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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동쪽으로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33리이다. 서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37리이고,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33리이며, 북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3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건치연혁】 의창현(義昌縣) 본래 신라 굴자군(屈自郡)이며 경덕왕(景德王)이 의안(義安)이라 고쳤다.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신라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이 합포(合浦)라 고쳐서 의안군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의안ㆍ합포를 합쳐서 아울러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각각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원(元) 나라(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 할 때에 군량 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는 데 대한 상으로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만들어서 아울러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 태종조(太宗朝)에서는 두 현을 합쳐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굴자(屈自)ㆍ의안(義安)ㆍ의창(義昌)ㆍ회산(檜山)ㆍ골포(骨浦), 합포(合浦) 합(合)이 합(蛤)으로 된 곳도 있다. 회원(會原)ㆍ환주(還珠)
【성씨】 의창(義昌) 박(朴)ㆍ황(黃)ㆍ공(孔)ㆍ현(玄)ㆍ구(仇)ㆍ정(丁) 모두 촌성(村姓)이다. 김(金)ㆍ허(許)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합포 감(甘)ㆍ정(鄭)ㆍ유(兪)ㆍ현(玄), 제(諸) 감(甘). 김(金)ㆍ문(文)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습속이 거칠고 모질며, 송사하기를 좋아한다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형승】 합포는 큰 진(鎭)이다. 이첨(李詹)의 영성기(營城記)에 있다. 범이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하다. 김구덕(金九德)의 시에 있다.
【산천】 첨산(檐山)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니, 서쪽으로 청룡산(靑龍山)과 이어졌다. 청룡산 부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봉림산(鳳林山) 부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모산(佛母山)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염산(簾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사현(私峴) 부 남쪽 30리 지점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에 있으며, 산길이 꼬불꼬불하다. 백월산(白月山)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전천산(旃擅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반룡산(盤龍山) 부 남쪽 7리 지점에 있다. 장복산(長福山) 부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두척산(斗尺山) 회원현(會原縣)에 있으며 봉우리 위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월영대(月影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첨(李詹)의 시에, “우뚝한 저 두척산, 검푸른 빛이 구름 끝에 비꼈네. 동남쪽으로 푸른 바다에 임하니, 안개와 비가 절로 흐렸다 개었다 한다. 옛날 고운 선생(孤雲先生) 은 숲 끝에 집 지어, 월영대를 거니니, 정기(精氣)가 가을 하늘과 함께 아득하네.” 하였다. 바다 회원현에 있다. 주물연진(主勿淵津) 부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공관(公館)을 지어서, 배 타고 왕래하는 왜(倭)의 사신을 접대한다. 지이포(只耳浦) 부 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鹽田)이 있다. 사화포(沙火浦) 지이포(只耳浦) 5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이 있다. 마산포(馬山浦) 회원현(會原縣)에 있다. 저도(猪島) 월영대(月影臺) 남쪽에 있다. 합포(合浦)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원종(元宗) 15년 봄 정월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현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에게 조서를 내려서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합포에서 전함(戰艦)의 제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김방경 등이 원 나라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부언수 홍다구ㆍ유복형(劉復亨) 등과 함께 몽고(蒙古) 장병(將兵)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 뱃사공ㆍ수군인도수(水軍引導手) 6천 7백,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서 왜병에게 패하고 유복형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어서, 드디어 합포로 환군(還軍)하였다. 7년 만에 황제가 또 흔도(忻都)ㆍ홍다구에게 김방경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하도록 명하였고, 왕이 친히 합포에 와서 열병(閱兵)하였다. 황제가 또 범문호(笵文虎)에게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여음포(餘音浦) 회원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과 귀산현(龜山縣)의 경계이다. 온정(溫井) 부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신증』 광산(匡山) 두척산(斗尺山) 서쪽, 함안(咸安) 경계에 있다.
【토산】 철(鐵) 불모산(佛母山)에서 산출(産出)한다. 연동석(鉛銅石) 부 동북쪽 배사동(背寺洞)에서 산출한다. 굴[石花]ㆍ해삼ㆍ대[竹]ㆍ석류ㆍ옻[漆]ㆍ왜저(倭楮)ㆍ오징어ㆍ유자ㆍ감ㆍ가사리(加士里) 『신증』 대구[大口魚]ㆍ청어ㆍ황어(黃魚)ㆍ홍어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낙지[絡締]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
【성곽】 읍성 석축(石築)이며, 둘레가 4천 9백 20척이다.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우도 병마절도사영(右道兵馬節度使營) 옛 합포현(合浦縣)에 있으며 부와의 거리는 13리이다. 석성(石城)이며, 둘레는 4천 2백 91척, 높이는 15척이다. 영 안에 우물 다섯이 있는데 배극렴(裵克廉)이 쌓은 것이다. ○ 이첨(李詹)의 기(記)에, “처음에 설치하였던 영은 병란에 불탔고 군사가 들에서 거처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조공(曹公)이 영을 설치할 곳을 살펴서 좋은 터를 잡았다. 정사년 봄에 지문하사(知門下事) 우공(禹公)이 그 땅에 짓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돌아 갔고, 경산(京山) 배공(裵公)이 부원수(副元帥)로서 대신 진수(鎭守)하게 되었다. 대중이 이르자 곧 군영(軍營)을 보수하여, 공역(工役)을 마치자 이어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영을 설치하였으니 성을 뒷날로 미룰 것인가. 군진(軍鎭)을 울타리라 하는 것은 적을 막아서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어찌 울타리이면서 도리어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오. 지난 4년 동안에 영을 세 번이나 옮긴 것은 영 바깥쪽에 성곽이 없어서 민중의 마음을 굳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다 성을 쌓고 깊은 도랑과 높은 보루(堡壘)를 세워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장수들이 모두 ‘알았습니다. 