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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8~23)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제 로마서 서론이 장장 스물 세편의 설교로 모두 끝나고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국면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부터가 본론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로마서 서론 부분에서 로마서 전체의 개괄적 내용을 공부하셨기 때문에 오늘부터는 조금 큰 묶음으로 설명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어떠한 내러티브로 흐르고 있는 지를 잠깐 말씀을 드리자면, 사도가 로마에 가서 무슨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을 전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로마교회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이 전해주고자 하는 복음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쓰인 책이 로마서라 했습니다. 사도는 간략한 인사를 마친 후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에서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를 하고 18절부터 구체적 설명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로마서 전체의 대 주제가 뭐였습니까?
(롬1:17)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진 자만이 산다.(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인간들의 의, 인간들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공로 등으로 만들어진 의는 절대로 사람을 살려 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들의 믿음을 창조해 내는 형국으로 구원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인 18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 맨 앞에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16절과 17절 앞에도 들어가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15절, 즉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하고 16절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왜냐하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행함이 아닌 믿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 인고 하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왜냐하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18절부터는 ‘왜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변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당연히 죄 론을 먼저 끌고 들어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구원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1장 18절부터 시작된, 죄인들을 향한 검사의 논고가 3장 20절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의 죄까지도(모든 인간) 낱낱이 폭로를 한 검사가 마지막 부분에서 뭐라고 논고 요약을 하는지 보세요.
(롬3:9~18)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 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진 죄인일 뿐 아니라 교회로 부름을 받은 너희도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뭔가 남달라서, 특별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해 주고 싶어 했던 복음의 핵심이자 뿌리였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고 붙였는데 이 제목은 19세기 전 세계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유명한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설교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예배당 안에서 지옥을 보았고 어떤 이는 그것이 너무 무서워서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부에 있을 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설교 문을 처음 입수해서 읽어보고 저는 조금 실망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설교 내내 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협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복음을 강조하기 보다는 ‘죄를 버리지 않으면 다 망한다’에 초점이 있는 거 같아서 조금 실망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협박조의 설교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바울은 지금 죄 론을 펼치면서 협박을 하기보다는 ‘왜 하나님의 의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 론을 펼치고 있지만 인간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다 죄인으로 선고를 내린 후에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준비 되었다’라는 복음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절대 겁을 주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수신자는 이미 구원을 얻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조나단 에드워드의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야 너희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값없는 의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자기 힘으로 구원의 과정에 무언가 보태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의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임을 알고 경계하라’고 로마교회의 인본주의를 향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구원의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지 절대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대주의와 율법주의가 여전히 편만하게 퍼져있었습니다. ‘그래도 뭔가가 다른 게 있으니까 내가 구원을 얻은 거지’ 혹은 ‘이렇게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내 행위로 이 구원을 지켜야지’라는 그러한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주의는 반드시 파당을 생성케 하고 분열을 초래하며 차이를 따른 우열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그게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였잖아요?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그리스도파니 그러면서요.
사도 바울은 지금 그것부터 깨부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의해 거저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를 ‘죄 아래 있는 자’로 기소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어진 용서라는 ‘하나님의 의’를 오롯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부터 시작되는 긴 죄 론을 3장까지 이어가면서 결론 부분에 가서 선언을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은 로마 교회 너희도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에게 값없는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이 죄 론의 결론부분인 3장 19절부터 28절까지를 보시면 사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길게 인류의 죄악을 나열하고 나서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롬3:19~28)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잘 보세요. 사도 바울이 거의 세 장에 걸쳐서 인간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을 한 후에 ‘그런데도 너희가 율법, 즉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 운운 할 수 있니?’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장 17절에서 확인도장처럼 찍어버린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에 대해 구체적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들의 죄악상을 그렇게 길게 나열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긴 죄 론의 초점은 ‘야, 너희들 똑바로 안 살 거야?’가 아니라 ‘너희들이 그 모양이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선물해 주신 거란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절 한 절 해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 인간들이 스스로 쌓는 의를 박살내고 있는 중임을 잊지 마시고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먼저 18절입니다.
