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은 오랜 우방국이다. 하지만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자 경찰 국가로 자리잡은 현재도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친구와 적을 선택한다는 것은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소리인지도 모른다. 정의와 불의는 그들의 선택 기준이 아니다.
굳이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아프간 공습만 보아도 그것은 명백히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이 자동 소총 몇 자루로 소련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서 16년간의 게릴라 전투 끝에 승리했을 때 뒤에서 자금과 무기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준 국가가 미국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지원해 준 집단이 바로 현재의 집권세력인 탈리반이다. 이슬람 청년 운동 세력에 불과했던 탈리반이 정권을 잡는데 미국의 지원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었다. 빈 라덴과 미국이 맺게 된 모종의 관계도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북한은 인권이 없는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교두보가 한국이라는 확신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미국의 적이 되어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름이 좋아 우방국이었던 미국에 대해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반미 운동이 증폭, 확대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유럽을 포함한 세계의 여론도 미국의 패권주의와 군수사업을 등에 업은 전쟁광 부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추세이다. 아프간 공습에 가장 적극적 동반자였던 영국에서조차 부시의 이번 발언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악의 축> 발언은 취소되지 않았고, 부시의 지방 순회 내내 계속 반복되었다. 그들의 맹목적인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힘이다. 그 힘을 빌어 자신들의 방식으로 다분화된 세계를 누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외교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상품에도 자신들의 의도를 훨씬 세련된 방법으로 전달하고 주입시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헐리웃의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패권적인 힘의 논리는 굳이 두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물량과 상상을 초월하는 테크놀러지로 포장한 영상은 그 내용의 편협함이나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말 오후 2시간의 오락을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현재 한국의 극장가에서도 상영되고 있는 <블랙 호크 다운>은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언뜻 보기에 기존의 할리우드 전쟁영화와는 달리 전투 장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처럼 느껴진다.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국의 정치적 속셈을 큰 소리로 외치는 목소리도 없고, 화려한 출연진이 캐스팅되었지만 특정한 영웅이 등장하지 않으며, 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필수적으로 끼워넣던 러브 씬도 없다.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내내 관객들은 실제 전쟁 현장에 와 있는 느낌에 숨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교한 영화적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에 도달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미국의 이기적인 시선을...
영화는 이 작전에서 전사한 미군 19명의 계급과 명단이 올라가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1천여명 소말리아 사람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19명 전사자들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 죽음 역시 전쟁의 참을 수 없는 비극을 드러낸다. 하지만 막강한 특전대와 델타포스에 맞서서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내린 약소국 소말리아의 50배가 넘는 사상은 왜 기억하지 않는가.
물량과 힘의 논리, 거기에 이기적인 시선이 혼합된 미국에 대해 한.미 정상 회담을 앞두고 지난 1월 28일 스크린 쿼터제 사수 의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 영화인들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들은 스크린 쿼터제는 할리우드 영화의 독점에 따른 대응, 문화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만큼 일시적인 시장 점유율이라는 산업 논리의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 라고 단언했다. 부시 방한 때 논의될 스크린 쿼터제 완화 문제는 우리측이 내릴 결단의 힘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주목할 만한 작은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미국 중심주의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금 미국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에서 열리는 있는 동계올림픽이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슬로건이 무색할 정도로 미국은 동계올림픽을 자신들만의 대회로, 집안 잔치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9.11 테러의 상징이라고 미국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찢어진 성조기를 앞장세워 진행시킨 개막식에서부터 그러한 징조는 확연했다. IOC에서 분명히 찢어진 성조기 게양을 불허했으나 올림픽이 미국의 애국심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며 강행함으로써 각국의 참가단은 원하지 않는 추모제에 참여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러한 미국의 결연한 오만감은 각 종목의 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겨스케이팅 페어 부문에서 러시아팀이 금메달을 딴 것에 반발하여 미국과 캐나다의 언론들은 9명의 심판 중 5명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냉전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논리로 밀어붙여 공동 금메달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USA투데이는 호외까지 발행하며 전쟁에서 승리한 듯한 호들갑을 피웠다. 하지만 쇼트트랙에서 벌어진 분명한 반칙에도 불구하고 남자 5000m 계주와 남자 1000m 경기에서 정확한 판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한국 선수들은 메달을 도둑맞았지만 미국 언론 어디에서도 그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쇼트트랙에서 새로운 영웅을 만들기 위해 안톤 오노라는 유망주에게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추던 미국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리라는 분석이 전혀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개막식에서 찢어진 성조기를 일제히 기립박수로 맞이하던 부시와 관중들의 열광은 왜 미국이 그토록 각국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쟁을 지속하려 하고, 애국자 법을 만드는 등 무리수를 강행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전체주의 국가에 흔히 드러나던 집단적인 광기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렇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드러나는 문제들 뿐만이 아니다. 위에서 든 사례들 외에도 얼마전 제작 중에 있는 007시리즈 20편을 찍기 위해 배우인 차인표에게 캐스팅 제의를 했으나 한반도의 상황을 왜곡시켜 표현한 대본을 읽고 과감히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정치적인 문제에 무관심했던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큰 호응을 얻은 이 이야기는 007시리즈 20편을 보지 말자, 라는 흐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 이 기사를 보고 아직은 희망이 있다, 라는 메시지를 지면에 옮긴 일이 있다. 하지만 과연 남아 있는 희망의 근거가 우리 모두에게 적용시킬만한 일인지 되묻고 싶다. 현재 청년 세대들의 미국에 대한 시각이 불투명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딴지를 걸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좋고 싫은 것에 대한 구분이 명확한 이들, 그래서 때로 자신의 선택을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모습에 대해 무작정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판단에 확고한 믿음을 보이는 것은 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의 판단이 일부 잘 알려진 몇몇 개별적인 사건들에 치우져 있고, 세련된 포장으로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는 미국의 숨은 의도를 보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부시 방한을 앞두고 사회의 전 분야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 나온 게임팩을 실행시키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분명한 잣대를 가져야 한다. 신문의 정치면은 보지도 않고 넘겨버리기 일쑤인 젊은 세대들이 무관심이나 지엽적인 화제들에 흥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주권자이자 한 시대를 이끌어갈 세대라는 것을 기억하고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진 시선으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부시는 방한을 앞두고 "햇볕 정책은 지지한다. 그러나 대량 살상무기 보유국에는 상응한 조치"라는 이중적인 적절한 언어(?)로 대처하며 일종의 립서비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초강대국의 대통령 부시가 우리에게 전달할 메시지는 <그러나> 뒤에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