모(某) 등이 종사한 지 오래이나 지혜가 얕아 계책을 내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오직 공이 영을 내리십시오.’ 하였다. 공이 공문을 띄워 백성을 뽑았다. 기계를 수리하고 성터의 원근을 논의하여 책략을 지시하고, 이에 공역을 시작하였다. 성을 흙으로 쌓으면 무너지기 쉽고 벽돌로 쌓으면 공역이 어려우며, 만약 돌로 쌓으면 견고하면서도 공역은 적다 하여 드디어 성을 돌로 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성터는 완성하였으나 흉년이 들어서 공역을 중지하였다. 공은 쓰임새를 줄이고 아끼기를 힘썼는데, 다음 해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 공이, ‘이제는 백성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 하고, 전일 문서에 의거하여 기일을 정해놓고 성을 쌓았다. 무오년 가을 9월(갑신일)에 시작하여 겨울 11월 무인일에 마치니, 그 일을 계획하고 쓰임을 다한 것은 《춘추(春秋)》의, 제(諸)와 방(防)에 성 쌓은 의의를 터득한 것이다. 성 높이는 한 길하고도 4척이 넘고, 두께는 1장(丈) 7촌(寸)이며, 둘레는 5백 94보(步) 3척이었다. 성 위에는 2척 간격으로 성가퀴를 설치하였고, 성가퀴에는 죄다 방패 하나 창 하나씩이 있다. 정기(旌旗)를 꽂고 화살과 돌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성가퀴를 지키는 자는 밤낮으로 거듭 경계하도록 하였다. 바라보면 우뚝하고 가까이 가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침범할 수 없으며, 또 호수(壕水)에 물을 돌리고 조교(吊橋) 막아 놓으니, 산천을 동여 묶은 듯하여 규모가 굉장하고 원대하였다. 이에 성의 동문(東門)을 원인(元仁), 남문을 회례(會禮), 서쪽 문을 회의(懷義), 북문을 용지(勇智)라 하였으니, 모두 그 방향에서 뜻을 취하였으며, 위엄과 은덕의 뜻을 담은 것이다. 성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를 설치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이보다 전에는 모두 먼 거리에서 운반하여 이틀 밤낮이 지나야 영에 도달하였으므로 사람과 짐승이 수송하느라 고달픈 폐단이 작지 않았는데, 이제는 편리하게 되었다. 바닷가 두어 고을 백성도 또한 이 성안에다가 움을 설치하여, 적이 오면 처자를 데리고 성에 들어오고, 적이 물러가면 성에서 나가게 하여, 마음놓고 농사지으면서 생업을 폐하지 않게 되니, 계획한 것이 정밀하였다. 가령 변고가 있더라도 편안히 대응할 수 있으니, 그 계책이 아주 완전하였음을 나는 알았다. 이 일이 알려지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예폐(禮幣)를 주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천시(天時)가 좋더라도 지세(地勢)가 이로운 것만 못하고, 지세가 이롭더라도 인화(人和)한 것보다는 못하다.’ 하였다. 이제 용성(龍星 2월)이 나타날 때에 일을 시작하여 일지(日至 동짓달)에 마쳤으니 천시를 얻었다 할 수 있고, 평지에다가 뜻밖의 변고를 대비하여 설치한 것이 효함(殽函)에 웅거한 듯하니 지세의 이로움을 얻었다 할 수 있으며, 일을 석달 만에 이루어서 백성의 생업을 그르치지 않았으니 인화라 할 수 있어 세 가지가 구비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니, 공의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유사(有司)들로서 공역을 순시하고 감독한 자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나의 글이 졸렬하나 일을 기록할 수 있었고, 또 공의 공적을 표창하는데 내가 더불어 수고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앞사람의 시에, “천기(天機)와 인사(人事)가 서로 어긋났으나, 성곽은 의연(依然)하게 옛날과 같구나. 가는 대[細竹]에는 새로 나온 죽순이 다시 자라고, 시든 꽃에는 피지 않은 가지가 아직도 있다. 강호 한밤 외로운 배에 꿈꾸고, 막부(幕府) 10년에 시 천 수(首) 지었네. 이날 남루(南樓)에 풍경이 좋은데, 원융(元戎)은 어느 곳에 정기(旌旗)를 머물렀나.” 하였다.
【봉수】 성황산 봉수(城隍山烽燧) 부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고산(高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칠원현(漆原縣) 안곡산(安谷山)에 응한다. 여음포 봉수(餘音浦烽燧) 동쪽으로 웅천현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현의 고산에 응한다.
【누정】 벽한루(碧寒樓)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산은 연기 빛을 띠어 주렴에 푸름을 들이고, 시냇물은 대 그림자를 머금어 사람에게 싸늘함을 번지네.” 하였다. 벽허루(碧虛樓) 객관 동쪽에 있다. 장성루(將星樓) 합포 절도사영(節度使營)에 있으며, 절도사 구겸(具謙)이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제일 남쪽 고을 합포영(蛤浦營)에는 좋은 시절 절제(節制)들이 모두 호걸이었네. 3천 명 호랑이 같은 군사 금사진(金蛇陣)이었고, 백 2개 산과 물은 철옹성(鐵甕城)이었네. 백성들은 우모(羽毛)를 즐거이 보아 기쁜 빛이었고, 영(令)은 사마(士馬 군사)에게 엄하여 적적하게 소리가 없네. 장군이 이미 변방 책략에 익숙하여, 손으로 은하(銀河)를 당겨 갑옷과 병기를 씻네.” 하였다.『신증』 연빈루(燕賓樓) 곧 동헌(東軒)에 있는 작은 누(樓)이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에, “관부(官府)와 누관(漏館)의 훌륭함을 혹자는, ‘정사(政事)와는 무관하다.’ 하고, 혹자는 ‘정체(停滯)된 것을 선양(宣揚)하고 화(和)한 데로 인도하여 정사를 통하게 한다.’ 하며, 또, ‘정사가 화한 다음이라야 인화(人和)가 되고, 인화가 된 다음이라야 흥작(興作)할 수 있다. 백성이 누대와 관우가 흥폐(興廢)된 것을 원망하지 않으면 그 정사를 알 수 있다.’ 한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혹자의 말이 모두 옳다. 그 지방에서 원이 되었는데 필부(匹夫)라도 제 생활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훌륭한 지대(池臺)와 누관이 있다 하더라도 다스림에 무슨 보탬이 있으리오. 정사가 화하고 사람들이 화하여 백성이 즐거이 일에 나아간다면, 정체된 것을 선양하고 화한 데로 인도할 제구가 어찌 없을 것인가. 홍치(弘治) 임자년 가을에 창원(昌原)의 부로(父老)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부는 예전에 회원(檜原)ㆍ의창(義昌) 두 현이었다. 옛날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면서 여기에다 행성(行省)을 설치하였고, 신라 때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축대를 쌓고 유람하여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또 지금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절(節)을 세우고 진(鎭)을 설치한 곳이니, 그 성곽과 관우(館宇)를 높고 크게 하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부 동쪽에는 벽허(碧虛), 서쪽에는 벽한(碧寒)이라는 두 누각이 있으나, 모두 비좁고 작으며 답답하고 막혀서 오르는 자가 안타깝게 여긴다. 지금 현명한 원인 이후(李侯) 영분(永蕡)이 부임한 지 5년인데 정사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화하여, 해야 할 일이 없자 그제야 벽허루(碧虛樓) 곁에 새 누각 5칸을 지으니, 일 없던 자를 부리고 번(番)을 든 아전과 군졸을 거느리고 도왔다. 금년 3월에 시작하였는데, 5월이 못 되어서 화려하게 지어져 우뚝하였고 누 위에는 여러 빈객과 우리들 고을 백성이 다 들어갈 만하였다. 노역이 우리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그 누각이 낙성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이 누각이 영원하기를 원한다. 공이, 누각의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여기에서 이후(李侯)의 정사를 족히 알겠다. 바야흐로 조정이 청명하고 변방 백성이 안도하고 있다. 남방에는 옛날부터 빈객이 많으니, 누각 안에서 풍월(風月)을 대하여 비록 마시고 먹으며 즐기더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의 이름을 연빈(燕賓)이라 하기를 청한다.’ 하였다.” 하였다. 열례정(悅禮亭) 북문 서쪽에 있으며, 무술(武術)을 사열하는 곳이다.