(롬1:18)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바로 위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한 사도 바울이 18절에서 하나님의 의의 대척점에 있는 불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냅니다. (지금 이 편지가 다른 사람이 아닌 교회에 전달된 편지라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로마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무언가를 부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을 함으로 해서 당시 초대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영지주의자들의 보편구원론부터 깨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보편적 부성인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지옥도 없고 모든 존재는 다 보편적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단박에 박살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떨어진다고 해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막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진리를 막는 것이 불의라고 하는데, 그 불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진리는 헬라어로 ‘알레떼이아’입니다. 그 단어는 영어로 ‘truth, true thing’으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체, 진짜 원형’이런 뜻으로 번역을 하면 얼추 맞습니다. 구약 시대에 그림자요 예표로 설명되던 것이 신약 시대에 실체로 나타났지요? 히브리서의 논지를 따르면 구약 사람들에게는 증거는 주어졌지만 약속의 실체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의 실체가 뭐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똑같은 단어를 쓰신 적이 있습니다.
(요4:24)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여기서 진정으로 번역이 된 단어가 ‘알레떼이아’입니다. 진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인들의 그리심 산 둘 중에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냐고 묻자 예수께서 답하신 내용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인간 행위의 추악함과 불가능함을 모형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자기 구원에 이르려 하는 모든 인간들의 행위가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우는 그런 여자의 행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 남편을 수시로 바꾼 거잖아요? 그게 모든 인간들의 구복의 지향성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 등에 의해 몇 가지 죄 목들을 상정해 놓고 거기에만 걸리지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교묘히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걸리는 여자가 바로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율법주의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자격과 조건을 소유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구원하시려고 사마리아까지 급히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급하게 서둘러 가셨으면 도착하자마자 우물가에 주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모범으로 행했던 제사 자체를 부정해 버리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꼭 성전에서만 드려져야 했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 말은 성령을 받은 자는 성전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제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요? 이제 자기 자신이 성전이 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제물도 소나 양으로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가져 올 필요가 없고 예수라는 제물이 자기 대신 바쳐졌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로 모형 되었던 자기 자신을 ‘진리’ 즉 ‘실체, true thing’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14:6)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6:13)
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17:17~19)
17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 이니이다
보시다시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될 하나님의 뜻,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변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진리로만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을 풀면서 예수와 십자가 이외의 다른 교훈을 던지는 모든 설교가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증을 서지 말라’는 잠언의 말씀을 교훈으로만 읽게 되면 ‘보증은 성경도 금하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보증은 서주지 말라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맞는 거구나’이렇게 해석을 하여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아니 성경이 무슨 효율적 처세술에 관한 책입니까?
(잠22:26)
26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이 말은 잠언 27장의 말씀으로 풀려야 합니다.
(잠27:12~13)
13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 지니라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보증이라는 게 뭡니까? 그 사람이 갚지 못하면 내가 대신 갚겠다는 서약이요 결단입니다. 인간들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보증을 서신 것입니다. ‘저 아이들이 못 갚을 거 제가 대신 갚겠습니다.’ 그걸 구속이라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이며 그게 창세 전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고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사건 기억하시지요? 그게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이 언약이 깨지면 내가 홀로 쪼개짐으로 그 빚을 갚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이 십자가에서 실현이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저마다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도 진심어린 보증을 설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보증 삼아 결국 그 아들의 목숨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예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하는 것이 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경을 그저 도덕책이나 윤리강령, 혹은 처세술에 관한 책으로 여기고 거기에서 교훈만을 얻어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의 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거기에다가 인간의 의를 자꾸 보태려 하는 것이 진리를 막는 것이겠지요?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만 진짜 의이고 그 의를 소유한 자만 산다’는 말을 전체 주제로 박아 놓고 18절에서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기 의 쌓기, 유대주의, 율법주의를 하나님의 진노로 멸해져야 할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불신자에게 주어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독자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예수를 잘 못 믿고 있다고 판단이 되는 어떤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특징인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불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 ‘아세베이아’의 반대말이 ‘드레스케이아’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경건’이 되겠지요. 그럼 경건이 뭔지를 알면 불 경건이 뭔지를 알게 되겠지요? 그 경건의 정의에 대해서는 야고보 사도가 아주 잘 내려놓았습니다.
