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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안에 자리한 율법주의적 태도
하느님을 무섭고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율법주의적 태도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실천하려는 좋은 지향에 어느새 세속적 계산이 끼어들면서 우리 공로를 드러내거나 부족함을 탓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으니 하느님께서는 나를 더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으니 하느님께서 나를 벌하실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은 은총으로 주어진 것임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잘못했을 때 벌을 받는 기준으로만 생각해서, 하느님을 심판의 하느님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를 이끌어 냈다.”(탈출 20,2; 신명 5,6 참조)
이 말씀은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는지를 확실히 알려줍니다. 이렇게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자유와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주신 것이기에, 율법에는 이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항상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분만을 신뢰하고 의탁하며 그분의 생명 안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하느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태도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율법주의적 태도로 살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부류가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철저히 지키려고 애썼는데,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39가지 금지 규정을 추가하고, 각 규정에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 지켰습니다.(미슈나 Shabbat 7,2; 10,5) 이를테면, 안식일에 침을 뱉어서는 안 되는데, 침이 흙을 동그랗게 만들 경우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안식일에 틀니를 끼어서는 안 됩니다.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집을 수 있는데, 그것 또한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리사이들은 율법에다 수많은 규정을 더해서 철저히 지키려 하였습니다. 문제는 자기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지키게 강권하면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신랄하게 질책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보다 율법적인 하느님만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인 세리와 창녀들이 율법을 신봉하는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마태 21,31 참조)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000년 전 바리사이들과 같은 율법주의적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10년 전에 회심한 사람이 10년만 지나면 쉽게 신바리사이가 된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아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전제하지 않고 오직 계명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자만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게 될 것입니다.
자만심은 내가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내 뜻을 그분 뜻 앞에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들보다 하느님께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벌을 받고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불안감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가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다른 이들의 존경과 칭송을 은근히 즐기고, 하느님에게서 당연히 대가를 받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심은 나 자신이 기준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계명은 우리를 위한 은총으로 주어진 것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의 아빠로 보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꼭 이런 이유뿐 아니라 개인의 부정적인 체험 때문에 하느님을 두려운 존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교우라면 <요리강령>이라는 교리 책을 기억할 것입니다. 참혹하게 벌 받고 있는 죄인들로 가득 찬 무시무시한 지옥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서 죄를 지으면 저렇게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벌벌 떨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교리책의 그림들을 지금 보면 어떨까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몇 개의 그림을 보고는 어찌나 거부감이 들던지 그 사이트에서 얼른 나와버렸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데 그 당시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윌리엄 폴 영은 <갈림길>에서 “그 불쌍한 친구(단테)는 지금도 (우리에게) 사과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단테로 인해 우리 안에 지옥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심어졌고, 동시에 하느님은 무서운 심판자라는 인상을 갖게 하는 데 그가 한몫을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옥은 1층부터 9층까지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배치되는데, 어떤 층이든 간에 받게 될 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빛도 희망도 없이 영원한 벌이 계속되기에,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하나같이 또다시 죽기를 간절히 애원하지만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곡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중세시대 때 실존한 인물들이기에, 독자들은 그들이 어떤 벌을 받고 있는지를 읽으면서 지옥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갖는 동시에 심판자 하느님께 대한 두려운 감정도 갖게 됩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에서도 하느님과 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 하느님이나 교회에 대해 왜곡된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 가톨릭교회 웨스트민스터 교구장이던 바질 흄Basil Hume, 1923-1999은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추기경이었습니다. 흄 추기경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에게 절제력을 키워주기 위해 한 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막 구워낸 달콤한 초콜릿 과자를 접시에 수북이 담아놓고 어린 바질을 불러 말했습니다. “아들, 엄마가 잠깐 가게에 다녀올 테니까 그때까지 절대 이 과자 먹으면 안 돼. 알았지? 만일 먹으면 엄마는 몰라도, 하느님은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고 계신다는 거 알지?” 언제나 부모님의 말을 잘 듣던 그는 과자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올 때까지 꾹 참고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에게 하느님은 감시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사제로서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하느님은 늘 감시자요,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흄 추기경은 어린 시절의 체험이 하느님에 대해 왜곡된 인상을 갖게 했음을 그분의 은총으로 깨닫게 됩니다. 만일 그날 초콜릿 과자를 슬쩍 먹었다 해도, 아빠 하느님께서는 다정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바질, 과자가 참 맛있지. 하나 더 먹으렴!” 그날 이후로 흄 추기경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아빠 하느님의 이미지에 접근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시편 103,2-3.8-10)
또 어떤 이들은 가부장적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또는 아버지의 악영향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데 저항감을 느기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주로 상담하던 그리스도교 심리학자 파울러James Fowler는 수백 차례의 상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인상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며, 그것은 그들과 그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 놀란다고,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 그 경험을 하느님에게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와 하늘 아빠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지니신 아버지의 모습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으로 올바른 아버지의 모습은 하느님에게 담겨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에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아버지의 모델을 볼 수 있다.”
바르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모습(모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아버지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을 기초로 하느님 아빠에 대한 인상을 결정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서학자 탈버트Charles Talbert는 우리가 통상 쓰는 말에는 관계적⋅정치적 의미가 묻어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빠를 관계적인 면에서 본다면, 자녀가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듯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빠를 권위나 정치적 면에서 보면,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가 전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전권을 행사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탈버트는 하느님 아빠의 호칭에는 권위나 정치적인 의미는 전혀 없고, 오직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헨리 나웬은 하느님, 아빠라는 호칭은 가부장적 권위에서 비롯된 호칭이 아니라는 점을 ‘되찾은 아들들의 비유’ 속 아버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가부장적 행동의 모든 경계가 무너졌다. 이 비유는 어떤 훌륭한 아버지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용서와 보살피심과 가엾게 여기심에는 한계가 없다. 예수님은 당대의 문화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변용시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면서, 그 하느님은 어떤 어머니도바도 더 부드러운 분이시라고 말하였습니다.
무릇 죄인들은 알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분을 향해 돌아가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동구 밖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는 탕자밖에는 아들이 없는 듯이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하느님은 수많은 자녀가 있어도 나 하나밖에는 더 자식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대자대비하신 아버지 어머니시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 어머니’라 하신 분은 요한바오로 1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비록 밤이라고 느껴질 때도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니, 그보다 더 하느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해를 끼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오직 선만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나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하느님을 아버지, 어머니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 사랑의 특성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크로산Dominic Crossan조차도 예수님의 ‘아빠’ 호칭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은유적 호칭이라고 설명합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역설합니다.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의 특성을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하느님을 아버지, 어머니란 은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3)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해를 끼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오직 선만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시편 103,2-3.8-10)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