【학교】 향교(鄕校)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자여역(自如驛) 부 동쪽 19리 지점에 있다.
○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에 소속된 역이 14개이니, 근주(近珠)ㆍ창인(昌仁)ㆍ대산(大山)ㆍ신풍(新豐)ㆍ파수(巴水)ㆍ춘곡(春谷)ㆍ영포(靈浦)ㆍ금곡(金谷)ㆍ덕산(德山)ㆍ성법(省法)ㆍ적항(赤項)ㆍ안민(安民)ㆍ보평(報平)ㆍ남역(南驛)이다.
○ 승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丞)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근주역(近珠驛) 부 서쪽 16리 지점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부 동쪽 4리 지점에 있다. 안민역(安民驛) 부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부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안민원(安民院) 안민역 옆에 있다. 임견원(臨見院) 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감계원(甘界院) 부 북쪽 12리 지점에 있다. 전현원(錢縣院)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의장원(儀仗院) 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안성원(安成院)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적옥원(迪屋院)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영빈원(迎賓院) 부 안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봉림사(鳳林寺) 봉림산(鳳林山)에 있다. 신라 때 집사시랑(執事侍郞) 최인연(崔仁渷)이 지은, 중 진경(眞鏡)의 탑비(塔碑)가 있다. 광산사(匡山寺)ㆍ만월사(滿月寺) 모두 두척산(斗尺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 북쪽 검산(檢山)에 있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총묘】 최윤덕(崔潤德) 묘(墓) 부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고적】 회원고현(會原古縣) 부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우북지부곡(于北只部曲) 부 남쪽 11리 지점에 있다. 차의상향(車衣上鄕) 부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신소향(新所鄕)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동천향(銅泉鄕) 부의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내포향(內浦鄕) 부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안성소(安城所)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월영대(月影臺) 회원현(會原縣) 서쪽 바닷가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니, 글을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푸른 물결 호묘(浩渺)하고 돌이 우뚝한데, 그 안에 봉래 학사(蓬萊學士) 놀던 축대가 있네. 노송 있는 제단(祭壇)엔 풀이 우거졌고, 구름 낀 하늘 끝엔 한 조각 돛단배 오네. 백 년 된 시인데 시구는 새롭고, 만 리 되는 강산에 술잔 하나일세. 계림(鷄林) 쪽으로 머리 돌려도 사람은 안 보이고, 달빛만 부질없이 해문(海門)을 비춘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하니, 모두들 유선(儒仙)이 옛날에 읊조리던 축대라 하네. 달 그림자는 몇 번이나 이지러졌다가 다시 찼던가. 구름 자취는 영구히 가고 다시 온 적 없어라. 소인(騷人 문사)은 글 짓는 곳에 자주 붓을 휘두르고, 주객(酒客)은 만날 때에 거푸 잔을 드네. 휼륭한 경치를 못 잊어 갈 길 온통 잊으니, 겹쳐진 호수와 야단스러운 고갯마루가 사방을 둘렀네.” 하였다. ○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문장의 기세 점점 우뚝해지니, 문득 최후(崔侯)가 생각나 축대를 오르네. 풍월(風月)은 황학(黃鶴) 따라 가지 않았고, 안개 낀 물결은 백구(白鷗)를 쫓네. 비 개니 색이 짙게 난간에 내려앉고, 봄이 다 가니 송화(松花)가 술잔에 날아드네. 다시 거문고 타는 마음 진토(塵土)에 가로막혔으니 뒷날 비와 구름 따라 돌아옴이 좋으리”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가 축대에 경치가 기이하니, 물결을 비추는 밝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모름지기 고운(孤雲)의 시구를 읊조리지 말 것을. 예나 지금이나 어진 인재라도 한때뿐이네.”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먼 곳의 객이 유유히 고적 찾아오니, 늦은 봄 바닷가엔 들꽃이 피었네. 축대는 비었는데 달 그림자는 천 년 넘었고, 사람은 갔어도 시름 겨운 마음은 하루에도 아홉 번 도네. 깊은 골 단풍 숲은 비단보다 붉고, 한 웅덩이 가을 물은 이끼보다 푸르네. 고운은 돌아오지 않는데 산은 그대로이니, 아득한 회포를 술잔에나마 부치노라.”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내가 최유선(崔儒仙)을 생각하니, 옛날 바닷가 층대에 올랐도다. 바닷물은 어이 그리 아득하던가. 곁에는 두어 점 청산이 펼쳐 있네. 유선은 갔어도 명월은 남아, 맑은 빛이 은빛 파도와 함께 돌아오네. 고단한 객이 홀로 올라 가을 생각 많으니, 이 사이에 초재(楚才)가 없을 수 없구나.” 하였다. 절도사 구영(節度使舊營) 성터가 월영대(月影臺) 북쪽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여기에다 임시로 설치하고, 흔도(忻都)를 보내 몽고(蒙古) 병사 4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머물렀다.” 한다. 사자암(師子巖) 백월산(白月山) 남쪽에 있다. 신라의 중 노힐부득(怒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 도를 닦던 곳이다. 일본 밤[栗] 고려 원종(元宗) 때에 조양필(趙良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밤 열매를 구해 돌아오니, 의안현(義安縣)에 심도록 명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역자(譯者)를 원(元) 나라에 보내 밤을 바쳤다. 염산 고성(簾山古城) 부 동쪽 23리 지점에 있다.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8천 3백 20척이다. 성안에 작은 도랑 8개와 큰 우물 하나가 있다.