(약1:26-27)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 이니라
경건이 뭡니까? 자기 혀를 재갈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걸 단순히 험담을 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며, 술 담배 안 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 정도로 이해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바로 이 어절 다음에 어떤 어절이 오는지 보세요.
(약2:1)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경건입니다. 거기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사라지고 불쌍하고 약한 사람을 말 그대로 약자로 보지 않게 되는 그런 행동양식이 도출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지 자신들의 자격이나 조건을 근거로 구원에 이른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인데 누가 누구를 가리켜 잘 났다 못 났다 판단하며, 누구는 자격이 있다 없다 논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고 지금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로 말미암아 이렇게 구원받은 자입니다’라는 자각이 있는 자가 어떻게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으며 남의 죄나 허물이나 약점을 공격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험담하지 말기, 구제하기, 순결하게 살기가 아니라 ‘너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 아니? 너 정말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 맞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이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의미를 잘 알고 그 은혜를 꼭 붙드는 면목 없는 성도의 자기 부인의 자세 및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 경건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믿음이라는 것을 자기가 생산해 내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대견한 자신을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폄훼하는 그러한 오만불손을 불 경건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이 된 상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불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이 되지 않은 자들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불 경건의 상태를 성령 훼방이라 하셨고 그들은 절대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2:24~32)
24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보세요. 분명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라는 게 있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불 경건과 불의라고 했고요.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몰아붙인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마귀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마귀로 보이는 게 맞아요.
차치하고 귀신들림이나 질병은 죄로 말미암게 되는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망을 격파하시고 그들을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내심으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내십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가 육신을 입고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지실 십자가가 무엇을 성취해 낼 것인가를,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는 사역을 통해 모형 적으로 힌트를 해 주신 것입니다. 그건 구원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린 자들이나 병자들이나 모두, 자신들의 요구나 자격이나 조건이나 됨됨이나 열심에 의해 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긍휼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건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 시작되고 완료되는 것임을 모형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었고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자격과 조건을 구원의 전제로 꼭 붙들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귀신들린 자나 병자는 저주받은 개로 여겨졌습니다. 자기들과는 달라 보였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들 같은 경건하고 훌륭한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이니 ‘마귀의 자식’이니 욕을 하시면서, 자기들이 저주받은 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귀신들린 자들이나 질병을 가진 자들은 막 고쳐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마귀의 왕이라 부른 것입니다. 마귀 들린 자들을 고치는 마귀의 왕.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마귀가 마귀와 싸우겠니?’하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다른 이들을 함부로 폄하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성령 훼방을 하고 있고 그 죄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따지고 들어오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그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다시 재 정의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격 있고 능력 있고 됨됨이 훌륭한 자들이 모여서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들이 성령의 힘으로 산 자가 되는 나라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을 보시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를 성령의 힘으로, 은혜와 긍휼을 부어 무상으로 고쳐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 편이요, 바리새인들처럼 인간들은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훌륭한 행위와 공덕을 보태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반대편에 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셨지요? 그건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고 그래서 아직 성령이 인간들 안에 내주하시는 신약의 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지 않은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오해하여 ‘네가 무슨 메시아냐?’라고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성령이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시작하는 오순절 이후의 현실 속에서 성령에 의해 무상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고 여전히 인간들의 외모와 행위로 구원을 이해하고 인간들을 판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라는 무서운 경고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전형적인 불 경건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들이나 그런 경향들이 없나요? 우리 남 이야기하고 남 판단하는 거 너무 재미있어 하지 않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남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나의 가치 챙기기’ 아닌가요? 남을 모함하면서, 헐뜯으면서, 심지어 칭찬을 하면서까지 우리는 우리의 괜찮음과 훌륭함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으로 그 이야기를 먹어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긍정해 보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상위 자리 점령을 위해 다른 이들을 폄하하고 폄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지옥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 목사님이 몇 년 전 이혼을 하고 담임하고 있던 그 큰 교회를 사임하시고 산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다가 얼마 전 이 근처 교회로 복귀를 하셨습니다. 저는 내심 아주 반가워서 식사라도 함께 하려고 시간을 보고 있는데 제 귀에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리들이 ‘어떻게 이혼을 한 목사가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느냐?’는 고자질이었습니다.
