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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꿈꾸는 세계
안유환
삶의 패턴 중의 하나는 이사하는 것이다. 자라나면서, 낡은 집을 떠나, 학업과 직장을 따라, 사람들은 그때마다 새집이나 낯선 터전으로 옮아간다. 수몰지에서 쫓겨난 주민들과 지역개발에서 밀려난 사람들도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주하고,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끊임없이 방황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삶의 패턴은 여행이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 시간을 내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영혼의 심호흡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큰 활력을 공급한다. 이사하면서 그 지역 습속을 익히고, 여행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배운다. 이러한 발걸음이 그들이 머무는 땅을 새롭고 아름답게 가꾸어간다.
소설 쓰기를 생각하면 이사와 여행이 떠오른다. 나의 첫 직장은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다음엔 수필 쓰기로 나아갔고, 그리고 시를 지으면서 글쓰기의 삶을 어느 정도 목회와 병행했다. 내 삶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목회를 마치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일기를 쓰고 잡문을 끼적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글쓰기는 나의 생활 속에 스며 있었던 것 같다. 철이 들면서 표지가 낡은 동화집이나 교과서에 실렸던 동요나 시들을 읽을 즈음 ‘두꺼운 소설책’도 눈에 띄었다. 그때 보이던 소설들은 거의 장편 소설이었다. 이광수의 『흙』은 표지에 마치 흙이 묻은 것처럼 낡고 지저분했다. 아마 읽히면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리라.
소월 시집 『진달래』는 마음이 끌리고 이해하기도 쉬운 편이었다. 재미를 붙이면서 시가 좋아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면 차츰 어려워지고 무슨 말인지,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접하는 소설은 시보다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읽으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동화보다는 더 깊은 재미도 있었다. 심훈의 『상록수』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피폐한 농촌의 상황에 절실했던 그 ‘운동’은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손이 닿는 대로 여러 권의 소설을 읽었으나 지금까지 가장 뚜렷이 인상 지워진 것은 박계형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과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정도이다. 대체로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문학에 대한 작은 관심은 나의 ‘농촌에의 꿈’을 이기지 못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몇 차례나 이사를 거듭했다. 농부의 꿈에서, 신문기자로, 목회자로, 그리고 목회를 마치고는 다시 글을 쓰는 자리로 돌아왔다. 느지막이 소설을 쓰면서 사춘기를 전후한 시절에 막연히 소설을 써보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소설을 써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뜻밖에 숙명처럼 다가온 시를 쓰게 되면서, 울림이 큰 시를 써보는 것이 내 은퇴 후의 꿈이 되었다.
‘신중년’에 남는 것은 시간이었다. 여행하거나 글을 쓰는 것 외에 ―5~6년 텃밭을 가꾸기는 했으나― 더할 일이 없었다. 시는 알아갈수록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시를 제대로 잘 써보기 위해 사이버 대학 ‘문예창작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내게 문학의 장르는 모두가 매력적이었다. 별 부담 없이 즐겨 수필을 썼고, 심혈을 기울여 세 권의 시집도 출간했다. 문학은 언제나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시를 공부하면서 소설의 과제물도 제출해야 했다. 소설 공부에서 맨 먼저 맞닥뜨린 것은 ‘왜 소설을 쓰는가’라는 문제였다.
ㅡ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에 대한 적극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왜 우리는 소설을 쓰고, 쓰려고 하는가.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소설은 어떤 의미이며 그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 내게는 과연 소설을 쓸만한 재능이 있는가……질문은 끝없이 계속되어야 한다.ㅡ
맨 처음 주어진 과제물은 김훈의 「화장」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운명하셨습니다.”란 서두에 긴장하면서 나는 절박했던 상황을 더듬어 내려갔다. 50대의 성공한 직장인이 겪는 가정적 어려움은 아내라는 위치가 남편에게 또 하나의 지주라는 생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나는 소설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갈라지고, 빌딩의 옥상 간판들 사이로 내려앉는 저녁 해가 당신의 목걸이에 비쳐, 목걸이 구슬마다 해는 저물었습니다. 사위는 잔광 한 줌씩 거두어가면서 구슬 속으로 저무는 일몰은 위태로웠습니다.…···”
‘야-,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그때 혼자서 내뱉은 감탄의 말이다. 이 문장 앞뒤의 한두 페이지는 사랑을 노래한 산문시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죽어가는 아내와 딸 같은 신입사원 추은주와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사랑의 감정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청준의 「눈길」, 이문열의 「금시조」,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등의 과제물을 제출하면서 나도 소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강하게 일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누구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 체험적 사실을 소재로 할 때 좋은 소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쓰는 이가 신명이 나지 않으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습니다.” 교수의 가르침을 따라 애를 썼지만 내 등단작 단편소설 「텃밭」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맨 처음 C 문예지에 제출한 내 원고의 추천 심사를 맡았던 H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적어 보냈다.