【명환】 고려 안유(安裕) 합포(合浦)에 진수(鎭守)하면서 군민(軍民)을 돌보니 주군(州郡)이 편안하였다. 나유(羅裕)ㆍ나익희(羅益禧)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다. 안우기(安于器) 합포에 진수하여 청렴하고 일 처리를 잘한다고 일컬어졌다. 김득배(金得培)ㆍ정사도(鄭思道)ㆍ배극렴(裵克廉) 모두 합포에 진수하였다. 전녹생(田祿生) 두 번이나 함포에 진수하였다. 박위(朴葳)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다.본조 이징석(李澄石)ㆍ조비형(曹備衡)ㆍ하경복(河敬復) 모두 함포에 진수하였던 사람이다.
【인물】 고려 황석기(黃石奇)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 황상(黃裳) 석기 아들이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호군(護軍)으로 제수되었고, 공민왕(恭愍王) 초기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용되었다가 두 번 승진하여 판추밀월사(判樞密院事)로 전임되었다. 기철(奇轍)을 베어 죽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서 남쪽으로 행차할 때에 시종하다가, 교주 강릉도 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어, 안우(安祐) 등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였다. 참지 문하 정사(叅知門下政事)에 배수되고, 익찬공신(翊贊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찬성사(贊成事)에 승진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원 나라에서 홍건적을 평정하였다는 공으로 봉훈대부 경정감승(奉訓大夫經正監丞)을 제수하였으며, 시호는 공정(恭靖)이다. 활을 잘 쏘아서 천하에 알려지니, 원 나라 순제(順帝)가 친히 그의 팔을 끌어서 보았다. 손수경(孫守卿)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에 갔던 공로가 있었다 하여 1등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또 충정왕(忠定王)을 받들고 원 나라에 가기도 하였는데, 즉위하자 추성 선력 익대 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의 호를 내렸다. 판삼사(判三司)에 제수되고,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신증』 본조 황형(黃衡) 석기의 후손이며,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무과에 올랐고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효자】 본조 김효량(金孝良) 15세 때에 아버지 득예(得裔)가 악질(惡疾)에 걸려서 낫지 않았는데, 효량이 산 사람의 뼈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왼쪽 손의 무명지(無名指)를 끊어서 피를 약에 타 올렸더니 곧 효과가 있었다. 세종(世宗)께서 정려(旌閭)하고 복호(復戶)하도록 명하였다. 박시명(朴始明) 부모가 동시에 죽으니, 여막에서 살면서 지극히 슬퍼하였다. 상(喪)을 마치자 제물을 마련하는 부엌을 따로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직접 전(奠)을 올렸으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아뢰니, 일이 알려져서 관직을 상주었다.『신증』 박정견(朴庭堅) 연산(燕山) 때에 상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는데, 정견이 연달아 부모 상을 만나 3년간 최복(衰服)을 입고 상을 마치고도 오히려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전을 그만두지 않았다. 금상(今上) 5년에 정문(旌門)하였다. 옥석견(玉石堅) 아버지가 일찍 죽고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다. 별미(別味)가 생기면 가슴에 품고 와서 드렸다. 어머니가 죽자, 매우 슬퍼하여 예(禮)보다 더하였다. 그때에 복상을 짧게 하는 법이 매우 엄하였으나, 홀로 여묘(廬墓)하고 최복을 벗지 않았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다시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전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금상(今上) 5년에 정문하였다.
【제영】 파안합포낭연식(波安蛤浦狼煙息) 최부(崔府)의 시에, “합포(蛤浦)에 물결 고요하고 봉수(烽燧)가 잠잠하니, 백마는 버드나무 숲에서 한가로이 자고 있네.” 하였다. 해천연우습정기(海天煙雨濕旌旗) 이첨(李詹)의 시에, “철옹성(鐵甕城)에 먼지 이니 북이 울리고, 바다의 하늘에 안개 끼고 비 오니 깃발이 젖는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4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임진왜란 때에 오랫동안 성(城)을 의지하면서, 병사(兵使) 겸 부사(府使)인 김응서(金應瑞)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軍官民) 중에 한 사람도 왜놈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음을 체찰사(體察使)가 장계(狀啓)하여 승격시켰다. 칠원군(漆原郡)과 합쳤다가 광해주 9년에 나누었다. 인조 5년에 진해(鎭海)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전패(殿牌)를 잃었기 때문이다. 1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내(府內) 끝이 10리이다. 북일운(北一運) 15리이다. 북이운(北二運) 25리이다. 북삼운(北三運) 35리이다. 동일운(東一運) 10리이다. 동이운(東二運) 15리이다. 동삼운(東三運) 25리이다. 남일운(南一運) 10리이다. 남이운(南二運) 20리이다. 남삼운(南三運) 30리이다. 서일운(西一運) 20리이다. 서이운(西二運) 40리이다. 서삼운(西三運) 50리이다. 신풍(新豐) 북쪽으로 10리이다. 도하일운(道下一運) 남쪽으로 30리이다. 도하이운(道下二運) 서남쪽으로 50리이다.
○ 면북지부곡(丏北只部曲) 남쪽으로 10리이다. 거의상향(車衣上鄕)ㆍ신소향(新所鄕)은 북쪽으로 25리이다. 동천향(銅泉鄕) 북쪽으로 15리이다. 내포향(內浦鄕)은 서쪽으로 50리이다. 안성소(安城所) 서쪽으로 30리이다.