여러분, 이혼한 사람은 설교하면 안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이혼하고 세상과 재혼한 사람들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리 한 호멜 반과 은 열다섯으로 우리를 사러 내려오신 것이 구원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이혼이니 삼혼이니 운운하면서 자격을 논해요? 그러면 이혼한 사람은 교회에 절대 오면 안 됩니까? 아니잖아요? 근데 왜 목사는 이혼하고 설교하면 안돼요? 목사가 자격 있어 되는 겁니까? 아무리 쓰레기 같은 자라도, 아무리 길 가에 구르는 돌보다 못한 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짜 능력이 나타나는 것 아닐까요? 도저히 자격 없는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잡히니까 그 입에서 복음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이 말한 약할 때 강함 되심이잖아요.
한 발 더 나아가 볼까요? 동성애자는 설교하면 안 되나요? 어떠세요? 만일 제가 세상에 알려진 동성애자라면 여러분 여기에서 설교 듣고 앉아 계시겠어요? 동성애는 죄 맞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구약의 계명이 다 지키라고 주었던 것인가요? ‘너희는 못 지키니까 내가 예수라는 의를 너희에게 보낼 거야’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율법이잖아요? 그게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의 죄 론의 결론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동성애를 비롯한, 사건화 되어 나타나는 여러 가지 죄의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법 적으로 인간들이 합의 하여 금한 것을 기어코 해 버리는 것을 죄라고 하나요? 하나님의 진노는 그러한 것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불의로 막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불완전하고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떨어진다니까요.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기려 하는 모든 사유와 시도를 다 죄라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 중에 죄 아닌 게 있나요? 심지어 숨 쉬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숨조차도 나의 목숨을 위해 들이 마시고 내 쉬고 하잖아요? 이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숨을 쉬는 사람 있으면 손 좀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게 피조물의 제자리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기를 위해, 자기의 생존이나 자기의 가치나 영광이나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어떤 생각이나 행위를 하는 것이 다 죄란 말입니다. 그건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생각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살인을 하고 있고 매일 매일 간음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살인자들이 동성애자보고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감히 손가락질을 하냐고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단 한 가지도 끊어낼 수 없는 그런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술이나 담배조차도 우리 마음대로 못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 동성애자들이 왜 숨어요. 왜 드러나지 않으려 하지요? 자기들도 부끄러워서 그래요. 부끄럽다는 건 이게 옳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끊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집착이, 중독이 자기 마음대로 어거가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끊어내지 못하는 여러 가지 습성이나 버릇이나 중독이나 집착 때문에 우리도 고통스러워하잖아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긍휼 운운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왜 몇 가지 항목만을 죽을죄로 상정 해 놓고 거기에 걸린 사람들만 악당이라고 욕들을 해 대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욕을 함으로 해서 ‘나는 적어도 그런 죄는 안 짓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챙겨갖기 위함 아닙니까?
