를 뻗치고 있다.
“토톡 톡!”
내 등 뒤로 알밤이 떨어진다. 지상에 생명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해탈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입멸(入滅)하는 소리 같다. 일어설까 나무가 될까. 오늘도 내 무생(無生)의 꿈은 밤나무 아래서 길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