【성지】 옛 우 병영성(右兵營城) 서쪽으로 10리이다. 고현(古縣)인 회원(會原)의 월영당(月影堂) 북쪽에 있다. 고려 때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옛 터이다. 이조 태종 때에 영을 두었다가 선조 때에 진주로 옮겼다. ○ 고려 신우(辛禑) 4년에 배극렴(裵克廉)이 둘레 4천 2백 91척의 성을 쌓았다. 우물 5이다. 염산고성(廉山古城) 동쪽으로 15리이며, 둘레 8천 3백 20척, 소거(小渠) 8, 우물 하나가 있다. 강마산성(江馬山城) 왜놈이 지었다.
【창고】 반산창(盤山倉) 좌조창(左漕倉)이라 부른다. 영종 경진년에 관찰사 조암(趙曮)의 계청(啓請)으로 설치하였다. 창원ㆍ김해ㆍ함안ㆍ칠원ㆍ진해ㆍ웅천(熊川)과 의령(宜寧)의 동북면(東北面), 고성(固城)의 동남면(東南面)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서울까지 조운(漕運)한다.
○ 창원 부사는 계량(計量)을 감독하고 제포(齊浦) 만호(萬戶)는 수납(收納)한다. 읍창(邑倉)ㆍ반상창(盤上倉) 반룡산(盤龍山) 밑의 해변에 있다. 해창(海倉) 합포(合浦) 해변에 있다.
○ 석두창(石頭倉) 나포(螺浦)에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회원(會原) 편에 들어 있다. 전에는 골포(骨浦)라 불렀다. 고려 초에 남도(南道) 수군(水軍)에 두었던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이다.
【진도】 주물여진(主勿淵津)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칠원의 매포(買浦) 하류이다.
【토산】 밤ㆍ세모(細毛).
【누정】 강무정(講武亭) 서문(西門) 밖에 있다.
【묘전】 공자영전(孔子影殿) 공자의 후손이 우리나라로 와서 창원을 관향(貫鄕)으로 삼고서 이 전각을 세웠다.
동쪽으로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33리이다. 서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37리이고,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33리이며, 북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3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건치연혁】 의창현(義昌縣) 본래 신라 굴자군(屈自郡)이며 경덕왕(景德王)이 의안(義安)이라 고쳤다.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신라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이 합포(合浦)라 고쳐서 의안군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의안ㆍ합포를 합쳐서 아울러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각각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원(元) 나라(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 할 때에 군량 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는 데 대한 상으로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만들어서 아울러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 태종조(太宗朝)에서는 두 현을 합쳐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굴자(屈自)ㆍ의안(義安)ㆍ의창(義昌)ㆍ회산(檜山)ㆍ골포(骨浦), 합포(合浦) 합(合)이 합(蛤)으로 된 곳도 있다. 회원(會原)ㆍ환주(還珠)
【성씨】 의창(義昌) 박(朴)ㆍ황(黃)ㆍ공(孔)ㆍ현(玄)ㆍ구(仇)ㆍ정(丁) 모두 촌성(村姓)이다. 김(金)ㆍ허(許)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합포 감(甘)ㆍ정(鄭)ㆍ유(兪)ㆍ현(玄), 제(諸) 감(甘). 김(金)ㆍ문(文)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습속이 거칠고 모질며, 송사하기를 좋아한다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형승】 합포는 큰 진(鎭)이다. 이첨(李詹)의 영성기(營城記)에 있다. 범이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하다. 김구덕(金九德)의 시에 있다.
【산천】 첨산(檐山)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니, 서쪽으로 청룡산(靑龍山)과 이어졌다. 청룡산 부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봉림산(鳳林山) 부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모산(佛母山)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염산(簾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사현(私峴) 부 남쪽 30리 지점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에 있으며, 산길이 꼬불꼬불하다. 백월산(白月山)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전천산(旃擅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반룡산(盤龍山) 부 남쪽 7리 지점에 있다. 장복산(長福山) 부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두척산(斗尺山) 회원현(會原縣)에 있으며 봉우리 위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월영대(月影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첨(李詹)의 시에, “우뚝한 저 두척산, 검푸른 빛이 구름 끝에 비꼈네. 동남쪽으로 푸른 바다에 임하니, 안개와 비가 절로 흐렸다 개었다 한다. 옛날 고운 선생(孤雲先生) 은 숲 끝에 집 지어, 월영대를 거니니, 정기(精氣)가 가을 하늘과 함께 아득하네.” 하였다. 바다 회원현에 있다. 주물연진(主勿淵津) 부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공관(公館)을 지어서, 배 타고 왕래하는 왜(倭)의 사신을 접대한다. 지이포(只耳浦) 부 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鹽田)이 있다. 사화포(沙火浦) 지이포(只耳浦) 5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이 있다. 마산포(馬山浦) 회원현(會原縣)에 있다. 저도(猪島) 월영대(月影臺) 남쪽에 있다. 합포(合浦)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원종(元宗) 15년 봄 정월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현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에게 조서를 내려서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합포에서 전함(戰艦)의 제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김방경 등이 원 나라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부언수 홍다구ㆍ유복형(劉復亨) 등과 함께 몽고(蒙古) 장병(將兵)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 뱃사공ㆍ수군인도수(水軍引導手) 6천 7백,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서 왜병에게 패하고 유복형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어서, 드디어 합포로 환군(還軍)하였다. 7년 만에 황제가 또 흔도(忻都)ㆍ홍다구에게 김방경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하도록 명하였고, 왕이 친히 합포에 와서 열병(閱兵)하였다. 황제가 또 범문호(笵文虎)에게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여음포(餘音浦) 회원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과 귀산현(龜山縣)의 경계이다. 온정(溫井) 부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신증』 광산(匡山) 두척산(斗尺山) 서쪽, 함안(咸安) 경계에 있다.