남 이야기 하지 마세요. 남 판단하지 마세요. 그건 살인 행위입니다. 아니 칼로 누구를 찌르는 것보다 배나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 남에 대한 평가이며, 판단이며, 험담이라는 거예요.
(약3:5~11)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혀는 쉬지 않는 악이요, 가장 무서운 청산가리 같은 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치면 사람이 서서히 말라죽어 갑니다. 차라리 칼로 한 번 찌르면 한 번에 죽을 수 있지만 혀로 사람을 찌르면 마치 생살에 염산을 부은 것처럼 서서히 살과 뼈가 타 들어가 죽습니다. 이 중에도 지금 그러한 사람들의 혀의 공격에 의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인간들의 불 경건의 혀에 의해.
제가 목회를 시작하고 공황 장애라는 병을 얻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 즉 공황발작(panic attack)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외부의 공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 일이 일어났을 때와 똑같은 방어 오더를 뇌가 몸에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고, 열이 한 없이 올라가고, 공포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호흡 곤란 증세가 오며, 잠을 한 숨도 못자는 그런 병입니다.
사람이 어떤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의 몸에서는 코티졸과 아드레날린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몸이 혈액을 급작스럽게 근육으로 집중하여 보내버립니다. 심지어 뇌와 심장에 까지도 소량의 혈액만을 공급을 하고 나머지는 전부 몸의 근육으로 보내버립니다. 대항하여 싸우든지 뛰어서 도망을 가든지 너에게는 지금 근육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자가진단입니다. 신기하지요? 저는 인체를 공부하면 할수록 예수 안 믿는 의사는 의사도 아니라고 봐요. 어떻게 이렇게 신비한 인체를 공부하면서 창조주를 안 믿을 수가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 스트레스 호르몬이 뇌와 심장으로 가야할 혈액을 근육으로 다량 보내 버리면 심장이 살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게 되고 뇌의 사유 능력이 떨어집니다. 뇌에 피가 모자라거든요. 지각 이상이 오고 집중력도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잠을 못 자게 되고, 그게 반복이 되면서 점점 대인 기피 현상이나 광장 공포증 등으로 점점 깊이 침잠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증상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사람들의 혀 때문이었습니다.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점령된 이 이민 교회에서 그걸 부수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러저러한 공격들과 모함들과 배신과 거짓말 등이 항상 제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남자답게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것 같았는데 그런 것들이 반복이 되다보니 거기에서 얻은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된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 들 열 명이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우리의 스승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습니다. 어떤 기복주의 목사님이 ‘너 때문에 목사 노릇 해 먹는 게 너무 어려워졌다’며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제 얼굴에 얼음물을 끼얹고 갔을 때에도 30 분도 안 되어서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40년 신앙을 제가 부정한다며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자고 신앙생활 하는 게 왜 나쁘냐?’고 ‘미국에는 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협박을 면전에서 받았을 때에도 웃어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되지도 않는 말로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그런 혀로부터의 공격은 오래도록 몸에 남아서 제 육신과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제가 전하는 복음이 듣기 싫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저를 폄훼해 버리면 듣기 싫은 십자가 이야기도 제가 무너질 때 함께 묻혀 버릴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혀들의 공격에 단 한 번도 응전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겠지 했는데 그동안 제 몸과 마음이 그렇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을 모른 것이지요.
