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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여울에 꽃핀 저들
- 박권숙의 「빨래하는 여인들」
정미숙 문학평론가
건너야 할 생의 다리 아래가 환한 것은
물보다 더 슬픈 여울로 주저앉아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핀 저들 때문이다
건너지 못한 생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주름진 물의 솔기 찬찬히 펴다 보면
아를의 미친 고독도 맑게 헹군 꽃 몇 송이
건너가 버린 생의 다리 아래가 환한 것은
두껍게 칠한 웃음 한 겹씩 벗겨내고
투명한 제 울음만큼 꽃진 저들 때문이다
—박권숙, 「빨래하는 여인들」
박권숙의 시조 「빨래하는 여인들」을 읽는다. 「빨래하는 여인들」 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유화 「아를의 랑글루아다리와 빨래하 는 여인들」을 읽고 박권숙(1962~2021)이 남긴 상호텍스트적intertextuality 028 바깥의 창 슬픈 여울에 꽃핀 저들 —박권숙의 「빨래하는 여인들」 작품이다. 반 고흐가 담은 노동하는 여성의 풍경과 박권숙이 해석한 여성의 자리를 넘나들면서 우리는 예술적 상상력과 젠더 감수성의 폭을 넓힐 수 있을 듯하다. 노동하는 여성의 현실과 여성 노동 시간 의 주름을 살피는 시인 박권숙의 「빨래하는 여인들」은 공감과 연대 의 정동 미학을 한없이 풀어낸다.
먼저, 고흐의 그림 「아를의 랑글루아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을 살펴보자. 화폭을 크게 횡으로 이분하여 위/아래로 나눌 수 있다. 윗 부분은 하늘과 다리로 구성되어 있고, 아랫부분은 다시 종으로 이분 하여 우측과 좌측으로 읽을 수 있다. 우측에는 빨래를 씻고 헹굴 수 있는 아를 강이 흐른다. 오른편 아래를 돌아 퍼져 나갈 듯 부드러운 곡선의 아를 강은 하늘색 물빛과 부딪히며 눈부시게 푸르다. 좌측 구 석에 빨래하는 여인을 배치하고 있다. 원거리로 포착된 여인들은 뒷 모습만 보인다. 노동 중이라 몸을 숙인, 등만 보이는 빨래하는 여인 들은 하얀 여백인 양 조그맣다.
시인은 「빨래하는 여인들」에서 다리 위/아래를 구분하고, 다리 아 래 여인의 삶을 다리 위의 미래/현재/과거의 시간 감각에 따라 조망 한다.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핀” “고독도 맑게 헹군” “투명한 제 울 음만큼 꽃진” 여인들의 생을 추적하며 이는 그녀들 스스로 밝힌 환 함의 궤적이라 선언한다. 1연 “건너야 할 생의 다리 아래가 환한 것 은 / 물보다 더 슬픈 여울로 주저앉아 /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핀 저 들 때문이다”에서 여인이 처한 현실은 반어적 불일치로 드러난다. 건너야 할 생의 다리 아래가 환한 까닭이 여인의 슬픈, 표백된 그늘 에 있다. ‘환함’이라는 긍정적 언표가 “물보다 더 슬픈 여울로 주저 앉아 /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핀 저들 때문이다”와 연결되는 질서는 부조리하다. ‘슬픈 여울’ ‘주저앉아’ ‘표백된’ ‘그늘만큼’이라는 시어는 여인에 속한 어두움이다. 환함은 어두움을 내리깔고 주저앉은 여 인을 표백시켜 얻은 장물이다.
“건너야 할 생의 다리”에 서본다. “건너야 할 생의 다리”는 선택이 삭제된 필연적 운명을 말함이리라. 다리를 건너야 할 사람들과 다리 아래에 앉은 여인들 모두 각자의 운명을 사는 것이나 공평하지 않 다. 다리 아래 그녀들이 주저앉은 자리는 “물보다 더 슬픈 여울” 곁 이다. ‘여울’은 물살이 세게 흐르는, 노동 촉진의 물소리 드센 곳으로 세탁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시인은 ‘여울’을 물보다 더 슬픈 곳이라 하는데, 여인의 주저앉은 마음자리를 헤아린 것이리라.
박권숙의 도저한 통찰이 발현되는 대목은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 핀 저들”이다. ‘표백된 제 그늘’의 다의적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 다. ‘표백漂白’은 그녀들이 하고 있는 작업인 빨래와 자동 연관되면서 지워지고 있는 듯 희미한 여인들의 흔적 같은 존재감을 환기한다. 고 흐의 그림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얼굴을 알 수 없다. 굳이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일꾼이라는 변명은 정답에 가깝다. ‘얼굴’은 영 혼, 정체성을 상징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의 정 체성과 위상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돌아앉은 풍경으로 들어앉은 여 인들의 익숙한 구도는 불편하다. 여인들은 빨래를 빨며 자신들의 정 체, 기억, 고통을 환하게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지속된 슬픔은 누군 가의 생명력을 슬며시 앗아가 버린다. 슬픔은 사람들의 인격에서 가 장 훌륭한 요소를 없애버리는 독성과 같다.