【토산】 철(鐵) 불모산(佛母山)에서 산출(産出)한다. 연동석(鉛銅石) 부 동북쪽 배사동(背寺洞)에서 산출한다. 굴[石花]ㆍ해삼ㆍ대[竹]ㆍ석류ㆍ옻[漆]ㆍ왜저(倭楮)ㆍ오징어ㆍ유자ㆍ감ㆍ가사리(加士里) 『신증』 대구[大口魚]ㆍ청어ㆍ황어(黃魚)ㆍ홍어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낙지[絡締]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
【성곽】 읍성 석축(石築)이며, 둘레가 4천 9백 20척이다.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우도 병마절도사영(右道兵馬節度使營) 옛 합포현(合浦縣)에 있으며 부와의 거리는 13리이다. 석성(石城)이며, 둘레는 4천 2백 91척, 높이는 15척이다. 영 안에 우물 다섯이 있는데 배극렴(裵克廉)이 쌓은 것이다. ○ 이첨(李詹)의 기(記)에, “처음에 설치하였던 영은 병란에 불탔고 군사가 들에서 거처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조공(曹公)이 영을 설치할 곳을 살펴서 좋은 터를 잡았다. 정사년 봄에 지문하사(知門下事) 우공(禹公)이 그 땅에 짓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돌아 갔고, 경산(京山) 배공(裵公)이 부원수(副元帥)로서 대신 진수(鎭守)하게 되었다. 대중이 이르자 곧 군영(軍營)을 보수하여, 공역(工役)을 마치자 이어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영을 설치하였으니 성을 뒷날로 미룰 것인가. 군진(軍鎭)을 울타리라 하는 것은 적을 막아서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어찌 울타리이면서 도리어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오. 지난 4년 동안에 영을 세 번이나 옮긴 것은 영 바깥쪽에 성곽이 없어서 민중의 마음을 굳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다 성을 쌓고 깊은 도랑과 높은 보루(堡壘)를 세워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장수들이 모두 ‘알았습니다. 모(某) 등이 종사한 지 오래이나 지혜가 얕아 계책을 내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오직 공이 영을 내리십시오.’ 하였다. 공이 공문을 띄워 백성을 뽑았다. 기계를 수리하고 성터의 원근을 논의하여 책략을 지시하고, 이에 공역을 시작하였다. 성을 흙으로 쌓으면 무너지기 쉽고 벽돌로 쌓으면 공역이 어려우며, 만약 돌로 쌓으면 견고하면서도 공역은 적다 하여 드디어 성을 돌로 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성터는 완성하였으나 흉년이 들어서 공역을 중지하였다. 공은 쓰임새를 줄이고 아끼기를 힘썼는데, 다음 해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 공이, ‘이제는 백성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 하고, 전일 문서에 의거하여 기일을 정해놓고 성을 쌓았다. 무오년 가을 9월(갑신일)에 시작하여 겨울 11월 무인일에 마치니, 그 일을 계획하고 쓰임을 다한 것은 《춘추(春秋)》의, 제(諸)와 방(防)에 성 쌓은 의의를 터득한 것이다. 성 높이는 한 길하고도 4척이 넘고, 두께는 1장(丈) 7촌(寸)이며, 둘레는 5백 94보(步) 3척이었다. 성 위에는 2척 간격으로 성가퀴를 설치하였고, 성가퀴에는 죄다 방패 하나 창 하나씩이 있다. 정기(旌旗)를 꽂고 화살과 돌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성가퀴를 지키는 자는 밤낮으로 거듭 경계하도록 하였다. 바라보면 우뚝하고 가까이 가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침범할 수 없으며, 또 호수(壕水)에 물을 돌리고 조교(吊橋) 막아 놓으니, 산천을 동여 묶은 듯하여 규모가 굉장하고 원대하였다. 이에 성의 동문(東門)을 원인(元仁), 남문을 회례(會禮), 서쪽 문을 회의(懷義), 북문을 용지(勇智)라 하였으니, 모두 그 방향에서 뜻을 취하였으며, 위엄과 은덕의 뜻을 담은 것이다. 성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를 설치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이보다 전에는 모두 먼 거리에서 운반하여 이틀 밤낮이 지나야 영에 도달하였으므로 사람과 짐승이 수송하느라 고달픈 폐단이 작지 않았는데, 이제는 편리하게 되었다. 바닷가 두어 고을 백성도 또한 이 성안에다가 움을 설치하여, 적이 오면 처자를 데리고 성에 들어오고, 적이 물러가면 성에서 나가게 하여, 마음놓고 농사지으면서 생업을 폐하지 않게 되니, 계획한 것이 정밀하였다. 가령 변고가 있더라도 편안히 대응할 수 있으니, 그 계책이 아주 완전하였음을 나는 알았다. 이 일이 알려지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예폐(禮幣)를 주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천시(天時)가 좋더라도 지세(地勢)가 이로운 것만 못하고, 지세가 이롭더라도 인화(人和)한 것보다는 못하다.’ 하였다. 이제 용성(龍星 2월)이 나타날 때에 일을 시작하여 일지(日至 동짓달)에 마쳤으니 천시를 얻었다 할 수 있고, 평지에다가 뜻밖의 변고를 대비하여 설치한 것이 효함(殽函)에 웅거한 듯하니 지세의 이로움을 얻었다 할 수 있으며, 일을 석달 만에 이루어서 백성의 생업을 그르치지 않았으니 인화라 할 수 있어 세 가지가 구비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니, 공의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유사(有司)들로서 공역을 순시하고 감독한 자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나의 글이 졸렬하나 일을 기록할 수 있었고, 또 공의 공적을 표창하는데 내가 더불어 수고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앞사람의 시에, “천기(天機)와 인사(人事)가 서로 어긋났으나, 성곽은 의연(依然)하게 옛날과 같구나. 가는 대[細竹]에는 새로 나온 죽순이 다시 자라고, 시든 꽃에는 피지 않은 가지가 아직도 있다. 강호 한밤 외로운 배에 꿈꾸고, 막부(幕府) 10년에 시 천 수(首) 지었네. 이날 남루(南樓)에 풍경이 좋은데, 원융(元戎)은 어느 곳에 정기(旌旗)를 머물렀나.” 하였다.
【봉수】 성황산 봉수(城隍山烽燧) 부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고산(高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칠원현(漆原縣) 안곡산(安谷山)에 응한다. 여음포 봉수(餘音浦烽燧) 동쪽으로 웅천현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현의 고산에 응한다.