그러니까 늘 panic attack에 시달렸던 겁니다. 분명 또 그런 어택들이 올 것이라는 것이 제 마음속에 있으니까 제 뇌가 수시로 제 몸에 ‘너는 지금 공격 받고 있어.’라는 디스오더(disorder)를 내리는 겁니다. 그게 살인이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 그런 공격은 저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죄 성이 그렇게 남을 끌어내려 자신을 높이는 것에 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다 그런 공격에 노출이 되어 있고 스스로가 공격자가 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게 지옥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러한 불 경건의 세계에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거기는 못 살 데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어떻게 자신을 구원해 내었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매일같이 다른 이들을 죽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게 될 인간들의 불 경건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령의 일하심에 의해 진짜로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이며 이 세상에게 가장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자인하는 자가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심지어 모함을 하고, 험담을 해요? 실수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살인자의 삶을 변함없이 살 수는 없단 말입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 이들은 반드시 어떤 지향성을 갖게 된다니까요. 분명 변화가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지금 여러분 앞에 아주 신 레몬 라임이 놓여 있습니다. 그걸 칼로 반을 잘랐습니다. 신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그걸 손으로 잡고 또 반을 갈랐어요. 시고 신 레몬 라임의 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그걸 하나 들어서 입 속으로 넣습니다. 그리고는 꽉 깨물었어요. 입 안에 시디 신 레몬 라임의 물이 확 튀겼습니다. 어떠세요. 한번이라도 레몬 라임의 맛을 보았던 사람은 지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 있으실 겁니다. 보세요. 올바른 정보가, 올바른 지식이, 내가 경험하여 체득한 사실이 내 머리 속으로 들어오니까 내 육신이 반응을 하지요? 진짜 레몬 라임이 내 앞에 없는 데도 마치 레몬 라임이 내 입 속에 들어 온 것처럼 내 육신이 반응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나에게 하늘의 계시를 올바로 깨닫게 해 주셨을 때 어떻게 내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의 지향성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하면서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실체로 들어오게 될 때 그것이 우리를 뒤집어엎어 내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은 자들은 늘 변함없이 불 경건의 삶을 살지 않아요.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도 않고, 남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고 인간들의 행위만 난무하여 착한 일은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 진짜 하늘의 의인다운 삶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 그러한 인본주의를 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뭐라고 했어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실 때 무엇을 보고 의롭다 하시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더니 ‘넌 의인이다’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불 경건이나 불의나 다 같이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인간들의 행위와 자격과 조건 등으로 하나님의 의에 무언가 보태려고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불 경건과 불의가 무엇을 막는다고요? 진리를 막는다고요. 예수의 십자가와 예수의 보혈의 온전함을 멸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뭔가 부족하여 인간들이 보탤 것이 있다는 식의 기고만장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용서받지 못할 죄란 말입니다.
이렇게 18절을 풀면 이제 19절부터의 내용이 아주 수월하게 풀려집니다. 그건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막는 불 경건과 불의는 모두 ‘나’라는 존재 인식의 왜곡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놓여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나 화 정도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없음에 불과한 피조물의 행위나 사고를 보시고 화를 내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냥 없애 버리시면 되는데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는 대상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인 동형론 적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셔서 속 좁은 노인네로 하나님을 몰아가시면 안 됩니다. 어떤 대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자기 존재를 챙기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력이 그 존재에게 충만하고 완전하게 부어지지 못할 때 그 존재의 저주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력을 온전하게 받아야 비로소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자기의 것을 조금이라도 챙겨서 사유하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력과 복을 충만하게 다 받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 챙기기에 머물러 있는 존재는 절대 살아있음의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존재를 챙기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힘과 열심을 근거로 하늘로 오르려 하는 인간들의 기고만장의 현장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넙죽 받아들이는 자만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 년에 휴가를 15일을 갑니다. 