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4, 박시백, 휴머니스트, 2005.
조선시대의 왕 가운데 세종은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장영실을 비롯한 신하들과 더불어 많은 기기들을 창안하고, 특히 한자를 빌어 섰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안한 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쉽지 않았지만, 부왕인 태종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세종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정책을 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반면에 뛰어난 자식들을 모두 보호하려는 생각은 후대에 아들인 수양대군에 의해 손자인 단종이 끝내 왕위에서 쫓겨나도록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세종 이전에는 모두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식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퇴위한 왕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전개되었다. 태종도 형식적으로는 자식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임금 위의 임금’이라는 ‘이중 권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태종이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왕으로서 홀로 서기를 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세종의 적극적인 개혁이 시도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도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는 해시계와 물시계 등의 발명품과 훈민정음의 창제는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집권자의 가장 큰 덕목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자신의 통치행위에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청렴하다고 알려진 황희의 경우 실록에는 그렇지 못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24년동안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음을 반증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북방개척의 주역인 이징옥과 김종서의 활약으로 위축되었던 영토가 한반도의 전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고, 뛰어난 음악가인 박연의 활약으로 음악제도가 정비되는 등 세종의 시대는 그야말로 모든 꽃이 제자리에서 활짝 피어났던 이른바 ‘백화만발의 시대’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31년 동안 재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이 숨을 거두자 장남이었던 문종이 즉위하였고, 세자로 있었던 오랜 기간에 걸맞지 않게 불과 2년 3개월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준비된 세자였으나 왕위에 있던 기간이 너무도 짧아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사후에 어린 아들이 동생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불행을 겪엇던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단종과 세조 연간에 벌어졌던 비극적 사건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하겠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