【누정】 벽한루(碧寒樓)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산은 연기 빛을 띠어 주렴에 푸름을 들이고, 시냇물은 대 그림자를 머금어 사람에게 싸늘함을 번지네.” 하였다. 벽허루(碧虛樓) 객관 동쪽에 있다. 장성루(將星樓) 합포 절도사영(節度使營)에 있으며, 절도사 구겸(具謙)이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제일 남쪽 고을 합포영(蛤浦營)에는 좋은 시절 절제(節制)들이 모두 호걸이었네. 3천 명 호랑이 같은 군사 금사진(金蛇陣)이었고, 백 2개 산과 물은 철옹성(鐵甕城)이었네. 백성들은 우모(羽毛)를 즐거이 보아 기쁜 빛이었고, 영(令)은 사마(士馬 군사)에게 엄하여 적적하게 소리가 없네. 장군이 이미 변방 책략에 익숙하여, 손으로 은하(銀河)를 당겨 갑옷과 병기를 씻네.” 하였다.『신증』 연빈루(燕賓樓) 곧 동헌(東軒)에 있는 작은 누(樓)이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에, “관부(官府)와 누관(漏館)의 훌륭함을 혹자는, ‘정사(政事)와는 무관하다.’ 하고, 혹자는 ‘정체(停滯)된 것을 선양(宣揚)하고 화(和)한 데로 인도하여 정사를 통하게 한다.’ 하며, 또, ‘정사가 화한 다음이라야 인화(人和)가 되고, 인화가 된 다음이라야 흥작(興作)할 수 있다. 백성이 누대와 관우가 흥폐(興廢)된 것을 원망하지 않으면 그 정사를 알 수 있다.’ 한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혹자의 말이 모두 옳다. 그 지방에서 원이 되었는데 필부(匹夫)라도 제 생활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훌륭한 지대(池臺)와 누관이 있다 하더라도 다스림에 무슨 보탬이 있으리오. 정사가 화하고 사람들이 화하여 백성이 즐거이 일에 나아간다면, 정체된 것을 선양하고 화한 데로 인도할 제구가 어찌 없을 것인가. 홍치(弘治) 임자년 가을에 창원(昌原)의 부로(父老)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부는 예전에 회원(檜原)ㆍ의창(義昌) 두 현이었다. 옛날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면서 여기에다 행성(行省)을 설치하였고, 신라 때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축대를 쌓고 유람하여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또 지금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절(節)을 세우고 진(鎭)을 설치한 곳이니, 그 성곽과 관우(館宇)를 높고 크게 하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부 동쪽에는 벽허(碧虛), 서쪽에는 벽한(碧寒)이라는 두 누각이 있으나, 모두 비좁고 작으며 답답하고 막혀서 오르는 자가 안타깝게 여긴다. 지금 현명한 원인 이후(李侯) 영분(永蕡)이 부임한 지 5년인데 정사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화하여, 해야 할 일이 없자 그제야 벽허루(碧虛樓) 곁에 새 누각 5칸을 지으니, 일 없던 자를 부리고 번(番)을 든 아전과 군졸을 거느리고 도왔다. 금년 3월에 시작하였는데, 5월이 못 되어서 화려하게 지어져 우뚝하였고 누 위에는 여러 빈객과 우리들 고을 백성이 다 들어갈 만하였다. 노역이 우리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그 누각이 낙성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이 누각이 영원하기를 원한다. 공이, 누각의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여기에서 이후(李侯)의 정사를 족히 알겠다. 바야흐로 조정이 청명하고 변방 백성이 안도하고 있다. 남방에는 옛날부터 빈객이 많으니, 누각 안에서 풍월(風月)을 대하여 비록 마시고 먹으며 즐기더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의 이름을 연빈(燕賓)이라 하기를 청한다.’ 하였다.” 하였다. 열례정(悅禮亭) 북문 서쪽에 있으며, 무술(武術)을 사열하는 곳이다.
【학교】 향교(鄕校)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자여역(自如驛) 부 동쪽 19리 지점에 있다.
○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에 소속된 역이 14개이니, 근주(近珠)ㆍ창인(昌仁)ㆍ대산(大山)ㆍ신풍(新豐)ㆍ파수(巴水)ㆍ춘곡(春谷)ㆍ영포(靈浦)ㆍ금곡(金谷)ㆍ덕산(德山)ㆍ성법(省法)ㆍ적항(赤項)ㆍ안민(安民)ㆍ보평(報平)ㆍ남역(南驛)이다.
○ 승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丞)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근주역(近珠驛) 부 서쪽 16리 지점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부 동쪽 4리 지점에 있다. 안민역(安民驛) 부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부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안민원(安民院) 안민역 옆에 있다. 임견원(臨見院) 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감계원(甘界院) 부 북쪽 12리 지점에 있다. 전현원(錢縣院)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의장원(儀仗院) 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안성원(安成院)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적옥원(迪屋院)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영빈원(迎賓院) 부 안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봉림사(鳳林寺) 봉림산(鳳林山)에 있다. 신라 때 집사시랑(執事侍郞) 최인연(崔仁渷)이 지은, 중 진경(眞鏡)의 탑비(塔碑)가 있다. 광산사(匡山寺)ㆍ만월사(滿月寺) 모두 두척산(斗尺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 북쪽 검산(檢山)에 있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총묘】 최윤덕(崔潤德) 묘(墓) 부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고적】 회원고현(會原古縣) 부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우북지부곡(于北只部曲) 부 남쪽 11리 지점에 있다. 차의상향(車衣上鄕) 부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신소향(新所鄕)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동천향(銅泉鄕) 부의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내포향(內浦鄕) 부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안성소(安城所)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월영대(月影臺) 회원현(會原縣) 서쪽 바닷가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니, 글을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푸른 물결 호묘(浩渺)하고 돌이 우뚝한데, 그 안에 봉래 학사(蓬萊學士) 놀던 축대가 있네. 노송 있는 제단(祭壇)엔 풀이 우거졌고, 구름 낀 하늘 끝엔 한 조각 돛단배 오네. 백 년 된 시인데 시구는 새롭고, 만 리 되는 강산에 술잔 하나일세. 계림(鷄林) 쪽으로 머리 돌려도 사람은 안 보이고, 달빛만 부질없이 해문(海門)을 비춘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하니, 모두들 유선(儒仙)이 옛날에 읊조리던 축대라 하네. 달 그림자는 몇 번이나 이지러졌다가 다시 찼던가. 