그럼에도, 이 와중에 ‘꽃핀 저들’은 무엇인가. “표백된 제 그늘만 큼 꽃핀 저들”이라니! 박권숙은 와중에 그녀들이 자생적으로 찾은 생명 원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베풀어 내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스스로의 생명을 피우는 힘은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거두는 수확이다.
2연은 “표백된 제 그늘만큼 꽃핀 저들”의 증빙자료다. “건너지 못 한 생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 주름진 물의 솔기 찬찬히 펴다 보면 / 아를의 미친 고독도 맑게 헹군 꽃 몇 송이”에서 우리는 여인 곁으로 바싹 다가앉는 체온을 느낀다. “주름진 물의 솔기”를 찬찬히 훑는 시 인의 눈길은 물과 그녀, 옷가지들의 구분 없는 일체, 전언에 놀라움 을 금치 못한다. 여인들이 씻어내는 것은 더러움이나 오물에 그치지 않은 옷에 스민 타자들의 고독이다. 외로운 체취마저 말갛게 헹궈낸 다. ‘빨래하는 여인들’은 어느새 나와 너의 마음을 씻기고, 다독이는 돌봄 수행자로 진행 중이다. 이러한 화해와 깊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 일까. 그녀들이 그들에게서 자신들을 닮은 고독의 냄새를 맡을 수 있 었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후각을 ‘공감 감각sens de la sympathie’이라고 하며 혹은 ‘친화력의 감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인들 은 옷깃에 스민 타자들의 고단함과 비릿한 고독의 체취를 맡고, 그 들의 애환을 덜어낼 향기 나는 꽃, 사프란saffron이 될 수 있지 않았을 까. 찌든 냄새를 표백하듯 맑게 없애는 작업을 하며 여인들은 자신 들의 고단한 삶과도 거리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삶은 흐름을 타듯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박권숙의 심원한 여 성주의의 순도純度는 여기에서 발원한다. 특정의 모성, 어머니에 속 한 여성주의가 아닌 우리 삶의 애환을 품어 풀어내는 공감과 이해의 물꼬 중심에 노동하는 여성, 돌봄 수행자 ‘빨래하는 여인들’의 표백 선언이 있다.
3연에 이르면 한 생을 통과하고 꽃 진 여인들의 안부를 듣는다. “건너가 버린 생의 다리 아래가 환한 것은 / 두껍게 칠한 웃음 한 겹 씩 벗겨내고 / 투명한 제 울음만큼 꽃진 저들 때문이다”에서 우리는 031 바깥의 창 울음만큼 투명한 그녀들의 애잔한 생의 진실을 목도한다. 이곳에서 그토록 궁금했던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듯한 착시에 든다. “두껍 게 칠한 웃음”이 ‘짙게 화장한 얼굴’로 다가온 것이리라. 그러나 화 장한 여인도 두껍게 웃음을 칠한 여인도 없다. 시의 맥락을 따를 때 여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아를강의 푸른 물을 따르듯 빨래를 하며 스 스로를 한 겹씩 벗겨내며 살아 내었기 때문이다. 아를 강과 고독의 헹굼 그리고 자신의 벗겨냄은 자연의 그것인 양 흐름을 느낀다.
그러나 정녕 이 시간이 자연스레 얻어진 것일까. “투명한 제 울음 만큼 꽃진”은 반증의 단서이다. 웃음과 울음은 둘 다 인간이 갖는 고 유의 속성이다. 두껍게 칠한 웃음의 개인적 욕망과 방어적 전략을 모 두 벗고 아를 강을 따르듯 투명한 제 울음으로 향긋하게 사라진 여 인들의 결단은 우리 곁을 휘감는 사랑의 고백이다. 존재를 흐릿하게 지울수록 각인되는 역사이고 기억이다. 물을 닮은 물 같은 여인이 있 어 우리는 날마다 새롭고 환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박권숙 시조의 성취는 읽을수록 깊고, 새롭다. 3연의 시조를 읊조 리면 슬슬 풀려 만장의 편지로 쌓여가는, 등을 돌린 채 주저앉은 그 녀를 느낀다. 시조, 현대시조에 대한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문학 혹은 예술은 예술가의 체험과 통찰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자기 안에서 나온 육화된 언어일 때 개성적이며 생동하 는 시조를 창작할 수 있고 이는 다시 갱신되는 시조의 매혹으로 이 어질 것이라는 믿음’에 동의한다.
정미숙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집요한 자유』 『한국여성소 설연구입문』과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 『페미니즘 비평』 『음식문화와 문화동 력』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