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아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18세기 피뢰침을 발명하기 전까지는 교회 첨탑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죄인을 벌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오전 10시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이날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는데, 많은 성당이 무너지면서 7만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요? 하느님께서는 애 미사를 봉헌하던 당신 자녀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이 대지진을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겼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다시 만연하던 종교재판소의 만행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2005년 성탄 무렵, 대형 쓰나미가 남아시아 전역을 덮뎌 순식간에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제대로 축하하지 않아 하느님께서 천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천벌을 언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2010년 프로즈Paul Froese와 베이더Christopher Bader는 가톨릭과 개신교 여러 종파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인들 90퍼센트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느님에 대한 인상을 달랐습니다. 22퍼센트만이 하느님을 사랑의 아빠로 믿고 있고, 나머지 78퍼센트는 권위적이고 율법적인 하느님, 단죄하고 징벌하시는 하느님, 또는 인간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5분의 4가 사랑의 아빠 하느님에 대한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가끔 그런 분들을 만납니다. 이미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는데도 계속해서 같은 죄를 고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에 붙들려 있기에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을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드 멜로Anthony De Mello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전하면서 율법의 굴레러부터 해방을 선포하신 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율법의 종교에 사로잡혀 있다. 죽음을 앞두고 그들이 가장 먼저 하고픈 일은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다. 그들은 화해의 성사를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 그 목적이란 화해의 성사를 통해서 책망 받지 않고 바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보장받으려 하는 것이요, 하느님과 그분의 심판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왜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하는가?
2,000년 교회 역사를 보면,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에 대하 왜곡된 이산을 갖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구약성경의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먼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여기저기에는 하느님께서 불순종하는 인간을 꾸짖고 벌을 내리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불순종하는 인간을 악성 종기와 온갖 피부병에 걸리게 한다거나 미치게 만들고 눈멀게 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게 하고 먼 나라로 유배를 보내겠다는 위협 같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에게서 금지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지은 다윗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건네주었다는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자는 마땅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하고(신명 22,22-24 참조),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자신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민수 35,33 참조) 그렇다면 다윗은 그렇게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화는 격정이지 진노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화는 인간의 화(분노)와는 사뭇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진노와 격정의 차이다. 진노는 자기 통제를 상실하고 폭발하는 감정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격정은 돌봄을 위한 행동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격정은 우리의 선을 위한,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돌봄의 행동입니다. 하느님 격정의 참된 목적은 인간을 심판하고 벌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위협적인 용어들 역시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당장이라도 내려치실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 안에는 이미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만 하면 곧바로 그를 용서하십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 1장에는 무시무시한 하느님의 진노와 협박이 쏟아집니다.
“이제 내가 북쪽 왕국들의 모든 족속을 불러들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와서 저마다 제 왕좌를 예루살렘 성문 입구에 차리고, 그 주변 모든 성벽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맞설 것이다.”(1,15)
이어서 3장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배반자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너에게 성난 얼굴을 보이지 않으리라. 나는 자애로우니 영원히 진노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단지 네 죄를 시인하기만 해 다오. 네가 주 너의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했고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낯선 자들에게 몸을 맡겼으며 내 말을 듣지 않은 죄를. 주님의 말씀이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3,12-14)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얼마나 자주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자비’란 단어는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261번 나오는데, 그중 72퍼센트가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신약성경과 비교하면 대략 3분의 1의 비율입니다. ‘자비’란 말만 놓고 봐도 구약성경의 하느님께서 진노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단어 역시 신구약성경 전체에 322번 나오는데 비율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하느님을 율법의 하느님, 징벌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