구름 자취는 영구히 가고 다시 온 적 없어라. 소인(騷人 문사)은 글 짓는 곳에 자주 붓을 휘두르고, 주객(酒客)은 만날 때에 거푸 잔을 드네. 휼륭한 경치를 못 잊어 갈 길 온통 잊으니, 겹쳐진 호수와 야단스러운 고갯마루가 사방을 둘렀네.” 하였다. ○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문장의 기세 점점 우뚝해지니, 문득 최후(崔侯)가 생각나 축대를 오르네. 풍월(風月)은 황학(黃鶴) 따라 가지 않았고, 안개 낀 물결은 백구(白鷗)를 쫓네. 비 개니 색이 짙게 난간에 내려앉고, 봄이 다 가니 송화(松花)가 술잔에 날아드네. 다시 거문고 타는 마음 진토(塵土)에 가로막혔으니 뒷날 비와 구름 따라 돌아옴이 좋으리”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가 축대에 경치가 기이하니, 물결을 비추는 밝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모름지기 고운(孤雲)의 시구를 읊조리지 말 것을. 예나 지금이나 어진 인재라도 한때뿐이네.”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먼 곳의 객이 유유히 고적 찾아오니, 늦은 봄 바닷가엔 들꽃이 피었네. 축대는 비었는데 달 그림자는 천 년 넘었고, 사람은 갔어도 시름 겨운 마음은 하루에도 아홉 번 도네. 깊은 골 단풍 숲은 비단보다 붉고, 한 웅덩이 가을 물은 이끼보다 푸르네. 고운은 돌아오지 않는데 산은 그대로이니, 아득한 회포를 술잔에나마 부치노라.”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내가 최유선(崔儒仙)을 생각하니, 옛날 바닷가 층대에 올랐도다. 바닷물은 어이 그리 아득하던가. 곁에는 두어 점 청산이 펼쳐 있네. 유선은 갔어도 명월은 남아, 맑은 빛이 은빛 파도와 함께 돌아오네. 고단한 객이 홀로 올라 가을 생각 많으니, 이 사이에 초재(楚才)가 없을 수 없구나.” 하였다. 절도사 구영(節度使舊營) 성터가 월영대(月影臺) 북쪽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여기에다 임시로 설치하고, 흔도(忻都)를 보내 몽고(蒙古) 병사 4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머물렀다.” 한다. 사자암(師子巖) 백월산(白月山) 남쪽에 있다. 신라의 중 노힐부득(怒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 도를 닦던 곳이다. 일본 밤[栗] 고려 원종(元宗) 때에 조양필(趙良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밤 열매를 구해 돌아오니, 의안현(義安縣)에 심도록 명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역자(譯者)를 원(元) 나라에 보내 밤을 바쳤다. 염산 고성(簾山古城) 부 동쪽 23리 지점에 있다.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8천 3백 20척이다. 성안에 작은 도랑 8개와 큰 우물 하나가 있다.
【명환】 고려 안유(安裕) 합포(合浦)에 진수(鎭守)하면서 군민(軍民)을 돌보니 주군(州郡)이 편안하였다. 나유(羅裕)ㆍ나익희(羅益禧)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다. 안우기(安于器) 합포에 진수하여 청렴하고 일 처리를 잘한다고 일컬어졌다. 김득배(金得培)ㆍ정사도(鄭思道)ㆍ배극렴(裵克廉) 모두 합포에 진수하였다. 전녹생(田祿生) 두 번이나 함포에 진수하였다. 박위(朴葳) 세 번이나 합포에 진수하였다.본조 이징석(李澄石)ㆍ조비형(曹備衡)ㆍ하경복(河敬復) 모두 함포에 진수하였던 사람이다.
【인물】 고려 황석기(黃石奇)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 황상(黃裳) 석기 아들이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호군(護軍)으로 제수되었고, 공민왕(恭愍王) 초기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용되었다가 두 번 승진하여 판추밀월사(判樞密院事)로 전임되었다. 기철(奇轍)을 베어 죽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서 남쪽으로 행차할 때에 시종하다가, 교주 강릉도 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어, 안우(安祐) 등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였다. 참지 문하 정사(叅知門下政事)에 배수되고, 익찬공신(翊贊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찬성사(贊成事)에 승진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원 나라에서 홍건적을 평정하였다는 공으로 봉훈대부 경정감승(奉訓大夫經正監丞)을 제수하였으며, 시호는 공정(恭靖)이다. 활을 잘 쏘아서 천하에 알려지니, 원 나라 순제(順帝)가 친히 그의 팔을 끌어서 보았다. 손수경(孫守卿)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에 갔던 공로가 있었다 하여 1등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또 충정왕(忠定王)을 받들고 원 나라에 가기도 하였는데, 즉위하자 추성 선력 익대 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의 호를 내렸다. 판삼사(判三司)에 제수되고,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신증』 본조 황형(黃衡) 석기의 후손이며,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무과에 올랐고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효자】 본조 김효량(金孝良) 15세 때에 아버지 득예(得裔)가 악질(惡疾)에 걸려서 낫지 않았는데, 효량이 산 사람의 뼈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왼쪽 손의 무명지(無名指)를 끊어서 피를 약에 타 올렸더니 곧 효과가 있었다. 세종(世宗)께서 정려(旌閭)하고 복호(復戶)하도록 명하였다. 박시명(朴始明) 부모가 동시에 죽으니, 여막에서 살면서 지극히 슬퍼하였다. 상(喪)을 마치자 제물을 마련하는 부엌을 따로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직접 전(奠)을 올렸으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아뢰니, 일이 알려져서 관직을 상주었다.『신증』 박정견(朴庭堅) 연산(燕山) 때에 상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는데, 정견이 연달아 부모 상을 만나 3년간 최복(衰服)을 입고 상을 마치고도 오히려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전을 그만두지 않았다. 금상(今上) 5년에 정문(旌門)하였다. 옥석견(玉石堅) 아버지가 일찍 죽고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다. 별미(別味)가 생기면 가슴에 품고 와서 드렸다. 어머니가 죽자, 매우 슬퍼하여 예(禮)보다 더하였다. 그때에 복상을 짧게 하는 법이 매우 엄하였으나, 홀로 여묘(廬墓)하고 최복을 벗지 않았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다시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전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금상(今上) 5년에 정문하였다.
【제영】 파안합포낭연식(波安蛤浦狼煙息) 최부(崔府)의 시에, “합포(蛤浦)에 물결 고요하고 봉수(烽燧)가 잠잠하니, 백마는 버드나무 숲에서 한가로이 자고 있네.” 하였다. 해천연우습정기(海天煙雨濕旌旗) 이첨(李詹)의 시에, “철옹성(鐵甕城)에 먼지 이니 북이 울리고, 바다의 하늘에 안개 끼고 비 오니 깃발이 젖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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