“……우선 문장이 다듬어졌다는 점에서 신뢰가 갑니다. 그리고 문제의식도 신선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데서 작품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도하는 주제와 관련된 상황이나 모티브만 선택해서 재구성했으면 합니다. <텃밭>에서, 주인공의 목회 사역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이면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데서 빚어지는 갈등을 소설의 문제로 삼아 그것을 집중적으로 추구해 나가면 좋은 작품이 될 것입니다.……목회자로서, 아내 아닌 다른 여성에 대한 감정이, 불순하지 않더라도 아내와의 갈등을 빚게 되는 그 과정에 주인공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가는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작품은 목회자의 그러한 갈등을 통해서 인간의 진실한 단면을 드러내면 족하겠지요. 인간의 진실은 도덕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아내가 이해하는 결말로 처리한다든지, 더욱 혼란스러움으로 처리하든지, 주제의 문제입니다. 다시 읽어보시면 생각이 많이 나실 것입니다. 초면에 난삽한 말로 목사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았나, 두렵습니다. 내내 평안을 빕니다.” 이러한 도움말을 읽으며 어떻게 소설을 다듬어 갈 것인가, 아득했다.
나는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그분의 조언을 따라 고친 작품을 보냈으나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라는 주문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원고를 다시 보냈으나 심사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첫 번째 추천에서 실패했다. 나는 사이버 대학에서 소설실기를 지도했던 소설가 S 교수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분은 격려 조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자상한 조언을 보내왔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제게는 낯선 목회자의 생활이 신선한 독서였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공모전에 응모하신댔으니 주제 의식이나 표현에 딱히 제가 첨언할 게 없을 듯합니다.……일인칭 화자인데 정황 설명에 비해 심리묘사가 부족한 점이 우선 눈에 띄었습니다. 화자가 어떤 방식으로 목회 활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나타나는데 그 과정에서 '갈등'의 시작점들이 강렬하게 드러나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야 할 갈등은 실제 사모와 J 집사의 관계쯤이 될 듯한데, 그 갈등이 충분하게 묘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을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옮긴 것으로 갈등이 봉합된다면 '구성'의 측면에서 볼 때도 그리 매끄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시험에서 피하려는 의지와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려는 운명 사이의 대결은 언제나 흥미로운 법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갈등이 심화되지 않은 채 마무리되는 듯합니다.……반드시 화자와 J 집사가 파국을 맞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가 섹스를 하지 않아도 그 어떤 소설보다 에로틱하듯이 화자와 J 집사 사이에 소통되는 감정들이 좀 더 세밀하고 섬세하게 묘사될 필요는 있을 듯합니다. 남녀 사이에 흔히 그럴 것이라고 여겨지는 표현을 넘어 영혼의 떨림을 반영할 수 있는 묘사들에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이셨으면 합니다.”
H 교수와 S 교수의 도움말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S 교수의 말을 따라 심리묘사를 보충하고 주제와의 연관성이 적은 부분들을 대폭 덜어내며 정리를 했다. 퇴고한 원고를 다시 S 교수에게 보냈다. 그는 내 원고를 읽고 다시 “갈등과 긴장이 너무 늦게 등장한다. 설명이나 해설을 줄이고 보여주기를 늘려야. 전개되는 사건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는 내용의 긴 편지를 보내왔다. 그분은 그때 한국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6개월 동안 튀르키예(터키)의 앙카라 대학에 머물고 있었다.
원고를 퇴고하면 할수록 고쳐야 할 것이 계속 눈에 띄었다. 큰 기대를 안고 문협 문예지의 공모 요강에 따라 세 편의 단편소설을 제출했다. 편집자 측에서는 심사 결과는 알려주지 않고 뜻밖에 ‘당선조건’으로 제시했다. 나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두 번째 등단 시도도 불발로 끝났다. 얼마 후 우연히 신생 문예지에서 ‘신인상 공모’ 광고를 보고 투고한 것이 당선 소식을 안고 돌아왔고, 앞서 요구받았던 만큼의 상금을 받은 것이 위로가 되었다. 나의 소설 등단은 고희의 선물이었다.
