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 상향희
내게는 오래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향과 잊혀지지 않는 소리들이 있다. 그것들을 생각하는 날은 작은 미소가 절로 번져나간다.
다테시나(蔘科)산 허리의 오솔길을 트레킹 하던 날 밤이었다. 울창한 나무 그림자가 좀 무시무시한 고원의 밤은 하늘도 달도 청량하기만 했다.
얼 하나 없는 청남색 하늘에 열사흘 달을 덩그렇게 뛰워놓고 정밀이 누리 가득히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曹操)의 “월명성희(月明星稀)에 오작(烏鵲)이 남비(南飛)”란 시구절을 그대로 그린 듯 달이 밝아 별 자리가 빛을 일고 있었다. 누에실보다 극세한 은빛살이 내려앉을 때 마다 은싸라기 부딪는 영롱한 소리를 들었다. 환청이었을까. 달 밝은 밤이면 나는 그 은빛소리를 되새기곤 한다.
그 까맣고 보잘것없는 미물은 가을밤을 온전하게 다스린다. 달 밝은 밤에도 그믐께의 칠칠한 어둠속에서도. 실솔! 나는 귀뚜라미보다 짧아서 이 이름이 좋다.
3센티에도 못 미치는 신장으로 어김없이 가을밤을 소리의 향연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목숨 걸고 그들이 우는 것은 그들의 희열이고 목숨을 이어가는 삶 자체이며 살아가는 최후의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즐겁고 좋아서 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도 시름은 있을 것이기에.
그들이 은방울 흔드는 소리로 밤을 메우면 나의 생각은 승화되어 맑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내가 서 있는 발밑을 살피고 주위를 돌아보고 지난 일을 회한하게 한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성찰한 만큼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어느 해 길을 잘못 들어 고층 아파트에 입성한 녀석들이 있었다. 그 때 고독하게 울어 젖히는 맑은 소리 옆을 시간이 소리 내며 도도하게 흘러갔다.
학교 길은 가창천의 둑이었다. 수없이 쌓인 시간의 흔적으로 남은 강바닥의 돌들은 겨울가뭄에 말라 바람의 목적지가 되었다. 둘 사이로 감질나게 고인 물위에 엷은 얼음이 얼어 있었다. 말갛게, 더러는 무늬 좋은 유리 같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우리들은 유리 깨지 놀이로 등하교길이 즐겁기만 했다.
두 발 모아 한껏 내리디딜 때의 그 파열음의 장쾌함, 신발자국 그 모양 그대로 뚫린 구멍에서 솟구치던 물에 양말을 적시기도 했다. 엷은 얼음일수록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얼음은 박살이 났다. 가루가 되도록 부수고 또 부수었다.
건드리면 소리 내어 찢어질 것 같은 찬 공기 속에서 부서지는 소리도 얼어 버렸다. 부서져 간 수정 조각 사이로 멀어져 가버린 내 꿈의 조각들이 생각났다. 야멸치게 꿈이라도 꾸어 보았는가 싶다.
겨울밤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마르고 세찬 바람은 거칠 것 없이 불어댔다. 그들은 사람 혼도 빼갔었다. 정지용 시인은 밤바람 소리가 말을 달린다 했지만 우리 마을 바람은 훨씬 더 사나웠다. 어떤 때엔 숨비소리 같이, 때로는 무속인이던 같은 반 친구 어머니의 초신(招神)소리처럼 바람소리는 누워 있어도 황량한 들판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좀 가깝스럽지만 외로움 같은 걸 체험했다.
지금 무위, 무기력속의 평화를 누리면서 불현 듯 그 치열하던 바람소리가 그리워진다.
정월 대보름날 강가에서 용왕님에게 소원을 비는 의식을 올렸다. 어머니를 따라서, 나는 샤머니즘의 구습에 빠져 있었다. 절대적인 대 자연에 대한 믿음에서였다. 또한 예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의 흐름을 저버릴 수 없기도 했다.
어두운 새벽 강물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밤새 추위에 못 이겨 결빙하던 강물은 한밤중이나 새벽이 되어서는 쩡쩡 제 몸을 조여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잠결에 듣는 그 소리는 제 몸을 학대하는 얼음의 절규 같아 가슴 한켠이 아렸었다.
여기저기 마을 사람들의 기원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박한 제수를 펴놓고 기원하는 어머니 옆에서 리드미컬한 나울의 반복을 듣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찰싹찰싹” 얼음 밑에서 기슭을 치고 있던 나울소리. 우리가 자고 있어도 자연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우주의 운행이 경외스러웠다.
지금도 어제인 듯 그 나울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깨어 있어라 이르면서.
꽤액! 꽤액! 나무 덩치에다 쇳덩이 부딪는 두 마디 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쇳된 뒷음이 갈라져 쉰 소리가 된 괴성으로 외쳤던 것이다. 장끼소리다. 양재천 경사진 둑. 풀숲 앞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겁도 없이 고개를 갸우뚱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새 손님의 깃 빛이 고와 나는 숨이 멈춰버릴 상 싶었다.
저 기성을 들을 때면 ‘저런 형편없는 소리의 새도 있구나.’ 못내 의아스럽던 그 장끼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일전에 무량사 뒷산의 논 날같이 쏟아지던 꾀꼬리 소리를 듣고서는 장끼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괴성과 극과 극을 이루는 꾀꼬리 소리의 너무나 큰 차이를. 장끼는 저의 둔탁하고 멋없는 소리에 고민을 해봤을까. 하늘은 두 가지 귀물을 한꺼번에 주지 않는다고 했다. 목덜미의 다크 에메랄드가 눈부신 그의 소리는 오월의 아침을 즐겁게 해준다. 사람 왕래 많은 산책로에서 눈치도 없이 소리 지르고 있는 그에게 “너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외친다. 세상 패자의 입장에서.
6층에서도 실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귓속말로 속삭이듯 봄밤을 적셨다. 어느 시인은 상추씨 뿌리듯 온다고 했었다. 소리 죽여 오시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자리의 편안함에 푹 빠진다. 근심걱정 다 가져가고 명주 솜 안락만이 남는다. 그들은 평화의 전령사였다.
그 시골 삭막한 겨울 끝. 삼촌댁 매화 한 그루는 봄을 여는 선구자였다. 청아한 모습으로 매화꽃이 벙글면 먼 땅 끝에서 밀려오는 듯한 땅울림 소리가 났다. 천군만마가 아주 은밀하게 절제된 소리로 다가오는 듯 했다. 많은 세월을 지나 선암사 매원에서 다시 들은 땅울림 소리는 바로 시골집 매화나무의 그 소리였다. 허기진 겨울을 난 벌들의 꿀을 날갯짓 소리였던 것이다. 수만 마리의 날갯짓 소리는 그윽하나 지축을 흔들 것만 같이 저력이 있었다. 그 소리는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는 그 나무, 그 집, 그 거리를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마음 속 깊은 곳 스스로도 모르던 곳에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내 마음의 소리. 많이도 흔들리던 나를 바로잡아 주던 내 마음의 소리 따라 여일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