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를 타면 대체로 미리 정해진 목적지에 도착해서 열차에서 내리게 된다. 기차역은 열차가 도착하면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그리하여 기차를 타고 도착역에서 같이 내리지만, 이후에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 각자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이 시집의 제목을 보고 문득 기차를 탔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해본 단상이다. 물론 시인은 함께 탔던 ‘우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아마도 그 표현에는 시인과 동행했던 이들이 열차를 같은 곳에서 탔지만 내릴 때는 각자 다른 곳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그 문장이 우리네 인생을 비유한 것이라면, 때로는 ‘우리’라고 지칭되었던 이들도 결국에는 각자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시집을 훑어보면서, 시인이 제목으로 삼은 표현이 <경춘선 폐역에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구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춘천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시인에게 이제는 기차가 서지 않아 폐역으로 바뀐 간이역들에 대한 추억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추억 속의 그 시절에 서울로 출퇴근 혹은 등하교를 하던 많은 이들은 경춘선 열차를 이용했고, 새벽이면 ‘상행선 새벽기차’를 탔던 사람들의 모습을 시인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무거운 눈꺼풀로 만나는 푸른 견인차
기차에 오르는 교복과 책가방, 봇짐과 광주리
무임승차한 동네 소문들
기차는 우리를 같은 곳에 내려놓지 않았다
선로의 평행은 동행이 아닌
영원한 어긋남이었을까
(<겅춘선 폐역에서> 부분>
일이 있어 새벽에 길을 나서며 탔던 버스나 기차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일찍부터 몸을 움직여야만 했던 탓에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잠시라도 눈을 감고 안식을 취하려고 하기에, 같은 공간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유조차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시인은 그러한 상황에서 ‘상행선 새벽기차’의 같은 공간에 있지만, 도착역에서는 각자 열차에서 내려 흩어지는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았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추억의 장면으로만 기억될 뿐이며, ‘왜 과거는 아름다울수록 아픈지’ 깊은 상념을 안겨줄 뿐이라고 하겠다.
시집에 앞부분에 수록된 작품들의 제목이 <틈>과 <벽>이라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시인은 ‘창틈으로 새벽 스며들 듯 / 빈틈으로 사람다워지는 찬란한 틈 / 그 틈새로 세상이 열’리기는 기대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울러 ‘열리지 않는 / 문 앞의 망설임은 또 하나의 벽’으로 형상화되듯이, 시인에게 세상과의 소통이 벽처럼 막혀있는 현실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대’ 혹은 ‘너’라는 표현이 많은 작품들에 등장하는데, 대체로 시인과 ‘그대’ 혹은 ‘너’와 만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러한 답답한 상황이 ‘벽’ 혹은 ‘틈’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4부에 수록된 시들을 통해서, ‘틈’을 갈망하고 세상과의 ‘벽’을 절감하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들로 왔다 먼저 간 푸른 낙엽’(<분기점>)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로 인한 상실감이 원인이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4부의 시들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절절한 시어들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파에 모로 누워 TV를 본다
설거지 하던 아내
어느새 다가와 눕더니 날 끌어안는다
소리 죽여 울고 있다
(중략)
TV에 눈을 두는 것이나
손에 물 묻히는 것이나 쓸데없이 딴짓하기는 매한가지
멍한 마음이 모래성같이 허물어지는 것
저나 내나 무엇이 다르랴
(<아내의 설거지> 부분)
작품에 그려진 상황을 통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시인에게는 이 시집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게 바치는 ‘조사(弔辭)’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기에 내내 울적한 심정을 달랠 수 없는 심정을 시로 담아냈고, 누군가의 위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세상과의 ‘벽’이 그렇게 견고하다고 느꼈을 법하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기에,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지라도 작품에 형상화된 시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새롭게 창작되는 시들이 시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수단이 되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