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들어온 한국정원, 윤선도의 보길도 원림
▲ 부용동으로 돌아들어가는 길목
부용동 계곡, 크고 작은 자연암반이 계곡에 놓여있다.
▲ 부용동 계곡, 크고 작은 자연암반이 계곡에 놓여있다.
▲ 계곡의 바위들과 돌로 쌓은 석축
▲ 계곡이 넓어진 곳에 바위섬도 있다.
▲ 이 쉬어가는 연못에는 연'꽃이 자라고 있다.
▲ 힘센 황소같은 바위
▲ 코고 작은 바위들이 있는 계곡
▲ 부용동 원림의 중심 정자 세연정, 세연정 주변에는 물을 끌어들여 네모꼴의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는 네모꼴 모양의 섬도 만들었다.
▲ 세연정에 올라서 본 주변 풍광
▲ 옥소대로 오르는 길, 옥소대는 부용정에서 100여 미터 산길을 올라야 닿는 곳인데, 활을 쏘았다는 활터를 말한다
▲ 옥소대에서 본 세연정
▲ 세연정 앞 계곡에 뚝을 쌓아서 물이 머물게 하였고, 그 가운데는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섬 가운데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 계곡 옆 거북바위
▲ 다시 돌아나와서 본 부용동 계곡의 초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87년에 태어나 5살 어린시절, 임진왜란을 겪으며 자란 윤선도는 조선 후기 음악가, 시인, 풍수사, 의사로 한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본관이 해남인으로 정치인으로 고위 관직에도 올라 효종이 죽은 뒤 발생한 예송논쟁의 중심인물로 송시열의 반대편에 서서 논쟁에 가담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인의 맹공에 오랜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소현세자,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현종의 세자시절 이들의 사부였던 덕에 사형은 면하고 유배생활만 하게되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중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하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런데 제주로 가던 중 보길도에 이르러 지금의 부용동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어 제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물며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짓고, 산과 바다를 벗삼아 조용히 살고자 하였으나, 인조의 피난 행렬에 호종하지 않았다는 모함에 탄핵받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유배가 끝난 뒤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부용동의 자연에 최소한의 인공미를 더하여 연못을 만들고, 바윗돌을 옮겨와 지금의 세연정을 비롯한 원림을 가꾸었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윤선도가 낙향하여 이룬 정원으로, 한국인의 자연관과 조경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명승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조경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알려져 찾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학자로 정치인으로보다 시인이자 조경가로 자연에 최소한의 인공을 더하여 이룩한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그가 후세에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