봄에 닷새, 여름에 닷새, 겨울에 닷새 이렇게 15일을 휴가로 쓰는데 그때가 모두 우리 세 아이들의 방학 기간입니다. 지난 봄 방학 때에도 우리 장로님들이 숙소를 하나 잡아 주셔서 레이크 타호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레이크 타호라는 동네는 스키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10월 쯤 개장을 해서 4월까지 스키장을 운영을 하니 거의 일 년에 반 이상이 스키 인파로 북적이는 곳입니다. 그곳은 산 하나 정도를 깎아서 스키장으로 만든 곳이 아니라 거대한 산맥의 일부를 뚝 끊어 내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키장을 만든 곳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네바다 주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 사람이 캘리포니아 주로 내려갈 수도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스키장이니만큼 코스가 아주 다양합니다. 한 코스를 정복하면 또 다른 어려운 코스가 나오고 그 코스를 정복하면 또 다른 코스가 나옵니다. 제가 그 모든 코스를 다 돌아 내려 오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작년부터 스노우 보드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전히 초보자 코스에서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큰 아이가 하루에 7시간씩 스노우 보드를 연습하더라고요. 피곤하기도 할 텐데 지칠 줄 모르고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영민아 왜 그렇게 열심히 보드를 타는 거야? 그렇게 재미있어? 안 피곤해?’ 그랬더니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피곤해요. 쉬고 싶어요. 그런데 저 산 꼭대기에 꼭 올라가고 싶어요. 거기에서 폼 나게 내려오려면 열심히 연습을 해야지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참 슬펐습니다. 우리 큰 아이가 산꼭대기라는 목적을 붙드는 순간 그 아이의 휴가는 노동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아래 초보자 코스에서도 얼마든지 스노우 보드를 즐기며 재미있게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라면 저 꼭대기 정도에서는 내려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야망이 생기자 그 아이가 더 이상 휴가를 즐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민아 너 유년 주일학교 때 청년부 형들하고 스키장에 갔던 거 기억하니? 그 때 넌 생전 처음 스키를 신어 보았잖아. 그런데도 형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간다고 하니까 좇아 올라갔다가 그 위에서 못 내려오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거 기억 안나? 만일 아빠가 그 위에 올라가보지 않았으면 넌 한참을 그 추운 데서 혼자 벌벌 떨며 공포에 떨었을 거야. 그렇지? 그 때 아빠가 네 옆에 앉아서 해 준 이야기 기억 안나?’
예전에 저희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하고 스키장 부근으로 수련회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하루를 할애를 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스키를 타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 좇아간 청년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우리 아이를 상급자 코스 리프트에 태워 올라갔었습니다. 저도 스키를 좋아하는 지라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열심히 타고 있었는데 아이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올라가 보았더니 저 산꼭대기 구석에 우리 아이가 스키를 벗고 그 스키가 미끄러져 내려 갈까봐 스키를 꼭 안고 앉아 있는 거예요. 멀리서 봐도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슬며시 그 아이 옆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아이가 옆에 앉은 아빠를 발견하는 순간 희색이 만면했습니다. 이제 살았다 하는 그런 표정이었어요. 제가 그 때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영민아 여기는 스키를 오래 탄 사람들이 올라오는 곳인데 오늘 처음 온 우리 영민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지?’ 아이는 형들이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멋지게 내려오는 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높은 곳에 올라가서 형들처럼 멋지게 내려 와 보려고 했다는 거지요.
이번에는 못했지만 다음번에는 열심히 연습을 해서 꼭 이 꼭대기에서 스키를 탈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영민아, 왜 꼭 이 높은 곳에 올라와야 남들이 멋있게 봐 줄 거라 생각을 해? 저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스키를 탈 수 있었잖아? 꼭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 내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란다. 영민아, 아빠는 영민이가 어디에 있어도 상관이 없어. 아빠는 영민이 하고 아빠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아도 돼, 너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특별히 유명해 지지 않아도 돼, 너무 부자가 되지 않아도 돼, 평범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잘 살다 가자’ 초등학생 아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때 생각을 하며 고등학생이 된 우리 큰 아이에게 다시 똑같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혹자들은 아이의 열심을 오히려 꺾는 거 아니냐고 걱정도 하고, 그러다가 이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내가 높이 올라가려 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머리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밟혀주고 무시당하고 약자로 산다 해도 자신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자리를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그게 나은 것 아닙니까? 내 자식의 이 세상에서의 출세보다는 천국에서의 교제가 더 기대 되어야 하는 게 성도의 올바른 자세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진리 앞에 항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꼭 붙들고 있는 자들입니까?