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포(學圃) 정훤(鄭暄)
樂民 장달수
약력
1588년(선조 21) 합천 종간리서 출생
20세 과거 포기하고 학문 몰두
28세 겸재 하홍도 찾아오다
33세 용문산 아래로 이사
35세 무민당 박인 등과 두류산 유람, 단성으로 이주
44세 진주 고산으로 이주, 학포재 건립
53세 활인서 별제 제수
56세 영산현감 제수
60세 별세
태풍이 지난 뒤 진양호를 가로질러 고산정(孤山亭)에 올랐다. 섬 아닌 섬에 자리한 고산정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되어 보였다. 정자 앞 안내판에 “이 정자는 징사(徵士) 학포(學圃) 정훤(鄭暄)선생이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선생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16년 무자년(戊子年) 합천(陜川)에서 출생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에 휩쓸리기 싫어 합천에서 대평(大坪)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정자를 지어 고산정이라 하고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인조(仁祖)때 조정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천거하였으나 고사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란 문구가 있어 이곳이 조선시대 한 선비가 여생을 보낸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 문구 중 선조 6년은 만력 16년의 오기인 듯하다.
정자의 주인공은 학포 정훤이다. 임금이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으니 징사(徵士)라 한 것이다. 학포는 벼슬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자연에 파묻혀 유유자적하게 살며 학문 정진을 일삼으며 살다간 선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588년 합천 종간리(宗澗里)에서 출생했다. 영일(迎日) 정씨로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다. 학포의 6대조 설곡(雪谷) 보(保)가 세조 때 한명회의 미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려다 충신의 후예이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고 단성으로 내려와 살다가, 증조부 세필(世弼)이 합천으로 이주를 해 학포가 합천서 태어난 것이다.
학포는 포은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의 호 역시 “포은(圃隱)을 배우겠다”는 뜻의 학포로 지은 것이다. 9세 때 집에 있는 한 어미 닭의 병아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비록 미물이나 그 형제가 싸우는 것이 차마 볼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들로 내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세 때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읽었다. 이때 학포는 무술이 뛰어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부친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연마하란 권유를 했다.
학포는 부친의 권유를 간곡히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학포는 학문에 전념하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등 남명선생의 사숙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특히 무민당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산방(山房)에서 같이 지내며 함께 공부를 하며 돈독한 우의를 다져 나갔다.
그의 연보에 “31세 때 가야산 돌다리에 ‘서불부도차교(誓不復渡此橋)’란 6자를 썼다”란 기록이 있다. “맹세코 다시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는 뜻이다. 학포는 일찍이 내암 정인홍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당시 한때 스승이었던 내암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본 학포가 다시는 내암을 찾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뜻으로 이 글을 쓴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만난 학포의 후손은 지금도 내암 정인홍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정인홍’ 내지 ‘인홍’이라고 부르고 있다.
33세 때 합천을 떠나 용문산(龍門山) 아래로 이사를 했다. 내암 정인홍을 미워한 나머지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 이주를 한 것이라고 한다. 35세 때 선대 때부터 살아온 단성으로 다시 이주를 했다. 단성에서 약 10년을 살다가 44세 때 진주 고산(孤山)에 자리를 잡으니 지금의 대평면 대평리다. 학포는 고산의 한가하고 고요함을 좋아해서 여생을 보내기에 알맞고, 고기 낚는 즐거움이 있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 고산에 자리를 잡고 곧 학포재(學圃齋)를 짓고 이웃에 사는 벗들인 동계(東溪) 권도(權濤), 송대(松臺) 하선(河璿), 기옹(綺翁) 정동선(鄭東善), 송촌(松村) 손석윤(孫錫胤) 등과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탐구했다.
53세 때 조정에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서 사퇴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해 5월 절친한 벗 무민당 박인이 합천에서 고산정으로 요양을 왔으며, 학포는 친구를 위해 그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펴 주었다. 무민당은 남명선생의 학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선비로 고산정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56세 때 조정에선 다시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제수했다. 학포는 분수에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하고 다시 사양을 하고 돌아왔다. 벼슬을 사양하고 나서 학포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다 60세를 일기로 고산정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학포는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을 부귀영화보다 학문 정진에 힘을 쏟았다. 후세 사람들은 학포의 학덕을 높이 기려 학포가 세상을 떠난 후 1800년 진주 옥산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옥산서원은 포은 선생 영령을 모신 곳으로 지금은 하동 옥종에 있다. 학포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평생 배우고자 했던 선조인 포은 곁에 우리들에게 선비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고산정: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다. 학포가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