나는 등단 4년 만에 첫 소설집 『둥근별』(2016)을 상재 했다. 그때 내 신학교 동기인 L 목사(전 대학교수, 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표사를 써주었다. “30여 년 전 나는 안유환을 광나루 선지동산에서 만났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목양의 길을 가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졸업 후 10여 년이 지나 그가 시를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시편들은 울림의 파장이 큰 것이었다. 더 오랜 세월이 흐르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소설집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소설 쓰기는 어려운 작업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뭇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다름아니다. 쓰고 나서도 여러 사람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혀야 한다. 안유환 작가의 소설은 이 둘을 다 충족시켜주고 있다.” 이것은 내 어설픈 소설에 대한 격려와 덕담이었다.
나는 이듬해 두 번째 소설집 『그는 언제나 맨발이었다』(2017)를 출간했다. 이때쯤 소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으나 선배들이 중편이나 장편을 쓰는 것을 보면 갈 길은 너무도 먼 것 같았다. 몇 편의 중편을 쓰고나서 2년이 걸려 첫 장편 『주네브행 열차』(2021년)를 출간할 수 있었다. 소설 쓰기는 이론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써보는 것이 깨달음을 더해주었다. 장편을 쓰기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편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 소설 같은 건 쓸 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움을 견디고 나자 어느 정도 소설 쓰기가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듬해 세 번째 소설집 『하이네 자서전』(2022)을 출간했다. 이곳저곳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다가 처음으로 기획출판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등단 10년 만에 내게 주어진 은혜였다.
어떤 일이나 계속하면 다소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소설 쓰기는 그렇지 않았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남은 땅은 점점 줄어들 것이지만 소설의 영토는 발을 들여놓고 보니 끝없이 넓은 세계였다. 세계적 석학이자 이탈리아의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서사는 다른 무엇보다 우주가 탄생하는 사건이다. 무언가를 서술할 때 우선 작가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 즉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 세계는 최대한 정밀하여 스스로가 그 안에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전날의 섬』을 준비할 때는 소설의 배경이 된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찾아 남태평양을 향했고, 시시각각 물과 하늘의 빛깔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 물고기와 산호들의 색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했다. 2~3년간은 당시 선박의 모형과 그림을 공부하면서 선실이나 벽장 등이 얼마나 컸는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오갔는지 연구했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도 “가장 훌륭한 소설은 바로 그들의 우주를 그 속에 지니고 있는 것, ……사람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라 말했다. 소설의 우주는 작가의 마음속에서 태어난다. 소설의 정의는 그 구성만큼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란 “사실이나 허구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이나 구성력을 가미하여 산문체로 쓴 문학의 한 갈래”로 풀이한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말했다. “소설은 현대의 문제적 개인이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의 형상화이다.” 스탕달은 『적과 흑』에서 “소설이란 (어깨에 메고)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다”고 말했다. 채롱에 담긴 거울은 푸른 하늘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은 거울이 아니라 ‘렌즈’라고 말했다. 에코는 소설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비추는 게 아니라, 나름의 인식 도구를 이용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풀이했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견해와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탕달의 ‘거울’은 소재의 선택에 대한 작가의 변명이지만 에코의 ‘렌즈’는 서술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영토에 들어선 지 십 년이 지났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론보다는 계속해서 써보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려고 하면 여러 생각들이 여울처럼 한데 어울려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을 때도 있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으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고, 사건이나 사고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처음의 상황을 밝혀내야 한다. 소설은 무엇이며 어떻게 쓰는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이다.……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이다. 내가 쓸 문장을 한편의 그림처럼, 내가 쓸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떠올리려고 애쓴다. 소설은 일상의 작은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 약속했던 감춰진 진실로, 중심부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는 “쓴다는 것은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의 단어를 가지고 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말했다.
안유환:《한국동서문학》등단. 소설집『둥근별』 『그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하이네 자서전』, 장편소설『주네브행 열차』. 시집『그림자의 귀향』. 수필집『마음을 건드리는 노래』. 에세이집『발틱해의 일출』 등 10여 권. <광나루 문학상> <부산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부산 크리스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